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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곰돌이 Mar 17. 2019

흔들리며 꽃을 피우다

네덜란드에서 돌아와 '우리는 무엇인가'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꽤 오랫동안 자유를 꿈꿨다.


자유롭게 세상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동경했고, 거대한 힘 앞에 혈혈단신으로 맞서 싸운 수많은 돈키호테를 경외했다. 갓 스무 살, 어른이 된 나는 처음으로 인생을 장악하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불안감과 해방감이 뒤섞인 기묘한 느낌이었다. 처음으로 이성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해 보았고, 멋들어진 양복을 꺼내 입고 어른 흉내를 내 보았고, 배낭에 의지해 히말라야의 어느 산골짜기에서 잠을 청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여행을 떠나 올 때면, 진정한 내가 된 것 같은, 내 인생을 멋대로 쥐고 흔드는 것 같은 나른한 쾌감에 휩싸였다.


변치 않는 우정을 이야기했던 친구가 있었다. 친구라는 말이 너무 쉬워진 요즘에는, 친구라는 말로도 부족한 인연이었다. 이런 게 우정이지. 대학에 가서도 변하지 말자고 했고, 변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로 이렇게까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우리밖에 없는데 어떻게 변할 수가 있겠어. 그랬던 친구를 이제는 SNS의 친구 목록으로만 이따금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말' 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을 하고, 듣고, 기록으로 남기며 살아간다. 자유를 말하기도, 사랑이나 우정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인다. 스무 살의 자유와 스물세 살의 자유는 다르다. 우리는 지금도 술집에서 만나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라고 한탄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말이 쇼펜하우어의 말과 같은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아무리 '내 작품은 오리지널입니다!' 하고 소리쳐 본 들 그런 소리는 대부분 바람에 날려가 사라져 버립니다. 무엇이 오리지널이고 무엇이 오리지널이 아닌가, 그 판단은 작품을 받아들이는 독자와, '합당한 만큼 경과한 시간'의 공동 작업에 일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


같은 말도 누가, 어떻게, 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쩌면 우리가 이제서야 알게 된 것들도 아주 예전에 이미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가족이 소중한 줄, 엄마 품이 따듯한 줄, 사랑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으며 우정이 항상 영원하지도 않다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는 도중에 조금씩 그것을 새로이 깨닫는다. 우리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아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말에도 세월이 깃드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떤 이는 '시간은 사건의 축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말도 '사건의 축적'이 되는 셈이다. 사람은 자신의 말을,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1+1=2와 같은 명제를 증명하는 데 열의를 다하는 수학의 증명처럼, 아주 단순하고 당연한 말을 평생에 걸쳐 새로이 깨닫고,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노래했던 자유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지금은 몰라도, 그 때는 틀렸던'이유는, 말 이라는 것이 어쩌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우리는 일생동안 거듭 물을 수밖에 없다.


'나'라는 건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무엇일까?


때때로 이 세상에, 우리 하나쯤 없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하나 쯤 없어도 세상은 지금과 같았을 것이고, 누군가 우리 자리를 대신했을 것이고, 기회를 대신 누렸을 것이다. 어느 날 우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깔끔하게 잘려 나간다면, 사람들은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겠지만 곧 적응하게 될 것 같았다. 그게 무서워서, 의식적으로 발버둥 치며 '나 여기 있다' 소리쳤다.


주말인데도 모두들 할 일이 있다는 기분이 주눅 들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상태가 죽음처럼 느껴졌다. 시간에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시간을 죽여야만 했다. - 배준, <시트콤> - 


가만히 있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쉬웠다. 자존심은 조금 상하지만, '조용히 있으면 중간은 가니까' 라는 말처럼, 일단 잠에 빠져들면 몸이 편하고, 마음도 편해진다. 크리스마스의 외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술을 진탕 마시고 크리스마스 내내 잠만 자는 것'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이제서야 드는 생각은, 발버둥치던 것이나 잠자코 있던 것 모두 두려워서였던 것 같다.


이와는 반대로, 그저 우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어려웠다. '나다워지는 것'은 때로 너무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때면, 편한 날보다 불편한 날이 더 많았다. 중간은 커녕 중간에도 못 미치는 날이 더 많았다. 우리가 꿈꾸는 모습에 미치는 것은 고사하고, 명백한 잘못들을 저지를 때도 있었다. 저물어가는 유학 생활의 마지막 연휴에도, 여전히 부족한 스스로의 모습에 수치스러워하고 지나온 길에 무엇 하나 이뤄낸 것 없음에 부끄러워한다. 나는 무엇이었나, 우리가 애썼던 모든 순간들은 무엇이었나 생각하며 짐짓 가슴을 펴 보지만 허탈한 마음에 깊은 마음속으로 자꾸만 침잠(沈潛)해 갔다.


벌써 대학교에 입학한 지 4년이 지났다. 처음 보는 캠퍼스 풍경에, 동그래진 눈을 하고 선배들을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때가 기억난다. 참 많이 웃고 울었다. 졸린 아침수업시간과, 함께 땅땅 후라이드를 뜯으며 위안하던 밤과, 불안한 미래에 잠 못 들었던 무수히 많은 새벽들을 생각한다. 꿈을 이야기하던 눈동자에 맺혔던 좌절과 기쁨의 방울들을 기억한다. 이제 익숙하던 얼굴이 또다시 떠나고 나면, 친구들과 함께였던 캠퍼스에는 모르는 얼굴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주인이었던 캠퍼스에서 조금씩 밀려나게 될 것이다. 달력을 되짚어 보면 아주 많이 지나온 것 같은데, 느끼기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지나오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의 모습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아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다. 그 시간을 너무 천천히 지나오느라 겨우 이것밖에 오지 못한 건 아닌지, 너무 빨리 달려오느라 소중한 풍경을 무심히 지나쳐 오지는 않았는지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몸부림친다. 때로는 온전히 스스로의 선택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어찌 손쓸 수 없는 더 큰 흐름에 떠밀려 다닌 것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마음에 밑바닥까지 맛보았을 때에도, 일어나서 걸어 간다. 


우리는 거대한 흐름의 아주 작은 존재들이지만,

그런 작은 존재들이 모여 세계를 만들어낸다.

우리의 아픔도 무언가를 얻기 위한 대가였을 것이다. 

- 아라카와 히로무, <강철의 연금술사> -


사람은 무언가의 희생 없인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그렇다고 댓가를 지급한다고 해서 항상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댓가를 지불한다고 해도, 항상 같은 걸 얻지는 않는다. 그래도 사람은 댓가 없이 무언가를 얻을 수 없고, 우리가 받았던 아픔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댓가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우리는 무엇이었나, 우리가 지나 온 시간들은 다 무엇이었나. 곰곰히 생각해보아야지. 숨을 참고 저 바닥까지 내려가 가만히 몸을 웅크려야겠다. 그리고 다시 발버둥쳐 올라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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