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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눗방울 Mar 25. 2022

어쩌면 실력보다 중요한 건

14. 만사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부담감과 책임감 사이


작년에 견적을 요청했던 클라이언트가 이번엔 정말로 업무를 맡기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때 견적을 어떻게 내야 하나 고민을 엄청나게 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연락이 올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당당하게 높은 견적을 부를 걸, 하고 잠깐 후회했다. 


클라이언트 측에서는 나한테 일을 맡기려고 작년에 내가 내어준 견적을 바탕으로 미리 올해 예산을 추가적으로 받아놨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데 설마 다른 데다 맡기겠어?' 싶어서 견적이나 납기 기한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조금 까다롭게 굴었더니, 담당자 쪽에서 이번에 잘 네고가 되면 매년 일을 맡기고 싶으니 잘 좀 부탁한다는 전화가 왔다. 


정기 클라이언트가 생긴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아직 구두 약속이긴 했지만, 정말 매년 이맘때쯤 이 정도 금액의 일을 나에게 맡겨주는 업체가 생긴다면, 커리어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조금 더 자유도가 올라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토록 궁금해하던 프리랜서를 선언하는 날이 조금은 앞당겨질 지도?  


나는 지금은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몸이라서, 사실 혼자 업무를 해서는 클라이언트의 납기일을 맞춰줄 수가 없다. 결국 일정이 되는 동료 한 명에게 물어서 같이 작업하거나, 심지어는 내가 받아온 일임에도 그 동료에게 일을 더 많이 맡기고 금액도 더 많이 주는 식으로 납기를 맞춰야 할 거다. 


그냥 회사 외적으로 일이 들어온 것뿐인데, 설렜다가 뿌듯했다가 '회사 일 하면서 정말 이 납기 맞춰줄 수 있나?' 했다가 '에이 그래도 지금 받으면 정기 클라이언트가 될 수 있는데,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해야지!' 했다가 '그냥 프리랜서를 할까?' 했다가 또 '지금 회사 나름 괜찮은데' 싶다가 '그래도 좀 더 관심 있는 분야로 이직하고 싶다'며 채용공고를 이리저리 또 스크롤한다.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서 어질어질하다. 이럴 때마다 정말 스스로가 '지랄 맞다'라고 생각한다.. 


계약을 잘 따놓고는 결국엔 또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부담감에 잠을 설쳤다. 새벽 네 시가 넘어서야 잠시 눈을 붙였다가 출근은 해야 하는데 도저히 몸이 일어나 지지가 않아서 부장님한테 '죄송한데 몸이 아파 재택을 하겠다'라고 보고했다. 이럴 때마다 받는 월급에 상관없이 현 회사의 자유롭고 수평적인 문화가 너무나도 감사하게 여겨지는데, 나는 결국 회사와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나가야 할 운명이고 정규직들은 상대적으로 나만큼 눈치를 보지 않고 회사를 다니지는 못한다.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전문직을 선택했는데, 진로를 바꾸는 과정에서 모든 걸 깔끔하게 계획해둬야 마음이 놓이는 내 고슴도치 같은 성격은 정작 염두에 두지 못했다. 당장 6개월 후에도 내가 뭘 하고 먹고 살 지 알 수가 없고 계획조차 할 수가 없어서 불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당장 클라이언트와의 계약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와 회사 다니면서, 운동도 하면서, 시험 준비도 하면서 이거까지 어떻게 하지?' 싶은 마음 첫 번째, '매주 병원에 가서 약을 타오고 상담치료를 하는 내가 일을 또 벌리는 게 좋은 일일까?'가 두 번째, 이런 개복치 같은 멘탈을 가진 와이프를 얻은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 세 번째.. 예전엔 스스로에게 훨씬 더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새는 왜 이렇게 부담감에 잡아먹혀버리는지 모르겠다. 더 이상은 이전의 내가 아닌 느낌.


'미래? 뭐 어떻게 되겠지'하고 잊을 수 있는 담대함이 있으면 좋겠다. 매번 계획을 세우고 플랜 B를 마련해 놓지 않아도, 그 헤매는 순간순간을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으면 좋겠다. 나를 조일 땐 조이더라도 풀 때는 풀어줄 수 있는 유연함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담대함과 여유로움과 유연함이 없는 지금의 나에게도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며 너그러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  


어쩌면 살아가는 데 실력보다 정말로 더 중요한 건, 나 스스로를 지속 가능하게 잘 다스리는 마음, 책임감은 가지되 부담감은 내려놓을 수 있는 담대하고 유연한 마음, 이런 부족한 나를 몰아세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스스로에게 여유롭고 너그러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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