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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ul 28. 2023

구텐베르크

[기독교사상, 문화와신학 2010년 6월호]


세상을 더 많이 변화시킨 것은 금이 아니라 납이었다. 납 가운데서도 총알 제조용으로 사용된 납보다 인쇄활자로 사용된 납이 세상을 더 많이 변화시켰다.

- G.C. 리히텐베르크.


서기 1000년대에 인류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7-1468)의 금속활자 발명이라고 지적된다. 구텐베르크가 1450년경에 금속활자와 번지지 않는 종이·잉크와 함께 활자 주조법과 활자를 활자판에 고르게 배열하는 등의 기술을 개발하면서 서양사(세계사)를 크게 바꿔놓고, 인류사적 측면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변혁을 가져왔다. 전기·화약·기관차·전선·전화·전력·비행기·잠수함·로켓·증기엔진·계산기·라디오·텔레비전·철도·고무·마천루·녹음기·냉장고·플라스틱·나일론·태양력 발전·레이더·X레이·원자력·로봇·컴퓨터·레이저·각종 의약·복제동물 등 지난 1000년 동안에 수많은 발견·발명·개발이 이루어졌다.


인류는 문명사적으로 지난 1000년 동안에 이전 5만 년보다 훨씬 더 많은 발명으로 편리와 유익함을 가져왔다. 서기 1000년대가 저물어 가던 1999년 말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타임>지는 지난 1000년 동안 인류역사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발명으로 쿠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선정했다. 그는 같은 기간의 ‘10대 인물’ 중에서도 2위를 차지했다. 문명사의 어떤 발명보다 금속활자에 비중을 둔 것이다.


T. 칼라일이 “근대문명의 중요한 세 개의 요소는 화약 인쇄술 개신교이다”고 말할 만큼 금속활자를 통해 발전한 인쇄술은 ‘근대문명’을 일구어 온 원동력이 되었다.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난 구텐베르크는 1430년경 스트라스부르크에서 보석세공유리 만드는 일을 하였다. 1450년경에 마인츠로 돌아와 J. 푸스트와 함께 인쇄공장을 차려 천문력이나 면죄부 등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마포(亞麻布) 압축기 틀에다 양피지(羊皮紙)를 바른 것으로 활자의 주형(鑄型)은 주석과 납의 합금이었다. 5년 뒤 사업은 파산하게 되어 푸스트에게 공장을 넘기고 그는 활자와 인쇄기의 개량을 연구하였다.


구텐베르크는 새로운 협력자 C. 후메리의 도움으로 인쇄공장을 다시 차리고 개량된 주조기와 인쇄시설을 통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인쇄를 시작했다. 1454년경 라틴어 성경 인쇄를 시작하여 시편을 인쇄했는데 이것이 『구텐베르크의 성경』으로 『42행성서』 또는 『마자랭 성서』라고도 불린다. 현재 이 성서는 파리 국립도서관 등에 소장돼 있다.


이 성서는 641장, 1,282쪽의 두 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 쪽의 크기는 42×30cm, 본문은 2단으로, 각 단은 42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흔히 『42행성서』로 불리는데 초판 인쇄본은 180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140부가 종이책이었고 40부는 송아지 피지 책이었다. 이것은 구텐베르크가 송아지 피지로 된 책을 찍기 위해 약 5,000여 장의 송아지 가죽을 샀고, 종이책을 찍기 위해 적어도 5만 장의 종이를 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훗날 판매를 통해서만 자금의 회수를 기대할 수 있는 엄청난 투자였다. 그중 적어도 48부가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데, 36권은 종이책이고 12권은 송아지책이다.


사상 처음으로 성경이 인쇄되고, 이 소문이 퍼지면서 인쇄기는 곧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탈리아는 1465년, 프랑스는 1470년, 스페인은 1472년, 네덜란드와 영국은 1475년, 덴마크는 1489년에 각각 인쇄공장이 세워졌다. 그 밖의 각국에 인쇄기는 보급되고 인쇄소가 설립되었다.


활자본 인쇄는 여러 가지 ‘혁명적’ 변화를 불러왔다. 제작의 속도와 상대적으로 값이 싸다는 이유로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늘고 그만큼 수요도 증가되었다. 과거에는 하나의 원본에 수많은 사본이 생기고 사본 중에는 오류가 많아서 불신을 받기도 했는데 활자본 인쇄는 정보이용자들에게 통일되고 표준화된 사본을 제공해 주었다. 또 필사된 책과는 달리 정보의 신속성과 신뢰성을 증대시켰다.


인쇄술의 발달로 각종 책과 자료의 전파는 당시 시작되고 있던 르네상스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었다. 책은 소수의 귀족이나 성직자의 소유에서 일반 대중이 공유하게 되고, 학문과 지식·정보는 더욱 광범위하게 전파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 반박문’은 활판인쇄술 덕에 2주일 만에 전 유럽으로 파급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은 인쇄물을 이용하여 빠르게 유럽의 지식인에게 알려지고, 판화를 통해서 글을 모르는 농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인쇄된 성서를 읽게 된 시민들은 지금까지 가톨릭교회가 이야기한 것이 성경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종교개혁을 적극 지지하게 되었다. 루터는 인쇄술을 가르쳐 “복음 전파를 위해 신이 내리신 최대의 선물”이라 극찬하고, 20세기 미국 미디어 학자 맥루한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구축된 도서문화의 세계를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라고 표현했다. 종교개혁과 산업혁명을 성공시키는 역할을 하고 도시마다 서점이 생기고 지식과 정보가 일반 농민들에게까지 공유되면서 차츰 중세의 질서는 무너지고 인권의식이 높아지면서 시민혁명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구텐베르크가 1468년 3월 사망하자 소르본느 대학교수 기욤 피세는 1470년 12월에 인쇄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헌사를 남겼다.


구텐베르크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처음으로 인쇄기술을 생각하여, 고대인들처럼 갈대를 쓰지도 않고 지금 우리처럼 깃대 펜을 사용하지도 않고, 금속활자로 이처럼 빠르고 깔끔하고 아름답게 책을 만든 사람이다. 확실히 그는 모든 뮤즈와 예술과 책을 즐기는 모든 사람들의 진정한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다. 책을 쓰는 학식 있는 사람과 문화에 헌신적인 사람들 손에 선택의 수단을 쥐어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신보다 더 고마워해야 할 사람이다.



[중앙선데이, 2012.6.10.]


캐나다의 문명 비평가 마셜 맥루언(1911~80)은 자신의 저서 구텐베르크 은하(The Gutenberg Galaxy)(1962)에서 근대적인 인간을 ‘구텐베르크 인간(Gutenberg Man)’이라고 불렀다. 맥루언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가능케 한 책의 대량 보급으로 인간이 스스로를 재창조했다고 주장했다.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는 표현은 맥루언의 구텐베르크 은하에서 처음 등장한다. 맥루언의 논리를 수용한다면 지구촌 시대의 첫 삽을 뜬 것은 구텐베르크다.


구텐베르크의 가문은 마인츠에서 ‘파트리치어(Patrizier)’라 불리는 세습 지배 계급에 속했다.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재판 기록, 금전 거래 기록 등을 통해 추정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후손을 남기지 않았다. 슈트라스부르크(오늘날의 스트라스부르)에 사는 어떤 여자가 결혼 약속을 어긴 그를 고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어린 시절이나 그가 받은 교육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당시 구텐베르크가 속했던 계층의 일반적인 교육 방식으로 보아 아마도 신학교나 수녀원의 부속 학교를 졸업하고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했을 것이다.


젊었을 때 구텐베르크는 금속·보석 세공 기술을 배우며 주형(鑄型)에 대해 알게 됐을 것이다. 그가 살던 마인츠와 슈트라스부르크는 마침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구텐베르크는 포도와 와인을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포도즙을 짜는 와인 프레스(wine press)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와인 프레스는 인쇄기 제작에 응용됐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 인쇄술이 서양만큼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와인을 마시지 않아서’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구텐베르크 성경은 세계 출판 역사 걸작
1439년 구텐베르크는 아헨으로 몰려드는 순례자들에게 ‘순례용 거울’을 제작해 팔았다. 인파에 가려 순례자들은 성인·순교자들의 유해 등 성물(聖物)을 잘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머리 위로 거울을 올려 성물을 비추었다. 성물이 거울에 비치면 그 기운을 고향으로 담아 갈 수 있다는 미신도 있었다. 구텐베르크는 거울 생산에서 터득한 ‘모래 거푸집 주조법(sand-casting)’을 활자 생산에 원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텐베르크는 1438년 이전에 인쇄술 연구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1450년께 인쇄술을 완성했으며 늦어도 1455년 구텐베르크 성경을 출간했다. 크기가 4030㎝로 분량은 3900여 페이지에 달했다. 각 페이지는 2단(段)으로 돼 있고, 한 단은 42줄이었다. 그래서 구텐베르크 성경은 42행 성서라고도 불린다.


구텐베르크 성경은 160~180부가량 인쇄됐는데 오늘날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48부 정도다. 전체의 4분의 1, 즉 30~45부는 5000여 장에 달하는 송아지 가죽(vellum)으로 제작했다.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것은 약 10부가 남아 있다. 나머지를 찍는 데는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고급 종이 약 20만 장이 들어갔다. 책값은 30길더였다. 당시 사무원의 3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고가였다.


15세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다. 구텐베르크는 중세인이면서 ‘시원적 자본가(proto-capitalist)’이기도 했다. 19세기까지는 그에 대해 고독하고 경건한 발명가의 이미지가 주된 평가였으나 20세기부터 그의 다른 면모가 드러났다. 구텐베르크는 큰 부자가 되기를 꿈꾸는 수완 좋은 사업가였다. 전 유럽으로 통하는 교회 네트워크를 감안하면 성경은 따놓은 베스트셀러였다.


구텐베르크는 1450년 자금이 넉넉한 법률가인 요한 푸스트(1400년께~1466년)로부터 800길더를 꿨다. 소 100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추가로 돈을 빌리다 보니 1456년께는 빚이 2000길더로 늘어났다. 둘의 사이가 틀어져 푸스트는 돈을 돌려달라고 구텐베르크를 압박했다. 완벽주의자인 구텐베르크는 당장의 이익을 바라는 푸스트의 속을 태웠다. 푸스트는 구텐베르크가 빌린 돈으로 인쇄가 아니라 딴 궁리를 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소송에 져 구텐베르크는 빈털터리가 됐다. 일부 사학자에 따르면 푸스트는 괴테(1749~1832)의 파우스트(1808, 1832)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구텐베르크는 부자가 되지 못했으나 그가 발화시킨 인쇄 혁명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며 르네상스 전개의 배경이 됐다. 1500년께 유럽에는 1000곳의 인쇄소에서 1만~2만 명을 고용했다. 1500년까지 4만여 종의 책이 800만~900만 부가량 인쇄됐다. 수도사들이 필기로 책 한 권을 만드는 데는 한두 달씩 걸렸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는 일주일에 500권씩 찍어냈다.


구텐베르크에게는 예술가적 기질도 있었다. 구텐베르크 성경은 중세 수도사들이 만들었던 성경의 아름다움을 능가하도록 디자인됐다. 덕분에 유럽 최초의 인쇄 서적인 구텐베르크 성경은 오늘날에도 세계 출판의 역사가 남긴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최대한 필사본의 캘리그래피(calligraphy)와 같게 보이도록 구상됐으나 상당수 사람은 ‘인공적인 필기’를 낯설어했다. 구텐베르크를 사탄의 하수인쯤으로 취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는 교회와 사이가 좋았다. 훗날 교황 비오 2세가 된 인문주의자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는 1455년 3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구텐베르크 성경이 “안경 없이도 잘 보인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 편지는 구텐베르크 성경의 출간 시기를 확증하는 문헌이기도 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1454~1455년께에는 면벌부(免罰符)를 인쇄했다. 교황청은 키프로스를 위협하는 터키와 일전을 치르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운명을 다룬 ‘미신적인’ 예언서를 찍기도 했지만 구텐베르크는 미사경본(missal), 라틴어 문법책과 같이 교회에 필요한 문헌을 많이 출간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빼앗은 푸스트는 1457년 구텐베르크가 비밀리에 준비하던 라틴어 시편을 발간했다.


교회에 대한 이런 공로를 인정해 마인츠 대주교는 1465년 구텐베르크를 ‘호프만(Hofmann)’이라 불리는 조신(朝臣)으로 임명했다. 구텐베르크는 몇 가지 특권과 더불어 교회가 주는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뉴스페이퍼, 공병훈, 2022.1.6.]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1440년 주조 금속활자법과 인쇄기를 개발하여 제일 만들고 싶어하던 책은 성경이었다. 그는 고대시대부터 널리 사용되던 포도주나 기름 압착기 원리를 활용하여 인쇄기를 개발하여 1456년에 『42행 성서』(42-line Bible)을 인쇄한다. 구텐베르트 인쇄기는 손잡이를 잡아당기면 연결된 나사가 돌면서 아래로 움직이고 여기에서 생기는 압력이 수평으로 나무 판자에 전달되었다. 이 나무 판자에는 인쇄될 종이를 장착할 수 있었고 판 밑에는 조판이 끝난 활자가 놓여 인쇄되는 방식이다.


한 장을 인쇄하고 다시 활자에 잉크를 칠하고 다시 인쇄하였다. 중세 유럽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지식 혁명의 방아쇄를 당겼다는 구텐베르크 인쇄기 기술의 핵심은 활자를 이용한 인쇄이다. 그가 개발한 금속 활자 제조 방법을 살펴보자. 먼저 납, 주석, 안티몬 같은 금속을 최적의 비율로 합금하여 다양한 활자를 만들어내었다. 알파벳 철자 하나를 뒤집힌 형태로 단단한 강철 막대 끝에 조각하여 활자의 몸을 만드는 틀인 주형(鑄型)을 만든다. 무른 구리를 주형에 대고 망치를 내리치면 죄우가 제대로 된 움푹 패어서 모양이 같은 물건을 만들기 위한 틀인 모형(模型)이 만들어진다. 이 모형을 구텐베르크가 만든 주조 도구인 거푸집에 고정하여 232도로 가열한 납 합금을 붓는다. 합금이 식으면 좌우로 뒤집힌 활자가 완성된다. 이제 이 활자를 동이에 인쇄하면 글자가 정상으로 나타난다.


구텐베르크는 『42행 성서』를 인쇄하기 위해 299종의 활자를 제작했다. 미리 여러 벌 만들어 놓은 활자에서 필요한 알파벳을 뽑아 단어는 단어대로 단어 사이 공간은 공목(空木)으로 분리하여 하나의 행이 완성될 때까지 조판했다. 행과 행 사이에도 다른 공목을 넣어 전체 페이지의 조판을 마무리하여 식자판을 인쇄기에 걸었다.


15세기 독일에서 사용하던 종이는 깨끗하게 인쇄하고 색을 균등하게 입히기에는 너무 딱딱하고 미끈거렸다. 인쇄공들은 며칠 전에 종이를 축축하게 만들었고 구텐베르크는 걸쭉하면서도 빨리 마르는 잉크를 만들기 위해 아마인유, 테르펜틴, 송진, 역청 등을 혼합하였다. 그는 인쇄의 모든 과정을 최적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도구들을 발명했다. 활자를 뽑아 조판하기 편하도록 활자 상자를 만들고 활자 조판을 위해 식자가(植字架)와 식자판(植字版)을 만들어 식자판에 인쇄할 전체 면을 배열하였다. 구텐베르크의 꼼꼼함과 천재성은 마지막 발명품인 잉크 방망이(Inkball)에 있다. 잉크 방망이 덕분에 잉크를 균등하게 칠할 수 있었다.


1454년 10월 구텐베르크는 프랑크푸르트 박람회에 『42행 성서』의 일부를 선보이기도 한다. 선주문을 받을 목적으로 내놓은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성경 외에도 『도나투스 문법서』, 면죄부, 달력, 의학 조언서, 종교 소책자 등을 출판했다.


연구자들은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유럽에 수천 권의 필사본들이 출판되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인쇄술이 발명되고 난 후 불과 50년이 지난 1500년 경에 이미 900만 권이 넘는 책들이 출판된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인쇄기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보여준다. 1550년경 인쇄기와 기술이 자리잡히면서 인쇄업자들이 책 출판 활동을 주도하여 활자주조·편집·출판·판매활동까지 겸한다. 1500년 경의 책에서 저자명, 도서명 출판 장소, 출판사 이름, 발행연도 등이 있는 판권이 발견된다. 저자를 작품의 원작자로 이해하는 의미를 보여준다.


구텐베르크가 태어나서 주로 활동하던 지역이 독일 마인츠(Mainz)였기 때문에도 당시에는 인쇄를 “독일의 예술”이라고까지 불렀다. 마인츠는 로마시대에 개발된 라인강 주변의 상업 도시이다. 16세기초 독일이 종교개혁의 중심지로 떠오른 것도 발달된 독일 인쇄술과 관련된다.


마인츠는 1118년 자치권을 얻어 1244년에 시민들이 자유권과 특혜를 누리던 자유 도시가 되었다. 대부분의 중세 도시들에서는 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상인계층의 역할이 주도적이었다. 그들의 욕구와 열망에 열향받은 장거리 곡물 수송, 교역 등으로 도시들은 활기있게 번성기를 맞는다. 마인츠는 1254년에는 라인 지방 도시 연맹의 중심지였다. 마인츠에서 번성하던 초기의 인쇄 기술은 폐쇄적으로 영업상의 비밀이 지켜지면서 마인츠에만 활용되었다. 하지만 1462년에 적대관계에 있던 대주교의 전쟁과 군대에 점령되고 경제 침체가 극에 달하자 시민들은 자치권을 박탈당했고 많은 기술자들이 유랑의 길을 떠났다. 인쇄업자들이 유럽의 다른 도시로 피난하면서 마인츠의 인쇄 기술 독점은 끝나고 구텐베르크의 인쇄 기술이 유럽 전체로 퍼져나간다.



인쇄기술은 독일 상인들의 교역로를 따라 널리 확산되어 1464년에는 마찬가지로 로마시대에서부터 상업 도시로 발달된 라인강 주변의 쾰른(Cologne)이 인쇄 중심지로 떠오른다. 1470년에 구텐베르크 인쇄기를 사용하는 인쇄소는 17곳이었지만 1480년에는 121곳으로 늘었다. 10년 뒤에는 204곳의 인쇄소가 운영되었고 1500년경에는 대략 250개 도시로 인쇄기가 퍼졌고 바젤·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등 거대한 교역 중심도시들이 인쇄 중심지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뉴스페이퍼, 공병훈, 2020.9.19.]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혁신적인 점은 세 가지로 들 수 있다. 첫째, 많은 활자를 정확히 주조할 수 있도록 자모(字母)들이 각인된 펀치 모형(활자의 앞면을 주조하는 데 사용한 금속 각주)을 부착한 주형과 활자 합금이다. 둘째, 포도주 제조 및 제지·제본할 때 쓰이는 프레스를 응용해서 만든 인쇄기이다. 셋째, 유성의 인쇄잉크 등이다.


그는 무거운 압착기 나사볼트를 이용해 활자판을 눌러 인쇄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의 아버지가 금화를 제조하는 조폐국에서 일했다는 기록을 보아 압착을 하는 아이디어는 거기에서 가져왔을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금세공사조합에 가입해서 금속세공기술을 익혔다는 사실이 당시 자금거래 서류에서 나오고 있다. 1430년 마인츠의 조합측과 귀족계급 사이에 오랫동안 벌어져온 치열한 싸움의 와중에 이 도시로부터 추방되어 그는 프랑스의 슈트라스부르크로 갔다.


금세공사조합 기록에는 동업자들과 함께 보석세공과 거울 만드는 일을 하면서 많은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1437년 그가 부유한 방문판매원에게 보석들을 광택내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금속 작업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노하우가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게 한다. 아버지에게서 압착 기술의 아이디어를 가져왔다면 금속세공 기술은 금속 활자를 개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1448년 10월 돈을 빌리기 위해 마인츠로 돌아와서 재정가인 요한 푸스트(Johann Fust)를 설득해 인쇄기와 설비를 담보로 800길더라는 꽤 많은 돈을 빌릴 수 있었다. 2년 뒤 푸스트는 800길더를 더 투자하여 사업 동업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투자가 안전하고 신속한 결실을 맺기를 바랜 반면, 구텐베르크는 빨리 만들기보다는 완전하게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사이가 멀어졌다.


구텐베르크는 마인츠(Mainz)로 돌아와 고향집에 1448년 인쇄소를 차렸다. 구텐베르크가 꿈꾸던 것은 중세의 전례(典禮)에 관한 필사본들을 그 색깔이나 디자인의 아름다움을 전연 손상하지 않고 기술적으로 재생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이었다. 그는 1450년에 유력자인 요한 푸스트(Johann Fust)에게 돈을 빌려 “구텐베르크 성서”라고 부르는 『42행 성서』 출판 작업에 착수한다. 연구에 따르면, 모두 2권에 총 1,272쪽에 달하는 분량이며 당시의 제작 공정을 고려할 때 25명 정도의 장인들이 참여했다고 예측된다. 『42행 성서』은 180질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 48질이 남았는데 상태가 완벽한 것은 21질에 불과하다.


구텐베르크는 『42행 성서』의 인쇄를 위해 290개의 서로 다른 자모(字母)를 만들었다. 삽화로 그려진 머리글자와 부호들은 채색공이나 식자공들이 삽입하여 넣었다. 전체 180질 중 150부 정도는 종이에 인쇄하였고, 나머지 30부는 값비싼 양피지에 인쇄하였다.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48부 중 2부를 구텐베르크 박물관이 소유하고 있다.


1457년 8월 14일 시편이 완성되어 마인츠에서 발행됐었다. 이 시편은 하나의 조판대 위에 여러 색의 잉크를 칠하는 기법을 바탕으로 한 매우 독창적인 기술인 정교한 소용돌이 무늬로 가장자리를 장식했으며, 또한 수백 개의 색상으로 머리글자를 장식했다. 시편의 장식은 바로 구텐베르크가 생각해낸 것이다. 당시 구텐베르크가 동판인쇄도 고안했으리라는 의견이 있다. 동판인쇄로 생동감있는 아름다운 활자를 알아냈던 것으로 보이며, 이 방법으로 활자·머리글자·장식서체 등을 양각으로 주조하게 되었다.


오랜 필사 작업으로 만들어진 성경 66권 한 질을 사려면 집 10채 값을 지불해야 했다. 따라서 성경은 수도원이나 교회만 소유할 수 있었다. 성경을 독점한 교회는 교리를 자신들 방식으로 해석하고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다. 성경이 대량으로 보급되고 사람들이 손쉽게 접하게 되었고 수도원과 교회의 교리해석을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형성되었다. 인쇄기 개발이 종교개혁에도 바탕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텐베르크는 『42행 성서』또한 당시 기관의 서기 한 명의 3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30길더 정도에 판매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텐베르크는 1454년 푸스트가 제기한 소송에서 패배한다. 이 소송에 대해서는 독일 괴팅헨(Göttingen)대학 도서관에 1455년 11월 6일자 헬마스페르거 공증문서로 남아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푸스트가 승소했고 2번에 걸쳐 빌린 원금과 복리이자를 합한 2,026길더(guilder)를 갚으라는 판결이 내려진다. 인쇄기 한 대와 몇 가지 물건만 가지고 쫓겨나다시피 한 그는 성서 출판 작업 사업에서 제외된다. 자신의 발명품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재정적으로 파산하게 된 것이다.


구텐베르크 인쇄로의 가장 숙련된 기술자였던 피터 쉐퍼(Peter Schöffer)가 구텐베르크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으며 푸스트의 양자가 된 사실로 보아 투자자에게 사업을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 파산한 구텐베르크는 1459년 밤버그(Bamberg)라는 도시에서 작은 인쇄소를 열어 성경 인쇄 작업에 계속했다고 하는데 인쇄된 성경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성경에 남기지 않아 그 후의 작업은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한 전기에 의하면 그는 말년에 이르러 거의 실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468년 사망하여 마인츠의 프란체스코 교회(Franciscan church)에 묻히지만 그후 그 교회와 묘지가 파괴되어 유골이 남지 않은 상태가 된다.



[littlefox.co.kr, 학습자료Johannes Gutenberg: Printing Genius]


요하네스 구텐베르그의 작업실은 북새통이었다. 그의 새로운 인쇄기는 완벽하게 작동했고, 인쇄된 수천 장의 페이지들이 깔끔하고 질서정연하게 여러 더미로 쌓여 있었다. 구텐베르그는 성경의 모든 페이지들이 완성되고 사본들이 판매가 되고 나면, 빚을 갚고 남은 평생 동안 인쇄업을 편안히 운영할 수 있을만한 돈을 벌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쇄 기계를 만들고, 활자(수천 개의 개별 문자들과 부호)를 주조해 내고, 완벽한 잉크를 개발하는 일은 예상보다 오래 걸렸다. 구텐베르그의 동업자이자 재정 후원자인 요하네스 푸스트라는 부유한 사업가는 인내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구텐베르그에게 빌려주었던 돈을 돌려 받기를 원했고 그것도 당장 돌려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실제 인쇄 작업은 기념비적인 작업이 되어가고 있었다. 각각의 성경은 1,286 페이지로 접을 수 있는 322장의 커다란 종이로 되어 있었다. 구텐베르그는 푸스트의 돈 전부를 이 프로젝트에 쏟아 부었지만 주문이나 판매에서 단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구텐베르그가 돈을 갚지 못하자 푸스트는 구텐베르그를 법정으로 데려갔고, 판사들은 인쇄소와 장비와, 심지어는 구텐베르그의 작업실까지도 푸스트에게 넘겨주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극히 적지만,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알려진 부분은 구텐베르그를 상대로 제기된 수많은 법정 기록에서 찾아낸 것이다. 구텐베르그는 1400년경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났다. 그 시기에 그곳에서는 사람들의 삶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지도자인 마인츠 대주교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구텐베르그의 가족은 교회 안팎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돈을 관리하는 책임을 진 교회의 부서인 대주교의 조폐소에서 세습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구텐베르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환전상이었고, 낡은 동전을 자신들이 만든 새 동전으로 바꾸어 주고 외국 동전을 현지 돈으로 바꾸어 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구텐베르그의 일가의 남자들은 금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금속으로 작업을 하는 데 아주 능숙했을 것이다.

  

1434년경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의 재산이 없어진 후 구텐베르크는 스트라스부르로 옮겨가 금세공인 조합의 일원이 되어서 보석 세공인으로 생계를 꾸렸다. 당시 유럽인들은 렌즈, 거울, 프리즘 등에 매혹되었고, 구텐베르그는 1439년으로 계획된 독일 아헌의 대성당 행 거대한 순례 여행을 기회로 삼기로 했다. 구텐베르그는 그 행사에 참여하는 수천 명의 순례자들에게 팔기 위해 볼록 거울이 달린 작은 배지들을 만들기로 했다.


신심이 깊은 이들은 죽은 성자나 중요한 종교적 인물의 옷 조각이나 뼈와 같은 성스러운 유물들에 치유력이 있고, 이러한 힘을 거울에 담을 수 있다고 믿었다. 구텐베르그는 유물들이 숭배자들에게 전시되는 축제의 일부 기간 동안에 이 배지들이 아주 잘 팔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순례 여행은 흑사병으로 인해 취소되었고, 구텐베르그는 이 사업에서 예상했던 돈을 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내 구텐베르그는 또 다른 아이디어인 인쇄업을 시작하고자 했다. 당시에 책들은 수도원에서 손으로 수도사들이 베끼거나 대학 근처 작업장에서 필경사들이 베꼈다. 이 과정은 여러 해가 걸렸기 때문에 오로지 사제들, 학자들과 귀족들만이 책을 소장했다. 책들은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으로 만들어진 양피지와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송아지 피지 위에 베꼈다.


1442년경 구텐베르그는 마인츠로 돌아가서 새로운 인쇄 공정을 창안하는 일에 집중했다. 짧은 시간 내에 뛰어난 질의 인쇄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구텐베르그는 인쇄기에서 활자, 잉크까지 인쇄 장치의 작동 부품 하나하나를 발명하거나 기존 장치의 수정부품을 만들었다.    

   

당대의 인쇄업자로서 구텐베르그는 단어와 문장, 문단 및 페이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한 자씩 따로 새겨진 나무 활자인 목판 가동 활자를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목판 문자들은 만드는 데 시간이 소모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닳기 때문에 인쇄물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금세공사였던 구텐베르그는 문양과 문자를 찍어내는 데 사용되는 금속도구인 강철 금형과 인장과 동전을 찍어내는 데 쓰이는 금속 천공기를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구텐베르그는 이 두 가지 개념을 조합해서 금속 가동 활자를 개발해냈다.


구텐베르그는 주석과 납과 안티몬을 섞은 합금을 만들어냈다. 이 합금은 쉽게 활자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지만 오래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했다. 금속 활자가 만들어내는 인쇄의 질은 뛰어났다. 구텐베르그는 심지어는 문자와 부호를 재빨리 주조해 낼 수 있는 소형 거푸집까지 개발해냈다. 이는 한 페이지에 대략 삼천 개의 부호가 필요했기에 대단한 혁신이었다. 한 페이지를 만들기 위한 문자들과 공백들과 구두점 부호들을 한 자리에 모으기 위해 구텐베르그는 조판 방식 한 가지를 고안해 내기도 했다. 15세기의 물을 주원료로 한 잉크는 금속 활자에 잘 붙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납과 구리가 많이 들어간 기름을 주원료로 한 잉크를 개발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텐베르그는 당시의 포도주 및 종이 압착기에 기초하여, 각 페이지가 잉크를 바른 문자들에 닿을 때 균일한 압력을 가해주는 인쇄기도 만들어 냈다.


1452년경에 구텐베르그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신자들이 구매하는 문서인 면죄부를 교회를 위해 인쇄하기 시작했다고 많은 학자들은 믿는다. 구텐베르그는 성경을 찍기에 충분한 돈을 벌기 위해 이 문서를 수천 장 인쇄하여 교회에 팔았다. 그리고 자신의 돈과 동업자 요하네스 푸스트가 지원한 돈으로 구텐베르그는 1455년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던 성경 작업을 시작했다.  

    

구텐베르그 성경은 약 150부가 인쇄되었고, 48부가 아직 남아 있다. 몇몇은 송아지 피지로 만들어졌고, 몇몇은 당시 유럽에서 생산중이었던 종이로 만들어졌다. 이 성경들은 페이지 양쪽 면에 인쇄되어 있고, 각 페이지는 각각 2개의 난과 42행으로 구성되었다. 여백들은 고르고 똑바르며, 하이픈 사용을 피하기 위해 단어들은 늘어나 있거나 바싹 붙여져 있었다.


구텐베르그의 활자는 필경 수도사들이 사용하던 문자체를 조심스럽게 본떴고, 필경사들이 만든 책에서처럼 색상이 손으로 몇몇 대문자에 입혀져 있고 여백에는 장식들이 더해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구텐베르그의 성경은 여러 해가 지난 후 인쇄된 성경들과 비교해 보아도 그 질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남아있는 구텐베르그 성경을 쉽게 읽게 해주는 것은 구텐베르그의 잉크라고 한다. 550년 이상이 지나서도 그의 인쇄물은 여전히 생생하고 윤이 나는 검은 색을 띠고 있다.  

    

불행히도 생산 과정이 예상보다 오래 걸렸고, 모든 페이지들이 완성되어서 제본이 될 때까지 성경을 단 한 권도 팔 수 없었기 때문에 돈이 떨어진 구텐베르그는 동업자에게 빚을 갚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요한 푸스트는 작업이 끝나기 전에 돈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으며, 몇몇 학자들은 구텐베르그의 작업에서 나오는 이익을 가로채기 위해 푸스트가 고의적으로 구텐베르크를 속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푸스트가 빌려준 돈을 회수하기 위해 구텐베르그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으로 구텐베르그는 성경 인쇄를 위해 개발한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1456년이 되었을 때 푸스트는 구텐베르그의 조수 한 사람과 성경의 인쇄를 마쳤고, 여러 부수를 인쇄해서 수익을 거두었다. 구텐베르그는 단 한푼도 받지 못했다.

     

1465년 마인츠의 대주교 아돌프 2세가 뒤늦게 구텐베르그의 업적을 인정해서 그에게 연금을 주고 이 노쇠한 인쇄업자를 자신의 궁으로 들였다. 그곳에서 구텐베르그는 1468년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사건in, 이일영, 2018.4.22.]


서양 최초의 활판인쇄를 발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G.L.Gutenberg,1398~1468)는 1398년 독일 라인강과 마인강이 합류하는 지점 맞은편 도시 마인츠(Mainz)에서 태어났습니다. 마인츠는 로마 시대부터 상업 도시로 존재하였던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구텐베르크는 금 세공업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1408년 독일 헤센주에 있는 엘트빌(Eltville)로 이주하여 1418년 에르푸르트 대학(University of Erfurt)에서 공부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437년경 스트라스부르에 있었던 구텐베르크는 금속거울 제작에 열중하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는 1439년 독일 아헨(Aachen)에서 교황청 후원을 받아 성지순례 차원으로 전설의 서로마황제 샤를마뉴의 유적과 유물 전시회를 대규모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샤를마뉴의 유물에서 존재하는 청동거울을 모델로 신성한 빛의 거울이라는 전략을 가지고 순례자들에게 이를 판매하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439년 아헨을 비롯한 유럽지역에 대규모 홍수가 일어나 행사는 1년 후로 연기되었고 이듬해 1440년 행사가 열렸지만 신성한 빛을 보는 거울은 판매가 부진하여 구텐베르크는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구텐베르크에게 샤를마뉴 유물전시회는 파산에 이르는 아픔을 주었지만, 그의 인생을 바꾸는 소중한 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전시회에는 아헨 궁전의 서적 필사실 유적과 도서관 유물을 망라한 전시로 샤를마뉴(742~814) 황제와 그의 아들 경건왕 루이(778~840) 그리고 손자 로타르 1세(795~855)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제작하여온 당시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소중한 서적과 유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텐베르크는 대학에서 라틴어와 문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인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손쉬운 서적의 인쇄에 대한 생각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던 것입니다. 신성한 빛을 보는 거울 판매에 완전하게 실패한 구텐베르크는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와 1444년까지 활판인쇄 연구에 전념하였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후 1448년 고향 마인츠로 돌아와 동생에게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기자재를 사들여 활자 주조와 함께 숱한 실험을 거듭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구텐베르크가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를 사용한 활판인쇄를 발명한 배경에는 금 세공일을 하던 아버지가 금속화폐 전문 제조공이었던 사실과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구텐베르크는 고향 마인츠에 인쇄기 자재를 설비해 놓고 동판화 작가들과 많은 접촉을 하였던 것으로 전해옵니다. 이는 향후 교과서나 성서의 인쇄에서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그림의 해결방법을 연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카드놀이의 카드 제작이 손으로 그렸던 카드에서 최초의 동판화 작업으로 제작된 시기로 작가 미상의 기록들이 전해오는 가운데 필자가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마틴 숀가우어(1445~1491)라는 동판화 작가가 가장 접촉의 가능성이 많은 작가로 생각되었습니다. 숀가우어는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금세공 일을 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라이프치히대학을 졸업하고 최초의 동판화 작업을 하였으며 1470년 알자스의 콜마르에 정착하였습니다. 당시 숀가우어의 동판화 카드가 상당한 인기가 있었으며 현존하는 기록에도 많은 작품이 남아 있습니다. 작가는 걸작의 많은 판화작품을 후세에 전하였습니다. 여기에 독일 미술사에서 가장 소중한 미술가로 평가받는 르네상스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가 숀가우어를 찾아 콜마르에 갔을 때 숀가우가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만나지 못 했던 일화가 미술사에 전해옵니다.


뒤러는 서양미술사 최초의 독립된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 판화 분야에서도 뛰어난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와 함께 뒤러의 스승인 독일 목판화의 아버지 미하엘 볼게무트(1433~1519)의 아버지도 금속 장인이었습니다. 이렇듯 판화의 지평을 열어온 세 사람의 아버지가 금속 장인이라는 사실은 뒤러의 대표적인 동판화 작품인 멜랑콜리아(Melencolia)의 동판 조각 기법이 금속 세공 조각법과 같은 사실에서 연관성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금속세공의 기법에서 금속 활자 주조의 틀을 만드는 기법이 탄생하여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가 성공한 사실은 세상의 모든 발견은 우연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사유와 바탕이 있음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구텐베르크는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 동판화 작가와의 많은 교류를 통하여 서양 최초의 활판인쇄의 성공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텐베르크는 금속 세공 장인이었던 아버지의 작업을 어려서부터 보아왔던 점에서 활판인쇄의 기본인 금속활자의 조각에서부터 주형 제조에 대한 기술적 문제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초기 인쇄기의 원리가 당시 유럽에서 와인과 올리브유 제조에서 오랫동안 사용하였던 압착기와 같았던 점에서 기본 기계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과 같은 행운도 있었습니다. 구텐베르크가 가장 고심하였던 부분은 향후 만들어질 성서나 교과서와 같은 책에서 요구되는 그림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당시로써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판화이었기에 작가들을 찾아 오랫동안 실험을 거듭하였던 것입니다.


미술사적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판화적 작업이 동양과 서양에서 고대에서부터 종교적인 이야기를 이콘(icon-도상화)이라는 장르로 목판화로 제작하여 왔습니다. 서양은 성경을 주제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 부터 이콘(icon)과 모자이크 방식으로 교회의 벽화와 제단화 등을 제작했습니다. 동양은 868년 목판화로 제작된 금강경이 존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 초기에 불교 경전을 목판화로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인류사에서 종이가 보급되기 전 비단에 목판화 작업이 이루어져 BC200년경 중국 한나라 시대에 비단에 찍힌 3색의 목판화 유물이 존재합니다.   

   
1450년 구텐베르크는 고향 마인츠에서 투자자 요한 파우스트(JohannFust1400~1466)에게 투자를 받게 됩니다. 이에 투자자의 사위인 필경사 피터 셰퍼(Peter Schoffer,1425~1503)가 구텐베르크와 함께 일하면서 서체의 디자인과 원고의 사본작성자로 일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1455년 서양 최초의 활판인쇄로 인쇄된 42행 성경이 180부 출판되었던 것입니다.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에 대한 소문이 퍼져가면서 유럽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가장 명확한 기록이 있습니다.


1458년에 선출된 교황 비오 2세(PiusⅡ1405~1464)가 1455년 당시 토스카나의 시에나 주교이었을 때 처음 인쇄된 성경을 프랑크푸르트에서 본 후에 카르발 할(Carvajal,1400~1469) 스페인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본 그 놀라운 성경 전체를 보지 못했지만, 텍스트가 정돈되어 있어 안경이 없이도 읽을 수 있으며 누구나 읽기가 쉽습니다,” 라는 내용에서 당시 상황을 쉽게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구텐베르크는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 활판인쇄에 성공하여 유럽을 흔들었지만, 다시 불행이 찾아 왔습니다. 투자자 파우스트가 소송을 제가 한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논란은 훗날 여러 학자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필자가 확인한 자료에 의하면 투자자 파우스트가 소송을 제기하여 당시 주교법원은 투자자의 일정한 권리를 인정하여 인쇄된 서적과 인쇄소의 지분을 동등하게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기술과 자본이 함께 하는 동업의 어려움을 잘 나타내는 사례로 생각됩니다. 당시 구텐베르크에게는 파산과 다름이 없는 판결에 작은 인쇄소를 독립하였으나 끝내 사업으로의 성공은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티스토리 '이풍진세상에', 2022.8.23.]


독일의 금 세공업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8~1468)는 고향인 마인츠(Mainz)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한 ‘42줄 성경’(구텐베르크 성경)을 완성했다.


1450년께 인쇄기를 발명한 구텐베르크가 1452년부터 3년에 걸쳐서 인쇄한 구텐베르크 성서는 인쇄기를 이용한 첫 출판물이었다. 그는 3년에 걸쳐서 180부를 인쇄했는데 양피지에 인쇄된 최초의 성경 30권 중에서 단 4권만 총 1,282쪽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었다.


인쇄기를 통한 인쇄는 필사본 생산 속도와 비교하여 15배나 빨랐다. 구텐베르크 인쇄기는 인쇄공의 숙련도에 따라서 1분에 2~10장가량을 인쇄할 수 있었다. 인쇄 속도에 비교하면 최초의 인쇄본의 숫자가 적은 것은 구텐베르크는 인쇄본 성서가 필사본처럼 보이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직지』는 19세기 말 콜랭 드 플랑시 주한 프랑스 공사가 매입해 여러 루트를 거쳐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이후 묻혀 있던 『직지』는 그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던 고 박병선 박사의 노력으로 1972년 파리 세계도서전시회에서 공개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고간본(古刊本)으로는 1378년 백운 화상이 입적한 여주 취암사(鷲巖寺)에서 간행한 목판본이 있다. 목판본은 1992년 4월 20일 보물 제1132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상하권 1책이 각각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1900년경에 초대 프랑스 공사이었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1853~1922)가 상하 두 권으로 되어있는 직지의 하권을 수집하여 프랑스로 가져간 것입니다. 플랑시 공사의 아버지는 프랑스 신비주의 학자이며 1818년 처음 출판한 지옥 사전(Infernal Dictionary)의 저자인 쟈크 플랑시(Jacques A,S,C,dePlancy,1793~1881)입니다.


플랑시가 수집하여 프랑스로 가져간 ‘직지’에는 책의 표지에 1377년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펜글씨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렇듯 분명하게 ‘직지’의 소중함을 인식한 그가 1911년 고서 경매에 책을 위탁하여 프랑스 유명 수집가 베베르(Eugene Vever,1854~1942)가 당시 180프랑에 낙찰하였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가 받았던 대접입니다. 이렇게 ‘직지’를 소장하게 된 베베르가 세상을 떠난 후 유언에 따라 1952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되어 소장된 것입니다.


플랑시 공사는 당시 한국에 부임하면서 통역사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1865~1935)과 함께 왔습니다. 이 쿠랑이라는 사람이 2년여 동안 서울에 체류하면서 당시 서울의 이야기들을 담아 1900년 프랑스에 소개하였던 책 ‘서울의 기억’ 저자입니다. 이러한 쿠랑이 1901년 연이어 한국서지(韓國書誌-Bibliographie Coreenne)라는 놀라운 저서를 1904년 증보판까지 총 4권의 저서를 출판합니다. 이 책에는 ‘직지’ 보다 145년 전인 고려 시대 1232년에 제작된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기록으로만 전해오는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에서부터 3,821종의 도서를 9개 항목으로 분류한 책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 근대 서지학의 기틀이 2년여의 짧은 기간 동안 통역사로 체류하였던 프랑스 언어학자에 의하여 정리되었다는 것입니다.


쿠랑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서 약탈해간 도서와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우리나라 도서들을 세밀하게 조사하여 오늘날에도 가장 소중한 연구 자료를 남긴 것입니다. 또한, 그는 서양 최초로 1898년에 광개토대왕비 연구 논문인 ‘중국 소재 고구려 비’ 를 발표 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한국사’와 ‘한국 경제사’ 원고가 발견되어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며 서지학자이었으며 파리국립대학 교수를 역임한 앙리 장 마틴(Henri-Jean Martin,1924~2007)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최초로 발명한 금속활자 인쇄술은 구텐베르크의 방식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기술이 구텐베르크에게 전해왔을 개연성이 높다,’



[Science Times, 2015.12.11.]


금속활자란 ‘문자나 기호를 네모 형태로 이루어진 각각의 금속 조각 윗면을 양각, 즉 볼록 튀어나오도록 주물로 만든 것’을 말한다. 금속활자는 목판활자에 비해 경도와 내마모성이 뛰어나야 하고, 낮은 변형률과 비수축성도 월등해야 한다.


이 같은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구텐베르크는 수 없이 많은 실험을 통해 납(Pb)과 주석(Sn), 그리고 안티모니(Sb)의 합금으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구성비는 납 60~70%, 주석 10~20%, 안티모니 20~30%였는데, 오늘날 일반적인 활자 합금비율이 납 80%, 주석 3%, 안티모니 17%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의 뛰어난 구성비를 자랑한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금속세공사에 불과했던 구텐베르크가 어떻게 이처럼 뛰어난 주물 기술을 익혔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한다. 혹시 누구에게 전수받은 것은 아닐까? 이 같은 의문에 대해 단서를 제공한 사람이 있다. 바로 미국의 전 부통령인 앨 고어(Al Gore)다.


얼마 뒤 스위스의 인쇄박물관도 고어 전 부통령의 발언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다.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서양의 교황 사절단이 고려를 방문한 뒤 얻어 온 기술이라는 것. 사절단이 고려를 방문하고 돌아올 때 금속활자의 그림과 설명도 같이 갖고 왔는데, 구텐베르크가 그들로부터 금속활자에 정보를 얻었음이 확실하다는 내용이었다.



[한겨레, 2008.5.2.]


“서양에서는 인쇄술을 최초로 발명한 것이 구텐베르크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은 교황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하여 얻어간 기술이다.”“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할 때 교황 사절단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사절단에는 구텐베르크의 친구가 있어 조선을 방문하고 인쇄 기술과 관련한 기록을 가져왔다.”앨 고어 미국 전 부통령이 서울 디지털 포럼 2005에서 한 기조연설을...


1452년에 ‘신원이 그 이상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추기경의 소개로 교황 니콜라우스 5세를 알현하고 ‘42행 성서’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음을 고해 금속활자의 완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레버를 움직이면 판이 자동으로 종이를 밀어주는 방식의 인쇄기를 설계한 바 있다.

나중에 값싼 포켓본을 개발해 르네상스 시대 출판왕이 된 알도 마누치오는...

이란에는 철제금속 인쇄기를 발명했던 가차투르 바르다페트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이란의 구텐베르크라 일컬어진다 한다.



[연합뉴스, 2022.1.6.]


'금속활자 길, 활자 로드를 찾아서'라는 이름의 캠페인으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 뉴욕타임스 기사, 존 홉슨 영국 셰필드대 교수, 영국의 역사학자 헨리 허드슨 등이 '직지가 유럽으로 전파됐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 내용을 4장의 포스터에 담았다.


첫 번째 포스터에는 앨 고어 전 부통령이 2005년 서울에 열린 디지털 포럼에서 한 연설을 소개한다.

그는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기술"이라며 "나는 이러한 사실을 스위스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됐다. 그 사절단은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의 여러 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고 밝혔다.


두 번째는 (영국 역사학자 헨리) 허드슨이 '유럽과 중국'(1931년)이라는 저서에서 "구텐베르크의 독자적 발명일 가능성은 적으며, 한국의 금속활자 인쇄술의 영향을 받아 도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기록한 내용을 담았다.


2001년 1월 27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역사는 구텐베르크에게 너무 관대했는가'라는 제하의 기사 내용은 세 번째 포스터에 담았다.

이 신문은 "구텐베르크가 결국 금속활자 인쇄술을 창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이는 인쇄 역사를 다시 쓸 수 있는 발견이라 할 수 있다"며 "한국인들은 금속활자를 만들기 위해 모래 주형을 사용했고, 이미 최소 30년 이상 책을 대량생산했다"고 적었다.


존 홉슨 (영국 셰필드대) 교수의 2014년 대구 MBC 인터뷰 내용도 포스터에 실었다.

그는 '구텐베르크, 고려를 훔치다'라는 특집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보다 많은 한국인은 한국의 역사를 연구해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한국에서 얻은 것이 맞는지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 2016.10.2.


지금까지 한반도를 방문한 첫번째 서양인은 스페인의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인 1593년 12월 왜군을 따라 조선 땅을 밟았다.

그러나 이 기록이 수정될 운명에 놓였다. 바티칸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1333년(충숙왕 복위2년) 로마 교황 요한 22세가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한다”는 친서의 필사본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의 제작팀과 세계종교평화협의회측이 각기 다른 경로로 확보한 라틴어 친서는 경천동지할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아직 교황의 친서가 완전 공개되지 않았다.


“존경하는 고려국왕께…”로 시작하는 서한은 “고려왕도 기독교로 개종하라”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잘 대해줘서 고맙다” “하느님을 잘 섬겨 평화로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라틴어 전문가들의 고증을 거쳤다는 우광훈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은 더욱 놀라운 내용을 전한다.


요한 22세가 4년 전인 1329년 선종한 원나라·고려 담당 주교(몬테코르비노) 후임으로 신임 니콜라스 사제를 보내면서 ‘신임 주교 또한 괜찮은 사람이니 고려왕께서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이 친서가 충숙왕에게 전달됐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실이라면 한국교회사를 다시 써야 한다. 14세기에 고려 담당 주교가 오갔고, 고려에 그리스도 신자가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2005년 서울디지털포럼에 참석한 앨 고어 전 미국부통령은 “스위스 인쇄박물관에서 들었다”면서 당시로서는 얼토당토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구텐베르크는 고려를 방문해서 인쇄술 기록을 가져온 교황청 사절단 친구를 만난 뒤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번 취재결과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만들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1444년 아비뇽의 인쇄업자인 왈드 포겔이라는 인물이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확보했습니다.”


아비뇽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바티칸에 가지 못한 교황 클레멘스 5세가 1309년부터 임시 교황청으로 사용한 곳이다. 이후 1376년까지 7명의 교황이 이곳에 머문다.


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은 <남명천하상송증도가>이다. 책의 서문을 보면 고려 무인정권의 실세인 최이(?~1249)가 “이 책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으니 주자본(鑄字本·금속활자본)으로 판각한다. 기해년(1239년)”이라고 기록했다. 지금은 이 책의 목판본만 전해지고 있다. 또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1234~1241년 사이 강화도에서 (나라의 제도와 법규를 정할 때 참고했던) <고금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그저 기록만 존재할 뿐이다.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은 1377년(공민왕 13)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다.



[science times, 이성규, 2015.7.6.]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12세 때부터 인쇄소 식자공으로 일한 마크 트웨인은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했다. 그가 1883년에 발표한 ‘미시시피에서 있었던 일’이란 작품은 미시시피강 주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학과 유머를 곁들여 그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미시시피강에서 뛰놀며 자란 그에게 이 작품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작품은 바로 전 세계에서 타자기로 쓴 최초의 문학작품이기 때문이다. 한때 인쇄소 식자공이었던 그는 인쇄기 소리처럼 요란한 타자음을 내는 타자기로 마치 인쇄하듯이 이 작품을 써내려갔다.


타자기가 처음 발명된 것은 1714년 영국의 헨리 밀이라는 사람에 의해서였다. 그는 시력 장애를 가진 이들을 도울 목적으로 타자기를 만들었으며, 영국 정부로부터 특허장을 받았다. 1829년엔 오스틴 바트, 1833년엔 프리젠도 타자기를 만들어 특허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타자기의 발명자로 기억되고 있는 이는 52번째 타자기 연구가인 미국의 크리스토퍼 숄즈이다. 그는 1868년 잉크 리본을 이용한 타자기로 특허를 받았으며, 그로부터 특허권을 구입한 ‘레밍턴’ 사가 1874년에 출시한 타자기가 바로 마크 트웨인이 ‘미시시피에서 있었던 일’을 집필한 도구였다.


숄즈가 타자기의 발명자로 기억되는 것은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타자기의 원리를 그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발명된 타자기들은 실용화될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숄즈의 특허가 의미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쿼티’ 자판 덕분이다.


밀워키에서 신문 편집자 겸 인쇄기술자로 일하던 숄즈는 동료와 함께 ‘책 페이지 번호달기 기계’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번호달기 기계로 숫자와 함께 글자까지 쓸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보자는 동료의 제안에 그는 타자기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는 헨리 밀과 오스틴 바트, 프리젠 등 선배 발명가들이 남긴 자료를 이용해 1868년 실용 타자기의 특허권을 취득했다. 이 타자기 자판은 알파벳 순서에 따라 2개의 열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자판과 활자를 이어주는 쇠막대가 자꾸 휘어지는 고장이 발생한 것. 원인 파악에 나선 그는 사용자들의 타자 속도가 너무 빠른 게 문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활자와 연결된 쇠막대가 종이를 때린 뒤 제자리로 돌아오기 전에 다른 글자를 누르다 보니 쇠막대끼리 서로 엉켜서 고장이 난 것이었다.


그 같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1873년에 숄즈가 내놓은 해법이 바로 ‘쿼티’ 자판이었다. 그는 가장 많이 쓰이는 알파벳의 글쇠를 다른 손가락에 비해 사용이 불편한 넷째 및 새끼손가락으로 쳐야 하는 위치해 배치했다. 즉, 타자 속도를 느리게 함으로써 쇠막대의 고장 방지법을 찾아낸 셈이다.


이 자판은 왼쪽 상단에 나란히 배열된 알파벳 ‘Q, W, E, R, T, Y’의 이름을 따서 ‘쿼티(QWERTY)’라고 불린다. 이 같은 다소 어이없는 해법이 적용된 것은 자판의 배치만 바꿈으로써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숄즈로부터 1만2000달러에 특허를 사들여 레밍턴 사가 출시한 타자기는 사용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사무실의 필수 품목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그로 인해 타이피스트라는 신종 여성 직업까지 등장했으며, 정밀기계공업의 발전 및 통신인쇄기능의 신속화를 이끄는 혁신적 도구로 자리잡아갔다.


1932년 미국의 오거스트 드보락은 속도가 느린 ‘쿼티’ 자판의 단점을 개선한 새로운 자판을 발명했다. 이 자판은 모음 및 자주 사용하는 자음의 글쇠를 중앙에 배치해 타자 속도를 30%가량 높이고 타이핑에 드는 힘을 줄인 게 특징이었다. 하지만 이미 쿼티 자판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데는 실패해 상용화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말았다.


한때 시대를 뒤흔든 세기의 발명품이었던 타자기는 1970년대 이후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면서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개인용 컴퓨터(PC)의 보급으로 타자기 수요는 급격하게 줄어들었으며, 1995년 세계 제일의 타자기 업체로 군림하던 미국의 스미스 코로나 사가 파산했다.


1996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타자기 생산이 중단됐다. 전자문서시스템이 널리 퍼진 2011년에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타자기를 생산하던 인도 뭄바이의 ‘고드레지 앤드 보이스’라는 회사마저 문을 닫았다.


그런데 2013년 7월 러시아 연방경호국은 기밀문서 작성시 컴퓨터 프로그램 대신 재래식 타자기를 사용하기 위해 20대의 타자기를 새로 구매했다고 밝혔다.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까닭은 스노든의 폭로로 드러난 미국 정보기관의 불법적 정보수집 활동 때문이었다. 이후 러시아 정보기관 등에서는 많은 문서가 타자기로 작성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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