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눗방울 Dec 27. 2021

가슴 뛰지 않는 일도 괜찮아

일과 나 사이의 건강한 거리 찾기

가슴 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첫 사회생활을 하러 들어갔던 회사는 직무나 문화가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곳이었다. 단지 안정성만을 보고 어떤 기대도 없이 입사했던 곳이므로 직장생활이 재밌을 리가 없었다. '회사 밖에서 행복을 찾겠다'던 나의 다짐은 회사를 다닐수록 무용해졌다. 하루 24시간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가 싫어지고 나니,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내가 싫어하는 것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


인터넷이나 책을 보면 다들 '가슴 뛰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일이 더 이상 일이 아닌 놀이가 된다'라고 했다. 일도 놀이가 될 수 있다니?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하루하루가 보람되고 짜릿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지긋지긋한 무기력증도, 흔히 말하는 노잼 시기도 사라지고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겠지?


딱 저런 마음으로 잘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가슴 뛰고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는 지금의 삶은 이전보다 행복하고 완전한가?


확실히 이전보다 짜릿한 삶이긴 하다. 업계 특성상 이제 나에겐 평생직장이나 정규직 같은 안정된 자리란 없고 평생 나 자신을 갈고닦아 실력으로 인정받아 '일한 만큼만 버는' 얄짤없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물론 안정적인 정규직으로 회사를 다닐 때에도 월급날마다 통장에 들어오는 쥐꼬리만 한 숫자를 보면서 '이게 다야?'라며 퍽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회사를 다니기만 하면 연봉이 꾸준히 올랐고 4대 보험이나 퇴직금 같은 부수적인 혜택들이 따라 들어왔다. 저런 안전장치가 당연해지지 않은 지금, 인생이 조금 더 불확실해지고 짜릿하며 재밌어진 것은 얻게 된 자유에 대한 비용이자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일 것이다.


또 하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번아웃'이다. 분명 책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면 일도 놀이가 된다'라고 했는데 어쩐지 나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니 일과 나를 동일시하게 되는 날이 늘어났고, 잘하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를 비난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전에는 일을 한 번쯤 잘 못해도, 실수를 해도 내 삶에 큰 타격을 주지 않았다. 직장에서의 자아와 내 진짜 자아가 어느 정도 분리가 되어 있어서 금방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된 지금, 내가 낸 결과물은 이제 나의 분신과도 같아져 버려서 직업인으로서의 자아가 흔들리면 삶 전체가 더 크게 휘청거린다. 자연스레 번아웃이 더 오기 쉬운 취약한 삶을 살게 되어버렸다.


요즘에 내가 가장 관심 있게 생각하는 주제는 '일과 나 사이의 거리두기'다. 번아웃 증후군을 크게 경험하고 난 후부터는 더 이상 일하는 게 이전만큼 가슴이 뛰지는 않는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가슴이 뛰었던 일에 더 이상 가슴 뛰지 않게 될 때'가 오히려 업무에서 더 좋은 성과를 내고 롱런하기 좋은 시기라는 걸 깨달았다. 일하는 게 설레고 가슴이 뛸 때는 오히려 업무 자체에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이 일을 망치면 어떡하지, 잘 해내야 할 텐데, 하는 걱정과 압박감이 크게 자리해서 오히려 방해가 됐다. 일에 별로 가슴 뛰지 않게 되자 정신적인 자원을 크게 쏟지 않고도 건조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물이 좋지 않아도 금방 털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일과 '나'의 관계는 연인 관계와도 많이 닮았다. 상대를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나 커져버려서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상황이 되면 우리는 이를 '휘둘린다'라고 표현한다. 그렇지만 상대를 알아가려는 성실한 노력을 멈추게 되면 그 관계는 삐그덕 대다 이내 침몰하고 말 것이다. 일에 휘둘리지도 않고, 일을 너무 멀리해서 권태감을 느끼지도 않으려면 애정을 가지고 그 애정을 성실히 표현하되 나 자신을 잃을 정도로 지나치지는 않는 중용의 미덕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슴 뛰지 않는 일도 괜찮다. 개인적으로는 일 년에 몇 번 정도만 일을 통해서 재미와 성취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일 때문에 좋은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라는 질문보다 중요한 건 '이 일이 죽도록 싫은 순간이 얼마나 자주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일이 죽을 만큼 싫다면, 일 때문에 하루하루 활력이 사라지는 걸 경험하고 있다면 인생의 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때다. 다만 무탈하게 살다가 '더 늦기 전에 가슴 뛰는 도전을 해봐야 한다'는 말에 괜히 불안하다면, '나는 누구와는 달리 매 순간 짜릿한 삶을 살고 있진 않은데?'라는 막연한 초조함이 종종 올라온다면, 가슴 뛰지 않는 냉철함으로 얻고 있는 이익은 없는지, 가슴이 터질 것 같던 첫사랑과의 연애는 어떻게 끝났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은 금세 부서지는 파도 같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