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단 한 사람》
어느 날부터 ‘목화’는 꿈에서 무수한 죽음을 본다. 죽음은 여럿이지만 살릴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 그것도 신적인 존재(나무)가 정해준 대상만 구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을 구할 기회를 스스로 져버린다면? 두통이나 구토 같은 물리적 고통이 뒤따른다. 무서운 사실은 지금부터. 목화가 꿈에서 구한 사람은 현실에서도 생존한다. 구하지 못한 이들은 실제로도 죽는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한 이 구원 행위는, 그러므로 한 사람을 구하는 동시에 무수한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다. 더구나 정해진 기한도 없다. 인생에 걸쳐 구원과 죽음을 거듭 겪어야만 한다. 상상만 해도 아뜩한 이 고통은 목화만의 사정이 아니다.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겪었고 이제 조카에게도 이어진다.
네 사람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할머니 ‘천자’는 순응한다. 왜 나인가? 의문을 지우고 받아들인다. 자신 역시 누군가 살려준 한 사람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주어진 일을 해낸다. 어머니 ‘미수’는 고통을 느낀다. 한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 나머지 죽음을 지켜보는 일이 괴로워 저항하다 자기 삶을 저주한다. 목화는 어떤가. 처음엔 스스로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여하한 과정을 끝에 내린 결론. “산 사람을 살리는 것. 그것은 이제 목화가 원하는 일이었다.” 조카 ‘루나’는 처음부터 긍지를 갖는다. 스스로 바란 일이고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 여기며 한 사람을 살린다. 세대를 관통하며 이어져 온 네 사람의 일은 그대로인데 태도는 변해온 듯하다. 어떻게? 점점 더 주도적으로.
인간의 태도는 살아가는 시대에 영향을 받는다. 전쟁과 가난 그리고 죽음이 일상화된 시대를 살아온 천자와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살아가길 추구하는 현시대의 루나의 차이는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은 그보다는 개인차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에필로그에 적힌 문장을 보자. “모두 다르다. 각자의 신이 있는 것이다.” 시대가 변해서든 성정이 달라서 그렇든 각자의 신을 따라서 아니, 각자의 신념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사니까. 삶이 다르지 않으니 부정할 수 없겠다. 그들이 고통 속에서 해낸 ‘산 사람을 구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큰일임을. 어쩌면 그들보다 그들의 일을 지켜본 이들이 더욱 잘 알지 않을까?
소설에는 죽음 곁의 상실이 나온다. 요컨대 ‘금화’가 사라졌을 때. 실종으로 쓰여있지만, 그 의미를 죽음과 다르게 읽기란 어렵다. 영영 돌아오지 않는 사람과 남은 사람들이 있으므로. 한 사람이 떠난 순간, 목수는 나무에 깔려 고통을 겪다가 그 순간의 기억조차 잃는다. 목화는 도움을 요청하며 울면서 내달린다. 넘어지고 달리고 넘어지고 또 달린다. 다른 가족들도 저마다 고통을 겪는다. 단 한 사람 떠났지만, 한 세계가 무너졌다는 듯이. 그래서 죽음은 언제나 복수(複數). 단수(單數)의 죽음은 없다.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도 그럴 것이다. ‘고작’ 한 사람은 구할 수 없다.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그 사람과 이어진 모든 이들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세계를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2024. 0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