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 사전을 찾아본다. 가끔 운이 좋으면 국어사전이 나의 감정상태를 명료하게 정의해줄 때가 있다. 요즘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나는 한동안 ‘일에 몹시 몰려 지내면서, 어떤 두려움으로 마음이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나를 급히 뒤따르고 있는 것은 시간과 돈이다. 아니 내가 시간과 돈을 좇고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쫓고 쫓기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면 쉽게 헤어나질 못한다. 일이 정신없이 닥칠 때면 퇴근을 해도, 밤에 잠자리에 누워도 머릿속은 바쁘다. 주말에도 다음주 월요일에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느라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다.
‘혹시 이 일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월요일이 되면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봐야겠다. 그런데 담당자가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진행하면 안 된다고 그러면 어떡하지? 골치 아프겠는 걸. 손실도 만만치 않겠어.’
실제로 일을 처리하는 시간보다, 일은 하지 않고 고민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쓴다. 참 비효율적이다. 그 시간에 일을 했으면 여유롭게 마무리했을 텐데, 걱정의 실타래만 붙잡고 있다가 늘 시간에 쫓겨 일을 처리한다. 그다음에 무엇을 할지, 시간과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이 무엇인지 찾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분, 초 단위로 쪼개서 촉박하게 움직이는 습관이 생겼다. 시간과 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모습은 초고속 무한경쟁 시대에 적합한 인재상 같지만,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얼마 전 서울로 출장 갈 일이 있었다. 먼저 자가용을 이용할지, 기차를 타고 갈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기차 출발 시간을 확인하고, 기차역에서 내린 다음 지하철이나 시내버스의 이동경로와 소요시간을 확인한다. 대략 약속했던 시간에 도착할 수 있으면 어떤 경로든 선택해도 괜찮은데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찾아본다. 더운 날씨에 땀 흘리며 걸어가야 하는 거리를 최소화하고, 택시를 탔을 때 시간과 비용을 얼마나 줄일 수 있을지 고민한다.
용산역이 아니라 수원역이나 안양역에 내렸을 때 버스 대기 시간이나 택시비가 각각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파악한다. 출장지가 서울 남쪽 구석에 있는 서울대라 이동경로가 복잡했다. 아! 생각해보니 전날 저녁 늦게 천안역 근처에서 강의가 끝난다. 그러면 홍성으로 돌아오지 말고 천안역 앞에서 하룻밤 묵고 가는 것이 체력 소모를 더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세웠던 계획을 리셋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이런 고민을 아내에게 말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꾸짖는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살아? 답답해서 더 이상 못 들어주겠네. 그냥 여유롭게 일찍 출발해.”
아내는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설명해보면 아내는 직관적이며 감정을 우선시하는 NF형이고, 나는 실용적이며 분석적으로 판단하는 ST형 인간이다. 성향이 전혀 다른 사람과 8년간 연애하고, 15년간 함께 살면서 나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아내의 조언에 따라 일찍 출발했더니, 안양역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고 난 뒤에도 시간이 남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만끽했다. 아내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다. 내가 세운 계획대로 움직였다면 우발적인 변수를 한 치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촉박하게 움직였을 것이다.
아내의 장점을 보고 배우면서 되도록이면 직관과 감정을 존중하려고 노력하지만, 타고난 성향을 어찌할 수 없다. 특히 창업 이후에는 돈에 쫓기는 마음이 더 강해졌다. 매달 동료들과 월급을 나눌 수 있는지, 연말까지 운영비가 충분한 지 순간순간 따져봐야 했다. 돈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증폭됐다.
오죽하면 취미가 ‘엑셀 돌리기’였다. 작은 회사라 회계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고, 혼자서 엑셀에 수식을 짜서 회계를 관리했다. 나중에 회계담당자가 생겼는데도 나는 틈만 나면 엑셀을 돌렸다. 출근해서 가장 먼저 회계 파일을 열어 봐야 다른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대략 재정상황을 파악할 수 있어도, 운영비가 얼마나 부족한지 정확한 숫자로 확인해야만 안심이 됐다. 이 정도면 강박에 가까웠다.
물론 숫자로 가득 찬 화면을 들여다본다고 해서 없던 돈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운영비가 부족하거나 연말에 적자가 예상될 때, 대안을 찾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런 습관이 창업자에 필요한 능력이라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숫자에 갇히면 창의력은 싹을 틔우지 못한다.
왜 나는 시간과 돈에 쫓기며 살까? 곰곰이 나를 들여다보기 위해 프리라이팅(Free-Writing)을 했다. 프리라이팅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식의 흐름을 무조건 손가락으로 받아 적는 방식이다.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면 머리가 말랑말랑해진다. 아무런 검열 없이 손을 움직이면 쓰기 전에 몰랐던 것을 알아차릴 때가 있다. 시간과 돈에 매여 있는 마음의 기저에는 욕심과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더 많이 벌고 싶은 마음,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프리라이팅을 하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찾았다.
‘내가 시간과 돈에 쫓기는 이유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해진 시간 내에 일을 해내지 못할 거라는 불안함은 나를 믿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사업과 생계를 유지할 만큼 돈을 충분히 벌 수 있다고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 그냥 나를 믿고 맡겨보면 어떨까? 그러면 이 불안감은 사라질까?'
나를 믿지 못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왔는지도 궁금해졌다. 태어날 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을 테다. 더 깊이 들어가 보니 부모님이 떠올랐다. 매사에 불만을 품고 화를 내며 조급했던 아버지, 평생 불안과 걱정 속에 살아온 어머니. 그런 부모님의 마음이 어린 나에게 투사된 것은 아닐까? 나 또한 그런 불안감을 내 자녀들에게 정신적 유산으로 남겨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