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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Aug 13. 2023

사마광의 물항아리

조영필

사마광(1019-1086)은 자치통감을 저술한 중국 송대의 학자이자 재상이다. 그가 어렸을 때(7살) 친구들과 함께 정원에서 술래잡기 등을 하며 놀고 있었다. 정원 안에는 돌을 쌓아 만든 돌산이 있었고 그 돌산 아래에는 어른 키만한 항아리에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한 아이가 숨을 곳을 찾다가 돌산에서 미끄러져 항아리에 빠졌다. 아이들은 모두 당황하였으며 어떤 아이는 울었고 어떤 아이는 소리쳤으며 어른을 찾으러 뛰어갔다. 어른들이 달려와 주변의 사다리와 밧줄을 집어 던졌으나 아이는 정신없이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그때 어린 사마광은 돌 하나를 들어 항아리를 맞춰 때려 부셨다. 항아리 속 물은 흘러나왔고 물 항아리에 빠진 친구를 구할 수 있었다. 이는 유명한 파옹구우(破甕救友)의 일화이다.


이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어린 사마광의 비범함을 칭송한다. 그런데 나는 항아리의 자산적 가치를 생각해본다. 당시 그런 항아리는 매우 귀한 물건으로 아마도 사람들은 그 항아리를 쉽게 깨서는 안될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 대상을 깰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뒷감당할 수 있는 그의 가문의 힘일까? 아니면 그가 세상물정을 모를 만큼 어려서 가능했을까?


나에게 아찔했던 한 순간이 떠오른다. 90년대 서울에 엄청난 비가 쏟아질 때이었다. 그때 회사는 강북에 있었고 우리집은 강서에 있었다. 당시 나는 운전도 서툴 때라, 비가 많이 오는 밤에는 운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 일찍 가야지 하고 다짐하였는데 그날따라 또 회사에서 이것저것 밀린 잡무를 처리하느라 어둑해져서야 회사를 나서게 되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앞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이드 미러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비가 쏟아지는데도 나는 앞의 양측 유리창을 모두 열고 비를 흠뻑 맞으면서 운전을 해야 했다. 항상 가던 88고속도로로 갔어야 했는데, 행선이 꼬이다 보니, 강변북로로 진입하게 되었다. 당시에 가양대교는 아직 없었고, 성산대교가 우리집에 갈 때 강을 건너야 하는 마지막 다리이었다.


그런데 아뿔사 성산대교를 그만 지나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행주대교까지는 가야 돌아올 수 있으려니 했다. 그런데 한참 가는 중에 도로 밑으로 유턴하는 길이 갑자기 보이는 것이 아닌가? 진입하였는데 물이 정말 바퀴만큼 올라왔다. 엔진이 꺼지는 것이 아닐까 바로 걱정이 되었는데 이제는 차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전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대로 전진하는데 중간쯤에서 맞은 편으로 화물차 한대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쪽으로 빠져나갈 수 있겠구나 하는 맘에 겨우 안도하면서 그 유턴 지하도를 빠져 나오는데 간이 콩알만해졌다. 겨우 험로를 뚫고 밤 늦게 집에 들어왔는데, 잠꾸러기 나의 아내는 우리의 첫 아기와 함께 세상 모르게 쿨쿨 자고 있었다.


이후 집을 도봉구로 옮겼는데 그곳엔 또 동부간선도로가 있다. 수해가 날 때면 갑자기 동부간선도로에 삽시간에 물이 덮쳐 차들이 물 속에 잠기곤 하였다. 만약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나는 과연 차를 포기하고 황급히 대피할 수 있을까? 항상 나는 생각해왔다.


사마광의 파옹구우 일화에서 사람들은 우리 사고 속에 숨은 고착과 고정관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나는 항상 생각한다. 정말 포기하기 쉽지 않은 무언가를 포기하면서까지 위기를 돌파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게 하는 것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오히려 나는 미리 쉽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방도를 찾으려다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왜냐하면 나는 어려서부터 자원이 부족한 나라의 가난한 가정에서 아끼는 것의 소중함을 먼저 배웠기 때문이다.


인생의 정답은 없다. 살아남아서 그나마 이야기는 계속된다.

  


Note:

최근 중국의 한 학자가 항아리의 모양과 제작과정 등의 부분에서 '사마광의 파강(砸缸)'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것은 송대의 물독은 아이를 익사시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항아리는 중국 고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용기로 바닥은 좁고 위쪽 위는 넓으며, 입구 또한 넓었다. 크기는 다양하여 작은 항아리는 장식품으로 실내에 두는 경우가 많았고, 큰 항아리는 물 항아리로 정원 중앙에 두었다. 고궁의 태평항아리는 깊이가 비교적 깊은 편에 속하는데, 입구가 1.6m, 높이가 1.2m이다.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송대 항아리의 높이는 1m를 넘지 않았다. 항저우 백마항구 남송제약방터에서 출토된 항아리는 입구 1m, 높이는 0.8m였으며, 송대 도자기 가마터에서 출토된 항아리 역시 그보다 작은 편이다. 따라서 송나라 때 항아리에 어린이가 빠져 익사할 가능성은 그다 높지 않다.*


*1m 높이이면, 어린 아이가 익사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게다가 옛날 사람들은 지금의 사람보다 더 작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른 학자가 중국 남송의 혜홍 스님의 시 <冷斋夜话(냉재야화)>에 나오는 ‘활인수단活人手段’의 이야기를 찾았다. 이는 지금까지 전해오는 ‘사마광의 파강(砸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사마광이 깨뜨린 것을 항아리(缸)가 아닌 독(瓮)이라고 부르는 점이 다르다.


독(瓮)은 항아리와 비슷하나 배 부분이 넓고 각도가 크다. 또한 항아리는 입구가 바깥쪽으로 열려 있는 반면 독은 입구가 안쪽으로 수납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독은 구조가 특이하여 안쪽에 동물을 넣으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여, 옛사람들은 독 안에 뱀을 기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일부 학자는 사마광의 이야기가 ‘파강(砸缸)’이 아닌 ‘파옹(砸瓮)’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사마광의 파강(砸缸)’의 이야기는 옛날부터 민간에 동요나 구어로 전해 내려왔고 이것이 청나라 광서제 30년 10월에 출판된 <최신 초등학교 국문 교과서> 제 2권에 나오면서 내용이 단일화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항아리로 표현이 바뀌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이상 네이버블로그 인민망 2019.5.2.; 원문출처: 서안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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