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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로맑음 스튜디오 Jan 27. 2023

내가 디자인한 것 중에 가장 작은 것

프로젝트 복기하기

  나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면 복기를 꼭 한다. 얼마 정도의 비용을 받았고,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진행하였으며, 어떤 게 부족하고 만족스러웠는지를 적어둔다. 솔직히 모든 프로젝트가 썩 즐겁지는 않았기에 그걸 되짚어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요리의 시작이 장보기이고, 마무리는 설거지인 것처럼 내게 프로젝트의 시작은 계약이고, 마무리는 자전적인 복기이다.



  이 복기를 시작한 것은 존경하는 디자이너인 '하라 켄야'의 책 <포스터를 훔쳐라>를 읽고 나서였다. 이 책은 저자가 만든 프로젝트들이 어떻게 시작, 진행, 마무리되었는지를 다룬다. 단순히 시각디자인 관련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라벨, 가구, 전시 프로젝트도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의 첫 글의 주제가 '내가 디자인한 것 중에 가장 작은 것'이다. 가장 작은 걸 첫 글로 제시하니 페이지를 나아가면서 디자인에 대한 고찰이 점진적으로 커질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참고로 저자의 가장 작은 것은 '전차표'였다.



  내가 디자인한 것 중에 가장 작은 것은 '식권'이다. 2016년 말, 나는 국립공주병원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사무업무가 주 업무였으며 병원으로 온 소포를 전달하거나, 사무용품을 관리하거나, 문서를 작성하는 식이었다. 더불어 직원들의 '식권 배부'가 있었다. 병원의 인쇄기로 식권을 뽑아 한 장씩 잘라 인당 22개의 식권을 배부한다. 매월 하는 업무였기에 식권을 자를 때면 '드디어 한 달이 끝났구나. 소집해제까지 다시 한 발자국 다가갔구나!'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식권을 자르는 게 너무 귀찮아졌다. 이유인즉슨 인쇄기로 뽑는 식권은 A4용지 한 장당 20장의 식권을 뽑을 수 있었는데 나눠줘야 하는 양은 인당 22개였기 때문이다. 한 직원을 위해 A4용지로 40장의 식권을 뽑아 첫 장으로 식권 20개를 주고, 두 번째 장을 끝만 잘라 2개를 추가하여 줘야 했다. 이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심지어 직원을 나눠주고 남은 식권은 버려야 했기에 종이를 많이 버렸다. 모든 창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의 발견'이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A4 용지 한 장에 22개의 식권이 들어가도록 디자인을 수정하였다. 당시 직원들이 내 캘리그래피를 좋아해 주셨기 때문에 캘리그래피를 활용하였다. 그리고 내가 소집해제를 하더라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과제가 있었다. 모두가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툴을 다룰 수는 없었다. 게다가 국립병원이어서 '한컴오피스 한글'로 만들어야만 했다(디자이너라면 이 부분에서 경악할 것 같다). 자르기 귀찮다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발견한 문제였으나 많은 사람들이 만족해 주셨다. 이런 일들이 참 감사하다.


식권



  사회복무요원끼리 통용되는 말로 '이런 걸 할 줄 안다고 하면 나중에 더 시킨다'같은 얘기를 한다. 맞는 말이었다. 소집해제를 앞두고 국립공주병원의 20주년 슬로건의 캘리그래피를 맡았다. 이 글귀는 각종 현수막과 달력으로 쓰였다. 내가 디자인한 것 중에 가장 작은, 식권 덕분에 20주년 슬로건도 만들어보고 그 슬로건이 새겨진 달력, 포스터, 현수막도 만들어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더 시키는 것이 괴롭기보다 오히려 감사했다. 이런 걸 해볼 수 있다니.


20주년 슬로건이 새겨진 달력




  이와 같이, 어떤 식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이며, 무엇을 해결하기 위해 진행하였고, 어떻게 진행하였으며 어떻게 마무리되었으며 어떻게 생각하는지. 프로젝트에 대한 복기를 해보길 바란다. 다른 단어보다 '복기'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이유는 바둑, 체스용어인 '복기'의 이유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대국이 끝난 후, 해당 대국을 검토하기 위하여 순서대로 다시 두어보는 일. 모든 일에 그게 필요하다. 모든 장보기가 설거지로 끝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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