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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눗방울 Jun 09. 2022

30대엔 롤X스 차고 싶어 하잖아요?

한의사 선생님, 혹시 점쟁이신가요?

내 가까운 지인들은 모두 알고 있지만, 나는 에너지 레벨이 그리 높은 사람은 아니다. '건강은 하냐?'라고 물어보면 딱히 큰 병은 없으니 '그렇다'라고 하겠지만, 자주 빌빌대고 잔병치레를 한다. 오죽하면 심할 땐  남편이 '너는 최고의 컨디션으로 사는 날이 1년에 얼마 안 되는 것 같아'라고 했을 정도였다. 요즘엔 좀 덜해졌지만 일상의 부담을 조금씩 더하는 것들, 예를 들면 알레르기, 비염, 생리통, 편도염 이런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편이었다. 어쩌면 스스로의 몸과 정신을 달달 볶아대는 내 성질머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이대로는 안 되겠어' 하고는 강남의 유명한 한의원을 찾았다. 강남에서도 특히나 월세가 높기로 유명한 곳, 그곳에서 몇십 년 전 작은 한의원을 오픈했다는 원장님은 이젠 으리으리한 건물 한 층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경쟁이 치열한 강남 한복판에서 병원을 이 정도로 키운 사람이라면 진정한 실력자일 수도 있겠는데 싶었다.


역시 강남의 유명 한의원이라서 그런지 한의사 선생님을 보기 전에 이런저런 설문과 복잡한 검사를 진행했다. 빨가벗고 사진을 찍기도 하고, 이상한 장치를 손과 발 끝에 주렁주렁 매달고는 가만히 누워있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한참 울적하고 자신감이 떨어진 상태였으므로 이 한의원의 '명의'가 한약으로 허약한 나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개선시켜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마침내 모든 검사를 마치고 진료실로 들어갔는데,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한의사 선생님이 앉아있었다. 검사 결과를 설명해 주거나 내 맥을 짚어볼 거라고 예상했는데, 한의사 선생님은 오히려 가만히 나를 쳐다보더니 "직업이 뭐예요?"하고 물었다. 내가 직업을 말하자 "아, 그 직업군 사람들, 우리 한의원에 정~말 많이 와요" 하고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힘들죠?" 하고 다시 물었다. 내가 '엥?'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때부터 의사 선생님의 엄청난 언변이 시작됐다.


"이게 원래 타율이 나오는 직업은 힘든 거예요. 그 왜 이승엽 선수 있잖아요, 그 선수가 한참 잘 나갈 때 맨날 기사에도 나오고 뉴스에도 나왔는데 나는 그걸 보면서 '저 사람 참 힘들겠다' 했어요. 그 선수는 오는 공을 다 맞추고 싶을 텐데, 치는 공마다 홈런을 치고 싶을 텐데, 그게 안되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우리 의사들도 그래요. 치료가 잘 되고 낫는 환자들이 몇 명인가, 내 타율이 얼마나 되나, 이걸 자꾸 지켜보게 된다고. 그쪽 직업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힘든 거예요."


와우. 내 직업의 고충을 이토록 잘 이해해 주는 선생님이라니? 공감받은 기분이기도 했지만 힘든 직업이라는 걸 확인 사살받은 것 같기도 해서 왠지 시무룩해진 나는 다시 물었다. "선생님, 근데 저는 사실 이 길이 제 길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는데요. 요즘 자꾸만 의욕도 없고 쉽게 울적해지고 무기력해지는데 그럼 어떡해야 하죠?"


"일반 직장인들은요, 그냥 회사에 들어가면 일 열심히 하고, 승진하고 그러면 돼요. 내가 내 눈덩이를 어디로 굴려야 하는지는 다 정해져 있다고. 이제 그 눈덩이를 어떻게 키울까 이것만 고민하면 되는데 XX 씨는 그렇지가 않잖아요. 이제 막 커리어를 만들어야 해서 안 그래도 손에 쥔 눈덩이도 작은데 그걸 어디로 굴려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태 허허벌판에 혼자 서 있는 거야. 그러니까 힘들죠. 원래 삼십 대 초반이 그래요. 그냥 힘들 때라서 힘든 거야. 근데요, 누구나에게 자신만의 길은 다 있어요. 그 길이라는 게 결국 때가 되면 나에게 오는데 그냥 그때가 아직 오지 않은 것뿐이라고. 나도 대학 졸업하고 대학원에 갔다가 중퇴하고, 서른 훌쩍 넘은 나이에 한의사 공부를 다시 했는데 그때 남들은 다 늦었다고 했지만 지금도 버젓이 일 잘하고 있잖아요? 이게 다 때가 있어요. 기다리다 보면 XX 씨의 길이 보이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고."


그렇게 한참 명언을 이어가던 의사 선생님은 다시 나에게 물었다. "5년 전을 한 번 생각해봐요. 5년 전에는 이렇게 살고 있을 줄 알았어요?"


"아니요? 전혀 몰랐죠. 예상도 못했는데요."


"그러니까. 그렇게 당장 5년 후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앞으로 5년 후에는, 10년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사세요."


저 말을 듣는데 머릿속에서 뎅-하고 누가 종을 울린 것만 같았다. 잠시 멍해진 상태로 넋을 놓고 있다가, '여기가 한의원이 아니라 사주카페였던가?' 생각했다. 왠지 점쟁이랑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어서 나도 사주 카페에서나 늘어놓을 것 같은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선생님, 근데 말이죠. 제가 자랑이 아니라... 20대 때는 원하는 대로 다 됐단 말이죠? '어? 나 이거 해야지' 하고 딱 목표를 잡고 노력하면 결국엔 해내고 또 해내고 그랬는데요, 30대가 된 다음부터 운이 안 좋은지 모든 게 잘 안 돼요. 이전처럼 자신감도 없고, '해야지!' 해도 또 금방 의지가 꺾여버리고 좌절되고."


울상을 짓고 내 안 풀리는 30대에 대한 온갖 불만을 이야기하는데, 한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내 쪽으로 얼굴을 내밀면서 동그랗게 눈을 뜨고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또다시 명언을 쏟아냈다.


"그게요, 안 되는 게 아니에요. 20대 때는 뭐예요? 스와치 이런 거 사면 만족했다고. 근데 스와치는 몇 달 아르바이트해서 돈 좀 모으면 살 수 있어요. 근데 30대 때는 스와치로 만족이 되나요? 이젠 롤렉스 차고 싶다고. 근데 롤렉스는 몇 달 아르바이트해서 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게 안 되는 게 아니라 이미 이룰 걸 다 이뤄서, 어려운 것만 남아서 그런 거예요. 30 대부 터는요, 다르게 살아야 해요. 20대처럼 그렇게 짧게 짧게 이루려고 하면, 그거 못해요. 옛날엔 6개월 아르바이트해서 스와치 사고 그랬지만 이젠 5년, 10년 이렇게 보고 가야 한다고. 안 되는 게 아니라, 원래 30대에 이루려고 하는 건 시간이 더 필요한 거예요."


줄줄 자신의 인생사를 곁들여 이야기하던 한의사 선생님은 내가 진료실에 들어온 지 한 시간이 훌쩍 넘은 다음에야 드디어 침을 놔주겠다며 나를 병실 침대에 눕혔다. 숨 쉴 때 답답한 기분이 느껴진다고 하자, 머리랑 손 끝 발 끝에 콕 콕 침을 놨는데 신기하게도 바로 호흡이 편해졌다.


"그래요. 그렇게, 편하게 숨 쉬면서 살라고. 답답하게 쉬지 말고요"


결국 비싼 약값과 '이게 뭐지?' 하던 어리둥절함 때문에 약을 타 오진 않았지만, 요즘에도 가끔 동그랗게 나를 쳐다보던 한의사 선생님의 눈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게요, 안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시간이 좀 더 걸리는 거예요. 앞으로 5년 후, 10년 후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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