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찾는 것에서 글쓰기가 시작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잊고 글을 씁니다. 아마 그동안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써야 하는 글'만 써온 탓일 겁니다. 방학 내내 미루다가 억지로 썼던 일기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글쓰기를 숙제처럼 합니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대학교에서도 리포트 같은 글만 쓰다가 사회에 나와서는 업무에 관련된 글만 써왔을 겁니다. 저도 15년간 기자, 프리랜서 작가로 글을 써왔지만 그중에 내가 쓰고 싶어서 쓴 글은 몇 편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찾으려면 먼저 자신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에게 솔직해져야겠죠. 하지만 이것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아온 저 같은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님, 선생님 눈치,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직장 동료들 눈치, 집에서는 가족들 눈치를 봅니다. 신문사를 나와 창업했는데, 회사에서는 직원들 눈치도 많이 봤습니다.
평생 눈치를 보다 보니 문득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 모르는 바보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명확히 알고 표현하는 능력이 철이 들면서 퇴화된 것 같습니다. 아이였을 때는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것만 표현했을 텐데 말이죠.
누군가로부터 평가받는 글만 써온 탓에 우리는 글쓰기 앞에서 주눅이 듭니다. 시험과 리포트, 업무상 글쓰기로 우리는 평가하는 사람(교수님이나 직장 상사)이 마음에 들만한 글을 쓰는데 익숙해져 왔습니다. 이런 글만 쓰다 보면 글쓰기가 헛헛해집니다. 그럴수록 글쓰기가 싫어지죠. 이제는 내가 소외된 글은 정말 쓰기가 싫습니다. 남의 이야기만 써야 하는 기자라는 직업을 그만둔 이유도 그랬습니다.
여전히 저는 글을 쓸 때 독자 눈치를 많이 봅니다. 어쩌면 글쓰기의 숙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내 글에 반응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내 글을 읽고 누군가 비난하면 어떻게 하지?' 두려움이 글쓰기를 가로막습니다. 내 글이 인정받지 못하면, 내 존재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글과 나를 동일시합니다. 뭐 글쓰기만 그런가요? 많은 사람들이 일, 직업, 성과를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살아갑니다. 어쩌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원초적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좋아요'를 많이 눌러주고 댓글도 달아주면 좋겠다. 뭐 이런 게 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죠.
요즘 쏟아져 나오는 글쓰기 책들도 독자를 강조합니다. '독자님'이 이해하기 쉽도록, 지루해하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흥미롭게 쓰라는 거죠. 그래도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의 주인은 자신이지, 글을 읽을 독자가 아닙니다. 독자는 내가 쓴 글로 초대한 손님일 뿐입니다. 물론 내가 펼친 글잔치에 손님이 많이 찾아오고, 내 글을 맛있게 읽고 피드백을 주면 기분은 좋겠죠.
인정받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을 버리자는 건 아닙니다.(누가 그럴 수 있을까요?)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내게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만 글을 쓸 때 먼저 '표현하고 싶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이것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평생 눈치 보면서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며 살아왔기 때문에 나보다는 남을 신경 쓰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습관을 바꾸려면 의도적으로 연습을 반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글을 쓸 때 나에게 집중합니다.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가?' 이 질문에 대해 그냥 떠오르는 대로 적습니다. 운이 좋을 때는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멈추지 않고 글이 흘러 넘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혼자만을 위한 글쓰기를 하다가 하나의 문장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 문장은 미처 몰랐지만 글을 쓰면서 발견한 배움이나 새로운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글의 메시지가 됩니다. 그 메시지를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어지면 그 때부터 독자를 위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들여다보다가 길어 올린 메시지를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고민하면서 써나갑니다. 그러면 독자를 위한 글을 쓰면서도 나 자신이 소외되지 않습니다. 나로부터 출발한 글이니까요.
지금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같이 나를 들여다보며 쓰고 싶은 글을 아무런 검열 없이 쓰다가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은 문장을 건졌습니다. 저처럼 남 신경 쓰느라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