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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눗방울 Aug 10. 2021

출렁이는 날들

6. 난 우주 속에 부유하는 먼지 같은 존재야

회사를 그만두면서 약을 서서히 줄였다.

하루에 한 번 햇빛을 보며 30분 이상 산책을 했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 그림을 배우러 작은 공방에 갔다. 가끔은 카페에서 책을 읽었다.


이렇게 몇 줄로 뭉뚱그려 요약하니 평화로운 일상이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막상 나는 병원에 가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라고 했다. 어떤 날은 괜찮은 것 같다가도 어떤 날은 괜찮지 않았다.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또 상태가 안 좋아졌다. 무엇을 했을 때 좋아지고, 무엇을 했을 때 안 좋아지는지 그 어떤 인과관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이유 없이 좋아졌다가 이유 없이 나빠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우울증의 모든 발단이 '번아웃'과 '회사'라고만 생각하며 조금 쉬면 금방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제는 평화로운 휴식기만 즐기면 되는데, 나는 여전히 불안했고 여전히 우울했으며 여전히 잠을 못 자고 무기력했다. 어렵게 주어진 휴식기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회사에 다닐 땐 '회사 때문이야'라고 합리화라도 할 수 있었다. 회사를 그만둔 후엔 지나가는 사람들 중 아무나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대체 왜 때문에 나는 이렇게 우울해요?? 뭐 때문에요?'라고 따져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서서히 단약에 성공했을 때, '드디어..!'라는 생각에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찜찜했다. 내가 다 나은 거라면 우울하지 않아야 할 텐데, 나는 여전히 내일이 기대되지도, 내일을 살고 싶지도 않았다. 이때부터 어쩌면 이 병이 생각보다 오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걱정했던 것처럼, 단약 후 일주일 만에 증상이 더 나빠졌다. 본가에 있다 오면 상태가 더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서 혼자 내려간 게 화근이 됐다. 가족들과 있으면 더 마음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내가 예민하니 온갖 사소한 게 다 신경이 쓰이고 거슬렸다.


정신과를 다니고 아프다던 내가 막상 겉으로 보기엔 말짱해 보이자 부모님 모두 '어라? 아프다더니 생각보다 괜찮잖아? 역시 잠깐의 해프닝이었구먼'라고 생각하시는 눈치였다. 짐을 풀기가 무섭게 아빠가 다가와 나와 남편은 재테크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요즘 새로 나온 세금 우대 계좌는 개설을 했는지, 안 했다면 온라인으로 개설이 가능한데 지금 당장 휴대폰으로 해당 증권사 앱을 깔아볼 수는 있는지 등등을 물었고 엄마는 자꾸 '이 모든 게 지나갈 일이고 빨리 나을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라고 했다. 다 좋은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자꾸만 '이 모든 게 반드시 지나가야만 하는 일이다. 반드시 나아야 한다'는 소리로 들렸다. 자꾸 금방 나을 거라고 하니까 내가 이렇게 아픈 게 잘못된 일 같았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했지만 하루 만에도 상태가 아래로 내리꽂듯 나빠지는 게 느껴졌다. 서울로 도망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너무 서운해해서 또 차마 그러질 못했다.


결국 본가에서 하루를 더 버틴 나는, 다음 날 쓰러졌다. 정신도 체력도 바닥인 상태여서 더 이상 내 몸이 나를 지탱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던 거다. '어, 어지러운..ㄷ?' 하고 눈을 떠보니 쓰러져 있었다. 몸이 제멋대로 미끄러져서 턱을 찧는 바람에 턱에서 피가 철철 났다. 하필 그날이 공휴일이어서 근처에 문을 연 병원이 없었다. 응급실에 갔더니 턱을 꼬매야 한다고 했다. 이틀 밤을 꼴딱 새우고 턱은 찢어진 채로 만신창이가 돼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내리자마자 다니던 정신과를 가서 다시 항불안제와 항우울제를 받았다. 힘들게 단약을 한 게 무색하게 약 용량이 바로 최대치로 올라갔다.


그날 집에 와서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우울증이 단기간에 심각해지면서 새롭게 나타난 증상이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주인공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지금까지 느끼던 외로움은 땅을 파고 깊이 들어가는 두더지가 되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내 발아래 땅이 아예 무너져내리는 느낌이었다. 나 혼자 공중에 부유하고 있으니 어디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냥 줄줄 눈물이 났다.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는데 정신을 차려보면 울고 있았다.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을 온전히 나 혼자 겪어내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모두의 인생에는 친구도, 가족도, 남편도 대신 짊어져 줄 수 없는, 나 혼자 오롯이 소화하고 견뎌내야 하는 몫이 있다. 나 조차도 이해가 가지 않는 감정인데, 이걸 누가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내 몸도 정신도 이젠 다 깨어져 버렸는데, 스콜처럼 몰려오는 감정 앞에서 도망칠 곳이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쉬면 금방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내 상태는 더 안 좋아졌다. 몇 달에 걸쳐 열심히 단약을 했는데, 단약 1주일 만에 다시 약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됐다. 이제 나는 너무 예민해진 나머지 본가의 가족들조차 견딜 수 없게 됐다. 잠도, 행복도, 회사도 잃었는데 이젠 친구와 가족까지 잃어야 하는 걸까? 가족도 견디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을까? 온갖 생각과 감정과 자책이 뒤섞여 어디 발 붙일 곳이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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