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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눗방울 Dec 17. 2021

인생의 장마를 대하는 태도

12. 동화 같은 결말은 없을 거예요. 이곳은 현실이니까.

이상과 현실, 현실과 이상 


사실 이 매거진을 만들고 글을 쓰기 시작한 때부터 답정너처럼 생각해 둔 결론이 있었다. 겉으론 멀쩡해 보이는 나도 돌연 알쏭달쏭한 일들로 정신과를 찾고 울고불고 바닥에 뒹굴며 꼴사나운 두더 같이 살던 날이 있었지만, 먼지가 폴폴 날리던 그 암흑기가 결국엔 거름이 되어 어느 순간 뾰로롱- 하고 작은 행복의 싹이 돋았다고 말이다. 디즈니 만화영화 결말처럼 아름답고 진부하고 교훈적인 결론을 내리고 싶었고, 나 스스로 그런 결론의 주인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흔히들 비 온 뒤 땅이 굳을 거라고 하고, 의사 선생님도 '이 시기를 올바른 방향으로 견뎌내고 나면 인생의 첫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으로 기억될 거다'라고 했으니까.


근데 그건 이상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이따금씩 꼴사나운 두더로 변신하며, 여전히 가끔 약을 먹고, 아직 까지도 매일매일 나에 대해 새롭게 알아가고 발견해가고 있다. 흔히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나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있게 알아가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찬란하게 회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제 나에 대해 그만 알아가고 싶고, 그만 깊어지고 싶다. 자신에 대해 잘 몰라도 되니까 멍청하고 단순하게 별 문제 없이 일 년 열두 달을 보내고 싶다. 겉보기엔 나무랄 데 없이 평온한 내 인생에서 요새 가장 큰 사고뭉치는 나 자신이고, 가끔씩 난데없이 요란 법석을 떠는 '나'라는 녀석을 수습하는 상시 대기 문제 처리반이 되어버렸다.


한 순간에 불안도가 솟구쳐서 며칠간 또 잠을 못 자겠다고 엉엉 울고, 다시 병원을 찾아가고, 나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가 잃었다가, 약을 먹었다가 바꿨다가, 명상을 했다가 말았다가, 이런 난리법석 통에서도 직장에 적응을 했고, 틈틈이 공부를 해서 시험을 봤고, 이사를 가려고 주말마다 부동산에 전화를 돌리고 임장을 갔고, 새롭게 운동을 시작했다. 전 글에서는 너무 열심히 살지 말자고, 비움의 미학을 가지고 살자고 아는 체하며 말했는데 그것 또한 불안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에게는 이상이었다.


한 동안은 몸과 정신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상황이 너무나도 속상했는데, 오늘은 다행히 나의 '불안'이라는 주머니가 조금 더 작아 보인다. 그래서 감히 현실적으로 말해보건대, 비 온 뒤 만화처럼 뾰로롱 날이 개고 무지개가 뜨며 철벅거리던 땅이 아름답게 단단해지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스콜처럼 퍼붓던 비가 이슬비가 되었다가 다시 장맛비가 되었다가 잦아들기도 하고, 땅이 단단해지는가 싶더니 물웅덩이가 생기기도 하고, 그 진흙탕에서 한바탕 굴러서 옷을 다 버리고 신발에서 찰박찰박 흙탕물이 삐져나오기도 하는 그렇게 전혀 아름답지 않은 방식으로 안정은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 실컷 울고 웃고 울면서 웃고 웃으면서 울 준비를 해두자. 그치지 않는 비를 맞으며 이리저리 울고 웃고 이리저리 춤을 추다 보면 언젠간 비오는 날을 조금 더 즐기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 인생의 BGM은 무엇인가요?


올여름쯤에 즐겨 보던 유튜브 명상 채널에서 '여러분 인생의 BGM은 무엇인가요?'라는 물음이 나왔는데, 가만 생각해보다가 내 BGM은 '불안'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브런치에도 불안에 대한 글을 그렇게 많이 썼었고, 내 인생의 BGM이 불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내가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약간의 불안장애를 가지고 살아왔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얼마 전에 도무지 몸과 정신이 이완이 되지 않아서 근 5개월 만에 처음으로 항불안제를 먹고 잠이 든 날이 있었는데, 다음 날 개운해진 정신을 보면서 확실히 느꼈다. 나는 평생을 잔잔한 불안을 느끼며 살아왔던 거구나. 그래서 이게 이상한지도 몰랐던 걸 수도 있겠구나.


직장생활 1년 차를 갓 넘긴 시점부터 불면증이 처음으로 오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는 계속 몸이 아팠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게 몸 이곳저곳이 다 아파서 1년 365일 중에 거진 200일 넘게 병원을 다니며 약을 먹었던 시절이 있었다. 매일 아픈 데가 없어도 피곤했고, 편도염에 감기를 달고 살았고, 생리통이 지나치게 심해졌으며, 역류성 식도염에 걸렸고, 갑상선 호르몬에도 문제가 생기고, 갑자기 신경치료를 하고 재신경 치료까지 했다. 어릴 때도 왜 그렇게 항상 마음이 안절부절못했는지, 엄마가 없으면 눈물이 났는지, 모든 퍼즐이 맞추어진다.


다만 지금까지 30년을 큰 불편 없이 살아왔던 건, 불안이 만성화되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또 살만했으니까 그랬을 거다. 약한 만성 불안증을 쭈욱 가지고 살아오다가 올해 초 갑자기 그릇이 넘쳐버린 이후로 나의 불안은 아슬아슬하게 찰랑찰랑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불안이 넘쳐버리는 순간, 내 속의 나는 또다시 한 마리의 두더지가 되어 난동을 피워버리게 된다.


30년 넘게 들어왔던 '불안'이란 BGM이 지겨워졌다. 이젠 조금 더 산뜻하거나 경쾌하거나 잔잔한 BGM으로 바꾸고 싶다. 인생의 BGM도 어플에서 음악 차트 목록처럼 쉽게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싸이월드 배경음악처럼 원하는 음원을 도토리로 사서 걸어둘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얼마 전에 읽었던 글로 마무리하고 싶다. 나를 이토록 무너뜨린 것도 나 자신이었으므로, 나를 세울 힘도 나 자신에게 있다고. 내가 내 손으로 무너뜨리고 다시 세워 올린 새로운 '나'가 조금 덜 불안하고 더 평온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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