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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학민 Jan 11. 2024

우리는 망한 적 없다

권여름 소설 《작은 빛을 따라서》

작품에 등장한 인물이 꺼질 듯 말 듯 “간당간당”한 빛을 향해 발을 내딛는 이야기에 끌린다. 대단한 반전은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채로도 계속 걸어가는, 살아가는 장면을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다. 그것이 우리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같은 이유로 작품 속 빛이 꺼지지 않기를 제법 간절히 바라기도 한다. 그러다 가끔은 조도 따위, 단지 주어진 조건일 뿐이라는 듯 이야기의 끝까지 묵묵히 제 갈 길을 걸어가는 인물의 뒷모습을 마주할 때가 있다. 때마다 나는 알지도 못하면서 중얼거린다. 이런 게 인생이지. 어려워도 살아 볼만한. 권여름 작가의 장편 소설 《작은 빛을 따라서》(자이언트북스, 2023)에 등장한 가족들을 보는 마음도 이랬다.

     

소설은 1996년, 정읍시에서 ‘필성슈퍼’를 운영하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둘째 딸 ‘은동’의 시선을 통해 전개되는데 초반부터 ‘사건’이 터진다. 은동이 할머니 “황서은” 씨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두 사람만의 비밀이니 여기서는 그 내용을 공개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던 할머니의 당부 또는 협박이 너무 무섭다) 웃음 나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는 소설이라서 나누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 역시 참아 본다. 앞으로 이 소설을 읽을 분들이 겪게 될 커다란 즐거움과 벅참을 빼앗을 용기가 나지 않아서다. 대신 오늘은 필성슈퍼를 지켜내기 위해 애쓴 은동의 가족 이야기로 남은 지면을 채워보겠다.

     

모두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IMF 시대. 필성슈퍼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회를 통해) 인근에 들어선 외국계 대형마트로 인해 폐업 위기에 몰린 것이다. 은동의 “아빠”는 슈퍼 연합회 소속으로 시위에 나선다. 그 모습을 본 은동은 학교 연극반을 떠올린다. 연기를 하고 싶어서 연극반에 들어갔는데 담당 교사는 매번 토론만 시켰다. 은동이 물었다. “저희 연극은 안 하나요?” 선생님이 답했다. “일단 세상에 대해 더 고민하고, 그런 뒤에 연극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선생님은 그게 더 의미 있는 연극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이 나가자 은동은 선배 언니에게 물었다. “세상을 모르면 연극을 할 수 없는 거예요?” 돌아온 대답.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이윽고 선생님은 교문 앞에서 특별반 폐지 시위를 한다. 어느샌가 연극반도 동참한다. 그중에는 은동도 있었다. 다만 은동은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 은동에게 엄마가 말한다. “대학 좀 잘 보내겠다고 애기들을 무안하게 하면 돼? 사람 무안하게 하는 거 아니야.” 단순하고도 정확한 설명에 운동은 납득했다. “명분을 얻은 덕분에 끝까지 교문 앞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아빠도 좀더 절실한 마음으로 시위를 시작했다.” 그러니 실감할 수밖에. “그때는 전혀 와닿지 않던 주제를 가져와 토론시키는 선생님이 못마땅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은 뾰족한 문제가 되어 우리 필성슈퍼 앞으로 그러니까 우리 가족, 내 앞으로 침투하는 중이었다.”

     

남에게 일어나는 먼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다가올 때 우리는 변한다. 집안의 인간에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비로소 공동체에 관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리라. 은동이 한 뼘 자라는 사이, 쏜살같이 변하는 세상 앞에서 필성슈퍼의 불빛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은동의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는 물러서지 않았다. 매출이 급감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 날이 있어도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저마다 애썼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은동은 안도한다. “외부의 파도에 쉽게 흔들렸지만 마냥 휩쓸리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믿음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무엇보다 엄마의 이 말이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우리는 망한 적 없다는 말.’”

     

그래서 소설의 제목이 역설로 느껴진다. “간당간당”한 작은 빛을 따라 걷는 은동의 가족들은 커다랗게 빛나기 때문이다. 어떤 빛인가. 삶의 의지라는 빛이다. 다만 읽는 마음조차 가득 환해지는. 성공과 행복의 평균이 극도로 높아진 요즘의 관점에서 필성슈퍼는 ‘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외부의 평가 따위 신경 쓸 이유도 여유도 없으리라. ‘작가의 말’에 적힌 대로 “실패의 순간에 도사리는 성공의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더 중요하니까. 작가는 말한다. “우리 삶은 수많은 실패의 연속이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얻고 성장하며 변모한다.” 그러므로 다시 중얼거려 본다. 우리는 망한 적 없다. 계속 성장하고 변모할 뿐. 아직 망한 적 없다. 빛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2024. 01. 11.)

(@dltoqur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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