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페미액션: 몸의 해방
불볕더위의 기세가 한창일 무렵 노브라로 도서관에 갔다가 겪은 일이다. 화장실로 들어가는데 바로 옆 남자화장실에 나오는 남자가 내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까지 돌려가며 몸을 훑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껴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간이 꽤 흐른 후 어깨를 움츠리고 팔짱을 낀 채로 화장실을 나왔다.
열람실에 돌아와서도 펼친 책은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다. 그가 마땅히 느껴야 할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왜 내가 곱씹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뒤통수에 뭔가 ‘쌔’한 기운이 감돌았다. 조심스럽게 뒤돌아보니 역시나 화장실에서 마주친 그가 나를 뒤에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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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보다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순간적으로 먼저 눈을 깔면서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 책을 쑤셔 넣고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심지어 그의 옆을 지나갈 때는 “아저씨 뭘 봐요?” 하고 따져 물은 것이 아니라, 밖에서 사람이 기다리는 것처럼 전화받는 시늉을 하며 자리를 피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욕감 돌고 공포감이 차올랐다. 학교 앞 바바리맨, 만원 버스의 더듬는 손, 공중화장실 몰카, 골목길 스토킹 등등 그동안 숱하게 성범죄를 당하고 겪으며 오직 피하고 숨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자 익숙한 방식이었다. 혹시나 더 큰 범죄를 겪을 까 봐, 뉴스에 끝없이 나오는 혐오 사건의 당사자가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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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드랑이 털과 젖꼭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민소매를 입은 그가 런닝과 반팔을 입은 나의 몸을 불쾌한 시선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침범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불행히도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이 사회적 문화나 인식이 아니라 ‘브래지어’라는 천조각뿐이란 말인가.
웃통을 벗어 재낀 여자들의 다큐멘터리 <불꽃페미액션:몸의해방>을 보았다.
나는 목욕탕 바깥에서는 한 번도 까 본 적 없는 가슴을 그녀들은 캠페인을 하며 길거리에서 시원하게 깐다. 조롱과 멸시를 받을 까 봐 수치감 속에서 숨고 살았던 몸들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우리의 몸은 당신의 판타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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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우리의 몸은 청순하면서도 섹시하고 가늘면서 탄력 있는 판타지 속 이미지가 아니라, 겨드랑이에 털도 나고 생리도 하고 배에 지방도 있는 실제 하는 몸이다. 성적인 대상으로만 의미 있던 존재에서 벗어나 삭제하지 않은 고유한 몸을 보자 나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우리의 몸은 (얼굴, 가슴, 엉덩이로) 각각 분리된 몸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몸이며, 성적이거나 성적이지 않은 변화무쌍한 변이체이며 그 자체로 역사이고 인격이며 존재이다.” 김양지영, 김홍미리, <처음부터 그런 건 없습니다>, 한 권의 책(2018), p.57
굳이 웃통까지 깠어야 했냐고 묻는다면, 타인의 몸을 함부로 침범하는 자들은 왜 아무렇지도 않게 활보하는 것인지를 먼저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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