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순수 기억→상 기억’ 과정이다.
이제 ‘순수 기억’과 ‘상 기억’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순수 기억’은 좀 뿌연 상태예요. 무의식 같은 거예요. 찾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뿌연 상태예요. 우리가 어떤 대상(사건)을 만났을 때, 어떤 기억이 흐릿하고 모호한 상태에 있다가 분명하고 선명한 상태로 기억될 때가 있잖아요.
예를 들면, 초등학교 친구를 우연히 만났는데 이름이 기억이 안 날 때가 있잖아요. ‘미달? 미순? 미선? 미자?…’ 그러다 어느 순간, ‘미경이다!’하고 선명하고 분명한 기억이 떠오르게 되잖아요. 이때 ‘미달·미순·미선·미자…’는 다 ‘순수 기억’ 상태인 거고, ‘미경’이 ‘상 기억’인 거예요.
이처럼, 모든 기억(상기想起)은 ‘순수 기억’에서 ‘상 기억’으로 가는 과정이에요. 무엇인가를 기억하는 과정은 모두 흐릿하고 모호한 ‘순수 기억’의 상태에서 분명하고 선명한 ‘상 기억’의 상태로 옮겨 오는 과정인 거죠. 그렇다면, ‘순수 기억→상 기억’ 과정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 미치게 될까요?
‘순수 기억’이 ‘상 기억’화 될수록 더 많은 것을 ‘지각’하게 된다.
순수 기억들은 기억의 심층부로부터 소환되어 운동적 도식 속으로 점점 더 잘 삽입될 수 있는 상 기억들로 발전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기억의 심층부에 있던 ‘순수 기억’이 ‘상 기억’으로 소환되면 ‘운동적 도식’에 더 잘 삽입될 수 있게 돼요. 이는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순수 기억’(미달·미순·미선·미자…)에서 ‘상 기억’(미경)이 도출되면 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미경’와 관련된 흐릿한 추억(기억)들이 연이어 떠오르겠죠. 이는 ‘순수 기억’이 ‘상 기억’으로 발전되어 “운동적 도식 속으로 점점 더 잘 삽입”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내적 변화들이죠. ‘운동적 도식’은 무의미한(흐릿·모호) 뭉텅이 ‘지각’을 유의미한(분명·선명) ‘식별’로 바꾸는 장치니까요. 그런 다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이 상 기억들은 더 완전하고 더 구체적이고 더 의식적인 표상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에 따라 지각의 틀을 채용하며, 자신들을 끌어당기는 지각과 그만큼 더 섞이는 경향이 있다.『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순수 기억(미달·미순·미선·미자…)→상 기억(미경)’이 되면, ‘운동적 도식’의 활성화가 가속됩니다. 이를 통해 “상 기억들은 더 완전하고 더 구체적인 표상 형태”를 취하게 되죠. ‘미경’의 집, ‘미경’의 남자 친구, ‘미경’과 함께 읽었던 소설 같은 구체적인 기억이 떠오르게 되는 게 이러한 경우죠. 이때 우리에게는 어떤 “지각의 틀”이 채택됩니다. 즉, 어떤 대상은 받아들이고 어떤 대상은 받아들이지 않는 “지각의 틀”이 생기는 거죠. 이는 ‘미경’ 때문에 떠오른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직장)와 관련된 대상은 지각되지 않고, 옛 추억과 관련된 대상들이 더 많이 지각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죠.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지각의 틀’로 인해 “자신을 끌어당기는 지각과 그만큼 더 섞이는 경향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지각의 틀”(옛 추억)로 인해서 ‘직장’과 관련된 것(일·돈·승진…)이 아닌, 자신을 끌어들이는 ‘소설’에 관련된 것(글·책·감정·서점…)을 ‘지각’하게 될 수 있겠죠. 그리고 그 ‘지각’들이 기존의 기억(직장)들과 섞이게 될 겁니다. 그렇게 섞인 기억들은 다시 지금 ‘순수 기억’에 저장되겠죠. 이것이 ‘기억-지각’의 내적 작동 원리에요. 이는 아래와 같이 도식화할 수 있을 겁니다.
완전하게 지각한다는 것
이제 어떤 대상을 분명하게 파악한다는 것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 것인지 알 수 있어요.
완전한 지각이란 우리가 그것 앞으로 던지는 상 기억과의 융합에 의해서만 정의되고 구별된다. 주의는 그런 대가를 치른 것이며, 주의 없이는 기계적 반작용이 동반된 감각들의 수동적 병치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 상 기억 자체는 순수 기억 상태로 환원되면 무용한 상태로 머무를 것이다. 이 순수 기억은 잠재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끌어당기는 지각에 의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완전한 지각이란 어떤 대상(이름이 가물가물한 친구)이 주어졌을 때, “그것 앞으로 던지는 상 기억과 융합에 의해서만 정의되고 구별되는” 것이죠. ‘미달·미순·미선·미자…’→‘미경’으로 완전한 지각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생각해 봐요. 이는 그것(미달·미순·미선·미자…) 앞으로 던졌던 ‘상 기억’(‘미경’의 집, ‘미경’의 남자 친구, ‘미경’과 함께 읽었던 소설)과의 융합에 의해서 정의되고 구별되었잖아요.
그런데 이 과정은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과정이죠. 가물가물한 ‘기억’을 완전한 ‘지각’으로 정의하고 구별하려면 ‘주의’를 기울여 과거의 기억들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필요하잖아요. 만약 그런 ‘주의’가 없다면, (분명하고 선명한) ‘미경’은 떠오르지 않고, (흐릿하고 모호한) ‘미달·미순·미선·미자…’처럼 “기계적 반작용이 동반된 수동적 병치만”이 존재할 겁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미경’을 떠올리는 그 모든 과정은 다시 ‘순수 기억’ 상태로 되돌아가겠죠. 옛 친구를 만나 그의 이름과 함께 했던 추억을 완전하게 기억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매일 그 생각만 하고 살지는 않잖아요. 며칠이 지나면 ‘주의’를 기울여 떠올렸던 ‘상 기억’은 다시 ‘순수 기억’에 잠기게 되겠죠. 그렇게 “순수 기억의 상태로 환원되면 무용한 상태로 머물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이 ‘순수 기억’은 언제 유용한 상태 즉, ‘상 기억’화 될까요? “순수 기억은 잠재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끌어당기는 지각에 의해서만 현실화”될 수 있죠. 즉, ‘미경’과 관련된 기억들을 촉발할 수 있는 지각(동창회·학창 시절 사진과 소설)을 다시 만나게 될 때 그 모든 기억들은 다시 ‘상 기억’으로 분명하고 선명하게 떠오르게 될 겁니다. 이제 우리가 어떤 대상을 명확하게 ‘식별’하게 되는 내적 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지각의 두 흐름
결국 구별되는 지각은 반대 방향의 두 흐름에 의해 일어난다. 하나는 구심적이어서 외부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심적이어서 우리가 ‘순수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 이 두 흐름이 결합하여 만나는 지점에서 그것들은 명확하게 식별된 지각이 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분명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반대 방향의 두 흐름”에서 일어나는 거죠. “하나는 구심적이어서 외부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죠. 즉, 이름이 가물가물한 한 사람(미달·미순·미선·미자…)이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 사람이 ‘미경’임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죠.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의 출발점이 어디인가요? ‘순수 기억’ 아닌가요? 그러니 분명하게 “구별되는 지각”에는 또 하나의 방향이 존재하는 거죠. 그것은 “원심적이어서 우리가 ‘순수 기억’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갖는” 방향인 거죠.
옛 친구만 그런 것이 아니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책(사람)이 있다고 해봐요. 우리는 어떻게 그 책(사람)을 완전하게 지각(파악)할 수 있을까요? 이 역시 구심성(상 기억→외부 대상)과 원심성(외부 대상→순수 기억), 방향이 반대인 이 두 흐름에 의해서 가능할 겁니다. 그 책(사람)을 이해하려면, 이해가 안 되더라도 일단 그 내용을 일단 읽어나가야겠죠. 하지만 이 구심적 방향의 운동만으로는 그 책(사람)을 이해하기 어렵겠죠. 그 책은 지금 자신의 ‘상 기억’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까요.
그 책(사람)을 완전하게 파악하려면 또 하나의 흐름, 원심적 방향의 흐름이 필요합니다. 이는 책(사람)으로부터 ‘순수 기억’으로 향하는 흐름이죠. 즉, ‘주의’를 기울여 외부 대상으로부터 ‘순수 기억’으로 돌아가는 과정이죠. 그 책(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순수 기억’에 끊임없이 문의하는 과정인 거죠. 구심적 흐름과 원심적 흐름, “이 두 흐름이 결합하여 만나는 지점에서” 그 책(사람)에 대한 “명확하게 식별된 지각”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