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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틈’이다.

삶의 전환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순수 기억(1)→상 기억→운동적 도식→지각의 틀→새로운 지각→기억 섞임→순수 기억(2)…


우리네 삶이 흘러가는 양상은 이렇게 도식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도식을 ‘순수 기억 도식’이라고 합시다.(이는 베르그손의 용어가 아닙니다.) 이 ‘순수 기억 도식’은 단순히 ‘기억’과 ‘지각’에 관한 삶의 양상만을 드러내는 게 아니에요. 이는 우리의 잠재적 가능성 혹은 삶의 전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해요. 위 도식을 순차적으로 되짚어 봅시다.


평범한 직장인 H가 있어요. 어느 날, H의 ‘순수 기억(1)’ 중 어떤 것이 ‘상 기억’화 되겠죠. 그것을 “아버지랑 복싱 놀이했을 때 행복했는데”라는 기억이라고 해 봅시다. 이 떠오른 ‘상 기억’은 ‘운동적 도식’을 활성화하겠죠. 즉, ‘복싱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죠. 이는 (복싱과 관련된) ‘지각의 틀’을 채택하여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지각’(복싱 체육관·글러브·헤드기어…)을 받아들이게 되겠죠.


그렇게 받아들여진 ‘새로운 지각’은 기존의 지각(직장)과 섞이게 되어 직장을 다니면서 복싱을 배우는 시간을 보내게 되겠죠. 그리고 이 과정은 다시 ‘순수 기억(2)’의 형태로 저장이 될 겁니다. 그 ‘순수 기억(2)’이 다시 ‘상 기억’화 되고 위 과정이 다시 반복되면서 ‘순수 기억(3·4·5·6…)’로 이어져 나가겠죠. 그 전체 과정의 반복을 통해 H의 다음 삶(복서)이 열리게 되겠죠. 이 과정에 대해 베르그손은 다음과 같이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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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열릴 때, 감각이 열린다.


순수 기억이 현재화됨에 따라 몸에 대응하는 모든 감각을 일으키려는 경향을 가진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순수 기억이 현재화”된다는 것은 ‘상 기억’화 된다는 의미에요. 이렇게 ‘상 기억’화가 이뤄지면 “몸에 대응하는 모든 감각을 일으키려는 경향을 가지게” 되죠. 이는 ‘순수 기억’ 속에 잠겨 있던 ‘상 기억’(아버지랑 복싱 놀이했을 때 행복했는데)이 떠오르는 순간, ‘운동적 도식’(복싱하고 싶다)이 활성화되기 때문이에요. 이는 앞서 도식에서 ‘순수 기억(1)→상 기억→운동적 도식’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이렇게 몸의 감각이 활성화되면, (복싱과 관련된) ‘지각의 틀’이 채택되고, 새로운 지각(복싱 체육관·글러브·헤드기어…)을 받아들이게 되잖아요. 그렇게 새롭게 받아들인 ‘지각’은 기존 ‘기억’(직장)과 섞이면서(퇴근 후 복싱 체육관) 다시 ‘순수 기억’으로 저장되겠죠. H가 이 반복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면, 그는 늦은 나이에 프로 복서가 되거나 혹은 복싱 관련된 일을 업으로 삼게 될 수 있겠죠. 삶의 전환은 바로 이러한 과정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지게 돼요.


주변을 돌아보면, H 같은 이들이 드물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요. 평범한 직장인이 영화감독이 된 경우를 알고 있어요. 그는 어떻게 그런 극적인 삶의 전환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요? 어린 시절, 함께 영화를 보고, 아버지 캠코더로 영상을 찍는 놀이를 했던 친구를 우연히 만났기 때문이었어요. 늘 일 생각밖에 없던 그가 우연히 어린 시절을 친구를 만나, 자신이 진정으로 행복했던 기억(영화)을 되찾게 된 거죠. 마치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먹는 순간, 과거의 기억이 열려버린 주인공처럼 말이죠. 그 기억의 열림(순수 기억→상 기억)을 통해 평범한 직장인은 소설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죠.


삶의 전환 혹은 잠재적 가능성의 실현은 모두 ‘기억’을 통해 가능해요. 직장인이 영화감독이 되는, 은행원이 화가가 되는, 공무원이 복서가 되는 극적인 삶의 전환은 모두 기억의 열림을 통해 가능한 거죠. 그들은 모두 ‘순수 기억’ 속에서 있던 ‘씨앗’(잠재적 소설가·화가·복서)이 특정한 계기를 통해 ‘상 기억’이 되고, 그 ‘상 기억’들이 새로운 ‘지각의 틀’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꽃’(소설가·화가·삶의 주인)을 피우게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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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전환에는 실재적 감각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어요. “순수 기억이 현재화됨에 따라 몸에 대응하는 모든 감각”이 활성화되겠죠. 하지만 이때 활성화되는 감각은 모두 ‘잠재적 감각’일 뿐이죠. 쉽게 말해, 과거 복싱을 했던(영상을 찍었던) 기억이 떠오를 때, 복싱이 하고 싶어(영화가 찍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 감각이 실제로 복싱(영화)을 잘할 수 있는 감각인 것은 아니잖아요. 기억의 열림이 촉발하는 몸의 감각은 ‘잠재적 감각’일 뿐이니까요.


삶의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잠재적 감각’을 ‘실재적 감각’으로 전환해낼 수 있어야 해요. 쉽게 말해, 복싱을 하고 싶어서(영화를 찍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는 감각이 아니라 실제로 복싱을 잘할 수(영화를 잘 만들 수 있는) 있는 감각이 필요한 거죠. 그렇다면 그 ‘실재적 감각’은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요?


잠재적 감각 자체가 실재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이게 하고 그것에 습관적인 운동과 태도를 몸에 새기려는 경향을 가져야 한다. 『물질과 기억』 앙리 베르그손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실재적 감각’을 형성하려면, “몸을 움직이게 하고, 그것에 습관적인 운동과 태도를 몸에 새기려는” 노력이 필요하죠. ‘직장인’에서 ‘프로 복서(영화감독)’로 삶을 전환하려면, ‘순수 기억→상 기억’이 만들어내는 ‘잠재적 감각’을 바탕으로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거죠(훈련!). 이를 통해 습관적인 운동(복서·영화감독의 움직임)과 태도(복서·영화감독의 마음)를 몸에 새겨넣어야 하는 거예요. 구체적인 삶의 전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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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결정론인가?


여기서 우리는 ‘결정론’과 ‘주체론(자유의지론)’ 사이에서 삶의 진실을 마주하게 돼요. ‘결정론’이 뭔가요? 삶의 방향이 운명처럼 다 결정되어 있다는 거잖아요. 삶에는 분명 그런 측면이 있죠. ‘순수 기억 도식’을 생각해 봐요. <순수 기억(1)→상 기억→운동적 도식→지각의 틀→새로운 지각→기억 섞임→순수 기억(2)…> 이는 ‘순수 기억’으로부터 시작해서 ‘순수 기억’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잖아요.


그런데 누구도 ‘순수 기억’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어요. 누군가가 직장을 그만두고 프로 복서나 영화감독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기억(순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 “순수 기억이 현재화”되었기 때문에 삶의 전환이 시작될 수 있었던 거잖아요. 아버지와 즐겁게 복싱을 했었던 기억이 없다면,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고 영상을 찍었던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면, 그들은 직장인에서 프로 복서나 영화감독으로 삶을 전환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 과정은 운명처럼 주어지는 것이지, 스스로 만들거나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기억은 우리네 삶을 결정하는 직접적인 요소잖아요. 불편한 삶의 진실을 알고 있잖아요. 가난한 집에서 자란 아이는 꿈마저 가난해지고, 부유한 집에서 자란 아이는 배려심마저 갖게 되는 경우는 흔하잖아요. 이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운명처럼 주어지는 ‘순수 기억’이 우리네 삶을 상당 부분 이미 결정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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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주체론인가?


그렇다면 삶은 ‘결정론’일까요? 그렇지 않죠. 삶은 ‘결정론’의 크기만큼의 ‘주체론’이 존재하죠. ‘주체론’은 자신의 자유 의지를 통해 얼마든지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삶은 타자에 의해 주어지는 영역의 크기만큼,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 수 있는 영역의 크기가 있어요. 쉽게 말해, 자유 의지를 통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는 거죠. 이러한 ‘주체론’은 ‘순수 기억→상 기억’과 ‘잠재적 감각→실재적 감각’,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어요.


먼저 ‘순수 기억→상 기억’의 과정부터 이야기해 봅시다. 이는 이미 결정된 것 같죠? ‘순수 기억’ 속에 있는 과거 기억이 아버지와 복싱 놀이를 했던(친구와 함께 소설을 읽었던) ‘상 기억’으로 나타나는 거니까요. 상황을 조금 바꿔 볼까요? ‘미달·미순·미선·미자…’(순수 기억)에서 ‘미경!’(상 기억)이 되는 과정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이 역시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이나요? 그렇지 않죠. ‘미경!’(상 기억)이 생각난 건, 과거에 ‘미경’과 함께 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지금 ‘미경’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는 무한한 기억이 있어요. 그것이 ‘순수 기억’이잖아요. 그 무한한 ‘순수 기억’ 중 어떤 것이 ‘상 기억’화 되는 걸까요? 바로 우리의 ‘행동’과 연관된 것들이죠. 어린 시절 가물가물한 친구 이름을 선명하게 떠올리려면, 동창회를 가거나 학창 시절 앨범을 찾아봐야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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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역시 마찬가지죠. 아버지와 함께 복싱을 했던 기억이 떠오르려면, 아버지를 만나러 가거나 복싱과 관련된 ‘행동’을 해야 하는 거죠. 그렇지 않다면, 그 기억은 흐릿하고 모호한 ‘순수 기억’의 형태로 계속 잠겨 있을 테니까요. 즉, ‘순수 기억→상 기억’의 과정에서 우리의 ‘행동’은 (적극적으로는) 촉발제이거나 (소극적으로는) 촉매제인 거죠. ‘순수 기억’은 분명 결정되어 있지만(결정론), “순수 기억의 현재화”는 능동적인 선택과 행동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화 가능한 거죠(주체론).


삶의 주체론적 측면은 ‘잠재적 감각→실재적 감각’의 차원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죠. 우리의 지난 과거(순수 기억)는 지금 우리네 삶의 많은 부분을 결정하는 측면이 있죠. 공부하는 집안에서 자란 아이는 공부와 관련된 ‘잠재적 감각’이 발달 되어 있을 테고, 운동하는 집안에서 자란 아이는 운동과 관련된 ‘잠재적 감각’이 발달 되어 있을 테니까요. 우리네 삶은 분명 이미 어느 정도 결정론적인 측면이 있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잠재적 감각’의 측면일 뿐이에요. 그 ‘잠재적 감각’이 ‘실재적 감각’이 되려면, 결국 스스로 선택하고 노력해서 습관과 태도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재능은 분명 존재하죠. 하지만 그 재능이 역량이 될지 아닐지는 자유 의지를 갖고 발휘하는 노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때로 노력이 재능을 이기기도 하는 거죠. 이에 대해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에서 이렇게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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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틈空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는 우리가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이는 일리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며,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창조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창조적 진화』 앙리 베르그손


세상 사람들은 우리는 우리가 무엇(복싱·영화)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의 성패 여부를 우리가 무엇인지(복싱·영화에 소질이 있는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고 말하죠. 이는 일리가 있는 말이죠. 누군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그것이 기질이 되었던, 재능이 되었든) 그가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존재인지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처럼 베르그손은 삶의 결정론적 측면을 기꺼이 인정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베르그손은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며,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창조하고 있다”고 말해요. 이 역시 삶의 진실이잖아요. 인간은 주어진 조건(유전자, 성장배경 그로 인한 기질과 재능 등등) 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그 주어진 조건 안에서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가며,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해 나갈 수 있죠. 삶을 돌아봐요. 비슷한 삶의 조건 아래서 있었다고 할지라도, 누군가는 그 삶의 조건 속에서 전혀 새로운 운명을 창조해 내기도 하잖아요.


삶은 ‘결정론’도 ‘주체론’도 아니에요. 삶은 ‘틈(空!)’이에요. ‘틈’은 고정된 변(조건)들에 의해서 규정되죠. 하지만 ‘틈’은 비어있기에 그 속에서 어떤 것을 집어넣을 수 있는 여지가 있죠. 우리가 그 ‘틈’을 그대로 ‘틈’으로 두느냐 채우느냐, 더 나아가 그 ‘틈’ 속으로 어떤 것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틈’의 깊이와 형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죠. 삶은 그런 것이죠. 결정된 조건 속에서 주체적으로 창조해 낼 수 있는 ‘틈’, 삶은 그런 것이죠. 불교에서 말하는 “삶은 공空하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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