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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눗방울 Jun 08. 2022

행복은 금세 부서지는 파도 같아서

불행은 돌멩이처럼 흔한 것, 행복은 파도처럼 손끝에 잡히지 않는 것

나의 출근길은 버스에 올라타는 것으로 시작된다.

버스로 대여섯 정거장을 지나 근처 역에 내려 지하철 환승, 이후 한 번 더 버스 환승. 어떤 사람들은 출퇴근 시간을 아껴가며 책을 읽고 넷플릭스를 본다던데, 나로선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내 등 뒤로 뒷사람의 꿀렁거리는 배가 느껴지고, 앞사람의 뒤통수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을 눈앞 10cm 거리에서 직관하고 있노라면 주먹을 불끈 쥐고 '오늘은 꼭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가야지!' 하던 아침의 다짐은 바람에 날리는 잿가루처럼 파스스 흩어져버렸다. 여유는 개뿔.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하건대 이 험난한 출근길에 행복을 느꼈던 적은 결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요즘엔 재택근무를 속속 폐지하는 회사들이 많아진 탓에 출퇴근길 혼잡함이 말이 아니다. 오늘도 버스에 올라타는데 "저기요~~ 저 뒤로 쭈욱! 쭉! 들어가세요! 뒷문까지 쭈욱~ 들어가세요오!" 하고 버스 기사님이 소리를 질렀다. 버스에 타고 있는 승객은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뒷문으로 이동했다. 버스 기사님은 사람들이 생각만큼 일사불란하게 뒤쪽으로 이동하지 않는 게 불만이었던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급기야는 승객들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이 정류장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버스 승객이 평소보다 많긴 했지만, 숨이 턱턱 막히는 수준까진 아니었기 때문에 버스 기사님의 오버(?)에 다들 조금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후에도 매 정거정에 정차할 때마다, 또 그 대여섯 정거장을 가는 내내 버스 기사님은 쩌렁쩌렁한 혼잣말로 불만과 짜증과 화를 승객들에게 쏟아냈다.


한 두 정거장까지는 버스 기사님도 아침 일찍부터 힘드시려니 하고 이해했는데, 아침부터 짜증 섞인 고성을, 그것도 나중에는 반말로 20분 이상 듣다 보니 내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 이어폰을 끼고 음악 볼륨을 높여버렸다. 듣기 싫은 소음을 애써 발랄한 음악으로 가렸지만,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환승하고, 거의 회사에 도착할 무렵까지도 버스 기사님의 짜증 섞인 고함이 머릿속을 맴돌며 마음의 화를 부추겼다.


지하철에서 삐쭉빼쭉한 마음으로 툴툴거리고 있던 차에 캄캄하고 답답한 지하철이 햇빛이 찬란한 바깥으로 나와 마침내 한강을 건너가는 구간, 지하철 기사님의 안내방송이 울려 퍼졌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 열차는 이제 강남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지금 열차가 많이 혼잡합니다. 다들 힘드시겠지만 다음 정거장부터 내리실 승객 분들을 위해서 다들 조금씩만 서로를 배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리 열차는 승객 분들의 시원한 출근길을 위해서 현재 송풍을 최대로 가동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일찍부터 출근하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 작은 행운이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사님 말대로 지하철 송풍을 최대로 가동한 탓인지 정말로 열차 내 공기는 평소보다 산뜻했고, 창밖으로 넘실대는 한강에 초여름 햇빛이 물결 지어 반짝이고 있었다. 열차 내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지는 동안 휴대폰만 보던 승객들이 다들 창 밖 풍경을 내다보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내 안에서 불쑥 솟아났던 미운 마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갓 돋아난 새싹만큼이나 기분도 파릇파릇해졌다.


다음 역에서 내려 승객이 가득 들어찬 기다란 열차가 덜컹덜컹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저 기사님은 오늘의 짧은 방송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행복을 선물한 것일까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교통 기사는 꽤 멋진 직업이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하루를 베풀 수 있는 직업은 세상에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불행은 발부리에 탁탁 차이는 작은 돌멩이처럼 흔한 것, 행복은 금세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는 파도처럼 잡기 힘든 것. 도로롱 굴러와 끊임없이 발끝을 울리는 작은 불행들에 나는 쉽게 기분이 상했고 슬퍼했으며 허무해했다. 책에선 행복은 세 잎 클로버처럼 어디에나 있다고 하던데 어찌 된 일인지 나에게는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햇살처럼, 하얀 거품으로 무너지는 파도처럼 와닿지가 않았다. 행복도 부리에 턱턱 걸렸으면 좋겠는데, 어디에나 있다던 행복은 어디에도 없어 보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햇살과 파도는 언제나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발에 차이는 돌멩이들은 다시 도로로 굴러가도록 두면 그만인 것.


지하철을 나서며 오늘의 작은 행복을 선물해 준 지하철 기사님처럼, 발끝의 돌멩이보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바다를 말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이란 모두에게 우둘투둘한 길. 그 길을 걸으면서도 아른아른 이는 햇빛, 반짝이는 나뭇잎, 풀꽃 향 섞인 시원한 바람을 붙잡아 노래할 수 있는 사람. 폭풍우 치는 캄캄한 밤에도 반짝이는 위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쓸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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