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경성크리처》 & 《이재, 곧 죽습니다》
얼마 전 두 편의 OTT 시리즈를 보았다. 《경성크리처》(넷플릭스)와 《이재, 곧 죽습니다》(티빙). 두 편 모두 지난해 연말 일부가 공개됐으며 나머지 분량은 같은 날(2024년 1월 5일)에 나온다고 한다. 두 작품의 공개 회차를 모두 보면서 흥미롭고 슬프고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결말은 보지 못했으니 구체적인 소감은 말할 수 없겠다. 대신 내가 느낀 공통점(共通點), 아니 고통점(苦痛點)에 관해 말해보겠다. 공개 시기 외에는 별다른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작품은, 그러나 유사한 점이 하나 있었다. 작품 안에서 수많은 살인이 생생하게 반복된다는 것.
그래서 보는 동안 얼마간 고통을 느꼈다. 오해 없길 바란다. 장면의 생생함은 두 시리즈의 문제점이 아니다. 작품 안에 살인이 나오는 것 역시 특별하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이야기는 죽음을 통해 말하고, 때로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1945년 3월의 경성을 배경으로 한 《경성크리처》에는 731부대를 연상케 하는 집단이 나오고, 《이재, 곧 죽습니다》는 작품의 주제가 죽음이다. 전자는 죽음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후자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따라서 내가 겪은 고통의 원인은 두 작품이 아니라 나에게서 온 것이다.
언젠가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전쟁 영화 속 죽음을 보는 일. 그것은 여전히 예외 없이 고통스럽다.” 지금은 장르가 고통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어떤 작품에서건 죽는 장면을 보면 일정한 고통을 느낀다. 과거에는 그러지 않았다.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잔혹한 장면이 나오면 그것이 거의 미학적이라고 생각한 적 많았다. 작품 속 살인은 예외적인 쾌감을 준다고도 믿었다. 악을 처단하거나 주인공이 목표를 이루는 장면(또는 과정)과 맞닿아 있으므로 반복적인 살인 장면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불편하지 않았다. 이야기에 몰입하되 고통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은 괴롭다. 살인의 장면을 보다 보면 종종 내 살이 찢기고 내 뼈가 부러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한 장면에 왜 이렇게 취약해진 것일까. 곰곰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작품과 현실의 잔혹함이 멀지 않은 듯해서. 이제는 ‘작품 속’이라는 안전지대에서 건너온 잔혹함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가 어려워졌다. 그러기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의 소식을 ‘너무’ 많이 보고 읽으며 살고 있다. 보거나 읽을 게 ‘너무’ 많은 세상은 단순히 볼거리가 많은 세상이 아니라 안 봐도 되거나 안 보면 서로에게 더 좋을 것까지 보게 되는 세상일 것이다.
판단은 이후에 한다. 결말을 마주한 뒤에야 작품 속 잔혹한 장면이나 자극적인 사실이 담긴 보도가 불가피했는지, 불필요했는지 따져 본다. 오늘 언급한 두 시리즈도 그렇다. 결말을 마주한 뒤에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려보다는 기대한다. 두 작품 모두 앞선 잔혹함이 중요한 무언가를 전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거로 추측한다. 오래 간 창작물과 창작자를 옹호하는 편에 서온 관성 탓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희망한다. 다만 결말이 공개되기 전에 이 글을 쓴 이유는 개별 작품에 관한 감상 대신,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다. 눈치채셨겠지만 그러려고 두 작품을 빌려왔다.
수신인은 볼 게 많은 세상에 일조한 모든 이들이다. 조악한 읽을거리를 세상에 내놓는 나를 포함해서. 그러므로 다짐하듯 말해 본다. 무엇을 이야기하든, 어떤 소식을 전하든 그 안에 담긴 잔혹함이 불가피한지 불필요한지 꼼꼼히 따져 보자. 투명함과는 명백히 다른, 부재해도 좋을 선명함이 강제되는 세상에 일조하지 말자. 세상은 무엇이든 함부로 들춰내고, 맥락 없이 재단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작을 고민하자. 작품으로든 기사로든 잔혹함을 담아 전할 때 잊지 말고 스스로 묻자. 이것은 무엇을 위한 고통인가.
(2024. 01.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