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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의 세계, '무분별'의 세계

시각과 청각은 모두 ‘운동적 도식’으로 작동한다.


이제 ‘순수 기억’에 대해 살펴봅시다. 이는 베르그손의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이에요. ‘순수 기억’은 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겪어온 개인적 체험 전체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기억이에요. 즉, 감각 기관(시각·청각·촉각·후각·미각)을 통해 경험한 체험 전체로서의 기억이에요. 이 ‘순수 기억’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기억, 즉 ‘중학교 6학년 여름 방학에 아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학을 갔다’는 식의 기억과는 달라요.


세상 사람들의 흔한 오해 중 하나가 시각과 청각을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거예요. 즉, 청각적 ‘식별’과 시각적 ‘식별’이 전혀 다른 내적 메커니즘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불어를 몰라도, 누군가 불어로 말하면 그 소리가 분명하게 들리잖아요. 청각적 장애가 없다면, 정확한 음파로 내 귀에 들어오잖아요. 하지만 그건 무의미한 뭉텅이 지각이잖아요. 그 소리가 언제 의미를 가진 분절된 형태로 지각돼요? ‘운동적 도식’이 갖춰져야 하죠. 즉, 불어를 계속 반복해서 들어야 무의미한 뭉텅이 지각이 유의미한 언어로 들리잖아요.


이러한 청각적 ‘식별’ 메커니즘은 시각에도 그대로 적용돼요. 즉, 시력에 문제가 없다고 해서 시각적 ‘식별’이 가능한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지금 우리는 세상의 여러 대상을 구분해서 선명하게 볼 수 있죠? ‘이건 컵이고, 이건 식탁이고, 이건 그릇이지.’라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이런 ‘식별’ 능력은 태어나자마자 갖게 된 게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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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가 보는 세계와 성인이 보는 세계는 다르다.


한 아이가 2.0의 시력을 갖고 태어났어요. 그 아이는 지금 우리가 보는 세계와 같은 세계를 볼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 아이는 세계를 명료하게 구분해서 선명하게 볼 수 없어요. 시각적 ‘식별’을 한다는 건 시력과 절대적 상관관계를 갖지 않아요. 즉, 그 아이는 대상을 물리적(시력)으로 정확하게는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대상을 명료하게 구분해서 ‘식별’할 수 없어요.


왜 그럴까요? ‘운동적 도식’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대상과 대상을 구분(분절)해서 볼 수 없기 때문이에요 아이가 보는 세계는, 대상과 대상 사이의 경계가 명료하지 않아 흐릿하기 보이는 이미지와 비슷할 거예요. 마치 ‘모네’의 <인상, 해돋이>나 ‘로스코’의 그림들처럼 말이죠. 이는 청력에 문제가 없어서 불어가 분명히 소리로는 들리지만, 단어와 단어를 구분(분절)할 수 없어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에요. 실제로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이 수술을 통해 시력을 회복하게 되더라도, 곧장 시각적 비장애인이 보는 것과 같은 것을 보지는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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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시각적 ‘식별’이 가능한 이유는 훈련(운동)됐기 때문이에요. ‘운동적 도식’을 반복하는 연습을 했기 때문이에요. 유아에게 단순 형태 그림을 보여주고, 유치원에서도 도형 구분하는 놀이 같은 거 하잖아요. 빨간색끼리, 네모 모양끼리, 동그라미 모양끼리, 별 모양끼리 모으는 놀이 하잖아요. 그게 바로 시각적 ‘운동적 도식’을 연습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 ‘운동적 도식’이 갖춰졌기 때문에 시각적 ‘식별’이 가능한 거예요.


라섹 수술을 한다고 세상을 구분해서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는 청력을 강화하는 수술을 하면 불어를 알아듣게 된다는 말처럼 황당한 거예요. 시각과 청각만 그런 게 아니죠. 촉각, 후각, 미각 또한 마찬가지예요. 각 감각 기관은 모두 ‘운동적 도식’을 통해서 세계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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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기억’과 ‘상 기억’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기억에는 두 종류의 기억이 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게 되죠. 우리는 경험한 것들을 기억하잖아요. 그런데 이 경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잖아요. 모호하고 흐릿한 ‘지각’의 경험과 분명하고 선명한 ‘식별’의 경험. 전자는 ‘운동적 도식’이 갖춰지기 전(유아)의 경험이고, 후자는 ‘운동적 도식’이 갖춰진 후(성인)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니 우리의 기억 역시 두 종류가 있겠죠.


흐릿하고 모호한 ‘지각’으로 경험된 기억 그리고 분명하고 선명한 ‘식별’로 경험한 기억이 있겠죠. 여기서 전자를 ‘순수 기억’, 후자를 ‘상 기억’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즉 ‘순수 기억’은 ‘운동적 도식’이 갖춰지기 전에 ‘지각’된 기억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는 ‘무의식’처럼 모호하고 흐릿한 상태로 저장된 기억이죠. 반면 ‘상 기억’은 ‘운동적 도식’이 갖춰진 후 ‘식별’된 기억 의미해요. 이는 ‘의식’처럼 분명하고 선명한 상태로 저장된 기억이에요.


그렇다면 ‘순수 기억’은 유아 시절(‘운동적 도식’이 갖춰지기 전)에만 해당하는 기억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는 ‘순수 기억’의 정의(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겪어온 개인적 체험 전체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기억)에 부합하지 않잖아요. ‘순수 기억’에는 성인이 되고 난 이후의 기억도 포함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걸까요? 성인은 이미 ‘운동적 도식’이 갖춰져서 세계를 선명하고 분명하게 ‘식별’할 수 있잖아요. 성인은 그러한 ‘식별’이 가능한 채로 어떤 대상(사건)을 기억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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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의 세계, 분별의 세계


유아가 본 세계를 ‘무분별(흐릿·모호)’의 세계, 성인이 본 세계를 ‘분별(분명·선명)’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 두 세계 중 어떤 세계가 진짜 세계일까요? 아마 ‘분별’(분명·선명)의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무분별’(흐릿·모호)의 세계가 거짓 세계라고 생각할 겁니다. 유아는 세계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성인이 세계를 제대로 본다고 여기잖아요. 하지만 놀랍게도 사실은 그 반대에요. ‘무분별’의 세계가 진짜 세계에 가깝고, ‘분별’의 세계가 거짓 세계에 가까울 겁니다.


무지개를 생각해 볼까요? 있는 그대로의 무지개는 어떤 색깔일까요? 7가지 색깔(빨주노초파남보)로 ‘분별(분절)’된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실제 무지개는 그렇게 정확히 ‘분별(분절)’되지 않죠. 흐릿하고 모호한 색들이 이어져 있는 ‘무분별’한 것이잖아요. 있는 그대로의 세계도 마찬가지예요.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어떤 ‘분별(분절)’도 없이 이어져 있는 ‘무분별’의 세계죠. 우리는 이런 ‘무분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흐릿하고 모호한 ‘무분별’의 세계는 인간의 생존과 편의에 불리하죠. 모든 것이 흐릿하고 모호하다면, 삶은 너무 불편하고 심지어 생존마저 위협받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인간은 생존과 편의를 위해 ‘무분별’의 세계를 ‘분별’의 세계로 변형하여 ‘지각’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을 뿐이죠. 쉽게 말해, 우리는 모두 ‘안경(운동적 도식)’을 쓰고 있는 셈인 거죠. ‘무분별’의 세계를 ‘분별’의 세계로 볼 수 있는 ‘안경’ 말이에요.


유아 시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도 ‘순수 기억’은 누적됩니다. ‘안경(운동적 도식)’을 쓰고 세계를 본다고 해서 ‘분별’의 세계만을 보는 것이 아니죠. 그 ‘분별’의 세계는 이미 ‘무분별’의 세계의 변형이니까요. 즉, 성인이 된 후에 세계를 분명하고 선명하게 보고 그것을 기억할 때, 그 기억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이미 흐릿하고 모호한 세계 역시 기억되고 있는 거죠.


불어의 ‘의미’(분별)를 알아듣고 그것을 기억할 때, (우리가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불어의 ‘소리’(무분별) 역시 기억되고 있을 테니까요. 분명 익숙한 단어인데, 어느 날 생경하게 들릴 때가 있지 않나요? 이는 단어의 ‘의미(분별)’뿐만 아니라 그 단어의 ‘소리(무분별)’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순수 기억’(무의식)에서 저장된 그 ‘소리’의 기억이 불현듯 의식화될 때 생경하게 들리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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