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불안 사이
#패싱
뉴욕 최고의 호텔 드레이튼의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웨이터가 정중하게 내온 에메랄드 빛 에이드를 마시며 거리를 내려 본다. 성난 더위에 눌려 일그러진 사람들과 끈적이는 도로에 들러붙은 자동차들도 위에서 내려다보면 관광엽서처럼 즐겁게 보인다. 머리색과 꼭 어울리는 황갈색 클로 시 모자와 어깨선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아코디언 주름 원피스는 나의 하얀 피부와 대비되어 더욱 선명한 붉은 빛깔을 뽐냈다. 어쩌다 눈을 마주치면 어김없이 따뜻하고 세련된 미소를 건네는 백인들은 나 역시- 흑인 린치사건에 진심 어린 우려를 표하면서도, 흑인 가정부의 발걸음 소리와 복장 위생에 대해서는 엄격한 목소리로 타이를 줄 아는 분별 있는 백인 여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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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이 스스로 백인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처럼, 나 역시 나 자신을 흑인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남편에게도 마찬가지다. 건강하고 호탕한 사업가인 남편은 흑인을 혐오하는 것 말고는 대단히 자상한 사람이다. 그는 나의 아름다운 눈동자와 부드러운 피부, 세련된 자태를 사랑했고,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0년 전 여름, 경비원이었던 아버지마저 술독에 빠져 죽자 친척들은 돌아가며 나를 가정부로 취급했다. 그들은 청소와 요리를 시키면서도 혹시나 내가 찬장에 있는 저금통에 손대지 않았는지 매일같이 다그쳤다. 주말이면 교회에 데려가 흑인이었던 나의 어머니를 대신해 회개기도를 시키며 말했다. 백인처럼 보이지만, 넌 사실 흑인이라고. 사람들은 속여도 신은 속일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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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속의 얼음을 천천히 녹이며 기억을 삼킨다. 다 지나 간 일이다.
“아무래도 저 숙녀분이 당신을 아는 것 같은데?”
옆에서 줄곧 신문을 보던 남편이 쾌활한 눈짓으로 건너편 의자에 앉은 여자를 가리킨다. “클로시 모자로 한쪽을 가린 금발, 제라늄처럼 붉게 칠한 입술, 상아색 피부와 검은 속눈썹” 넬라 라슨(박경희 역), <패싱>, 문학동네, p.41)의 그녀가 도발적인 웃음을 지으며 나를 본다. 누구지?
그녀가 우리 테이블로 오는 동안, 자선연맹이나 승마클럽에서 인사했던 얼굴들을 빠르게 떠올렸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머나. 저는 얼굴을 보자마자 기억했는데, 표정을 보니 까맣게 잊으셨나 봐요? 아주 새까맣게.”
순간 얼어붙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이 내가 기억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그녀에게 되묻는다.
“혹시 우리가 베른에서 마주쳤을까요?”
“글쎄요,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겠죠.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가는 곳이 비슷비슷하니까. 그렇지만 저는 부인 분과 조금 더 오래전에 인연이 있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사우스사이드의 교회 같은 곳 말이죠.”
사우스사이드, 늙은 대고모가 평생을 다녔던 교회.
“사우스사이드요? 거긴 우리 하녀가 살던 곳이에요. 아버지가 정육점을 하셨다고 하던데. 거긴 그런 노동자들이 아주 많은 곳이니까. 여보 우리가 그곳에 간 일이 있었나?"
남편이 어깨를 으쓱이자 여자는 비밀스럽게 웃으며 내게 귓속말을 건넨다.
“하느님이 보고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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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패싱 의 캐릭터를 재구성한 짧은 오마주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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