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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논리’는 어떻게 익힐 수 있는가?

‘몸의 논리’는 어떻게 익힐 수 있는가?

우리네 삶에서 정작 중요한 지성은 ‘정신의 지성’이 아니라 ‘몸의 지성’이에요. 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 지성적인 인간이 된다는 ‘정신의 논리’가 아니라 ‘몸의 논리’를 익혀나간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몸의 지성을 가능하게 할 몸의 논리는 어떻게 익힐 수 있을까요?


몸의 논리는 생략을 인정하지 않는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정신의 지성’과 ‘몸의 지성’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생략 여부일 겁니다. 복싱을 책으로 배우면 일주일이면 다 끝나요. 그런데 체육관에서 배우면 10년이 걸려도 다 못 배울 수도 있어요. 이는 당연한 일이죠. ‘정신의 논리’는 생략이 가능하지만, “몸의 논리는 생략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죠. 어쩌면 바로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몸의 지성’보다 ‘정신의 지성’에 목을 매며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정신의 지성’은 생략이 가능하니까 편하잖아요. 하지만 ‘몸의 지성’은 얄짤없죠. 하나도 생략이 안 돼요. 하나씩 하나씩 다 온몸으로 익히며 배울 수밖에 없잖아요. 이는 얼마나 고되고 불편한 일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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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은 이를 언어의 ‘이해’와 ‘발화’(말하는 것)의 차이로 설명해요. 언어를 ‘이해’하는 것과 ‘발화’(말하는 것) 사이에는 유사성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어요.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을 생각해 봐요. 이 문장을 ‘이해’해야 그것을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문장의 ‘이해’와 ‘발화’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어요. 언어의 ‘이해’는 ‘정신의 지성’이지만, 언어의 ‘발화’는 ‘몸(성대)의 지성’이잖아요. 즉, 말하는 건 목 근육의 떨림 문제인 거죠.


외국에 오래 머물러서 그 언어를 잘 알아듣고 또 그만큼 잘 표현하는 이들이 있죠. 그런데 외국어를 잘 알아듣기지만(이해), 알아듣는 것만큼 말하지(발화) 못하는 이들도 있어요. 이 두 부류의 차이는 뭘까요? ‘몸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 혹은 ‘정신을 더 많이 쓰느냐? 몸을 더 많이 쓰느냐?’의 차이인 거죠. 비슷한 기간을 외국에 머물지만, 그 나라를 온몸으로 경험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서 그 언어의 ‘이해’와 ‘발화’ 사이에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 거죠.


외국어를 가장 빨리 배우는 방법이 그 언어를 쓰는 사람과 연애하는 거라고 하잖아요. 연애가 뭔가요? 몸을 쓰는 거잖아요. 몸을 쓰면서 언어를 배우면 알아듣는 만큼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언어를 책으로 배우거나 영상으로 배우면 어떨까요? 열심히 배우면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되겠지만, 알아들은 것만큼 표현(말)할 수는 없어요. ‘정신의 논리’는 생략이 가능하지만, “몸의 논리는 생략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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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논리’는 삶에 색채와 생명을 준다.


여기서(몸의 논리)는 어떠한 세부도 무시하지 않는 완전한 분석과 아무것도 축약하지 않는 현실적 종합이 필요하게 된다. 상상적 도식은 이제 막 나타나기 시작하는 몇몇 근육들로 구성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단지 소묘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리고 완전히 체험된 근육 감각은 그것에다 색채와 생명을 준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몸의 논리’에는 “어떠한 세부도 무시하지 않는 완전한 분석과 아무것도 축약하지 않는 현실적 종합”이 필요해요. 물론 상상적으로 무엇인가를 생각(상상적 도식)할 때도 일부 근육이 발생하기는 하겠죠. 하지만 이는 소묘에 불과하죠. 즉 움직이는 대상을 아주 빠르게 포착해서 거칠게 그리는 그림에 불과한 거죠. 그 소묘에는 무엇인가 빠져 있죠. 그것이 뭔가요? 바로 색채와 생명이죠.


장미꽃을 그린다고 해봐요. 그 꽂을 소묘로 그린 그림과 “어떤 세부도 무시하지 않고 아무것도 축약하지 않고” 그리고 거기에 색채까지 더해진 그림은 완전히 다른 그림이죠. 전자는 그저 생명이 없는 그림이고, 후자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명을 더해진 그림이잖아요. 우리네 삶도 이와 똑같아요.


언어와 운동, 더 나아가 삶에서 어느 하나 생략하지 않는 ‘몸의 논리’를 익히면, “완전히 체험된 근육 감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어떠한 분야이든, “어떠한 세부도 무시하지 않고 완전한 분석과 아무것도 축약하지 않은 현실적 종합”이 가능하게 되죠. 이는 그 분야를 아름다운 색을 칠할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이는 그 분야에 생명을 불어넣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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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어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발화’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그가 그릴 수 있는 불어는 소묘에 지나지 않을 거예요. 그는 자신의 불어에 색을 입혀서 생명(문학성) 부여할 수는 없겠죠. 복싱 평론가가 있다고 해봐요. 그는 복싱을 잘 ‘이해’할 수 있겠지만, ‘발화’(스파링)할 수는 없겠죠. 그가 그릴 수 있는 복싱은 소묘에 지나지 않을 거예요. 그는 결코 복싱에 색을 입혀 생명을 부여할 수는 없을 겁니다.


사랑을 책으로 배운 사람을 생각해 봐요. 사랑을 ‘이해’할 수 있지만, ‘발화’(연애)할 순 없겠죠. 그는 결코 사랑에 색을 입혀서 생명을 부여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잘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삶에 아름다운 색채를 입혀서 생명을 부여하는 일 아닐까요? 그러니 우리는 조금 더디더라도, 조금 고되더라도, 어느 것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몸의 논리’를 충실히 익혀나가야 합니다.


‘정신의 논리’ 넘어 ‘몸의 논리’에 이를 때 우리네 삶은 다채로운 색을 가진 생동감 넘치는 삶이 될 겁니다. ‘몸의 논리’를 익혀 ‘이해’를 넘어 자유롭게 ‘발화’할 수 있게 될 때, 자신의 ‘불어’에 색을 입혀서 생명을 부여한 ‘문학’적인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우리네 삶에 색을 입혀서 생명을 부여할 때 저마다의 ‘예술’적인 삶에 이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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