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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Nov 24. 2023

일인칭 경계인 시점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

어디서 살 것인가. 나고 자란 곳? 살고 싶은 곳? 일터나 소중한 사람의 곁? 부질없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태어남을 선택하지 못하듯, 살아갈 곳도 온전히 ‘나’의 의지만으로는 선택할 수 없으니까. 작은 사람일수록 더 그럴 것이다. 여기서 작다는 것은 물리적인 크기를 말하지 않는다. 경계에 선 사람, 선택지가 적은 사람 그러므로 손과 어깨와 발소리가 작아질 수밖에 없는 사람을 뜻한다. 그것을 결과로만 보면 일부의 일이 되겠지만, 성장이나 노화처럼 특정 시기에 거쳐야 할 조건으로 본다면 모두의 일이 될 것이다. 곽은미 감독의 영화 《믿을 수 없는 사람》(2023)의 주인공 ‘한영’(이설)도 그러한 시기를 겪는 중이다. 그는 잘 살고 싶어서 남한에 온 20대 탈북민이다.

     

한영은 동생 ‘인혁’(전봉석)과 ‘샤오’(박세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시 살고 싶어, 새롭게.” 그런 바람으로 서울에 온다.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취득해 관광 가이드로 일한다. 그러나 여하한 사건을 겪은 후 정착이 아니라 출국을 선택한다. 어디로 갔는지, 그 목적이 이주인지 여행인지조차 불분명한 그 장면이 영화의 결말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다시 처음 옮긴 대사를 보자. “다시 살고 싶어, 새롭게.” 그러기엔 서울은, 불가능한 곳이었나. 이민을 앞둔 친구 ‘정미’(오경화)는 말한다. “우린 모습만 같지, 한국 사람들에겐 외국인보다 못하다.” 무리한 관점은 아닐 것이다. 한영은 경력이 있어도 인정받지 못한다. 쉬이 믿어주지 않는다. 탈북민이라는 편견 때문이다. 

    

누구나 알지만, 편견은 악인의 도구가 아니다. 나쁜 사람들의 사회에만 있는 특수한 시선도 아니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존재한다. 이 영화도 그 점을 잊지 않는 듯하다. 한영이 겪는 사람들이 ‘나쁜 한국 사람들’이 아니라 ‘경계 안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조차 고발보다는 공감에 무게를 둔 듯하다. 전자가 목적이었다면 탈북민이 겪는 특수한 차별과 특정 사건에 집중했을 테니까. 악의적인 인물을 만들어 두고 주인공을 괴롭혔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그러지 않는다. 사회에 가담하려고 노력하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립된 청춘을 그리는 데 장면 대부분을 할애한다. 어색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이방인 혹은 경계인이 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언제인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 아닐까. 그때 우리는 영화 초반의 한영처럼 아득함을 겪는다. 자신의 서툶에 당황하거나 외교 문제를 비롯한 정치적 흐름처럼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압력을 겪는 때도 있다. 그 과정을 버티며 서서히 사회인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부는 한영이 그랬듯 가담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한 순간의 고통에도 환경(또는 신분)에 따른 정도의 차이가 있고, 그것을 전제하지 않은 채 말하면 폭력이 될 수 있음도 모르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는 끝내 알지 못하는 것도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표정, 호흡, 눈빛이 경계에 선 사람을 작아지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 이 글의 시작에서 ‘작은 사람’을 운운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의도하지 않아도, 아니 선의를 가져도 숨기지 못하는 ‘너’와 ‘나’는 다르다는 이질감. 그로 인한 그어지는 선의 존재. 그것은 그것이 보이는 당사자에게만 꾸준히 목격된다. 다름을 목격한 당사자는 작아지고, 작아질 때면 종종 길을 잃는다. 불현듯 커진 세상 안에서 온전히 내 갈 길을 찾기란 어렵기 때문이리라. 경계에 선 사람들을 위해 우리 사회가 어떤 조처를 해야 할지 나는 모른다. 이대로라면 더 많은 ‘한영’이, 청춘이 이곳을 떠나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영화 속 한영만큼은 불행해지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는 작지만 강한 사람. 즉,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 삶의 장소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아서다.



(2023. 11. 23.)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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