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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un 30. 2023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영필

내가 좋아하는 시인 기형도의 <가는 비 온다>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끝난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중략)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 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가랑비에 옷 젖는 트리즈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느 회사가 새로운 기계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곧바로 공장은 예기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다. 이 기계의 한 부품을 특별한 강철판으로 만들어야 했다. 강철판을 섭씨 1200도까지 전기로 가열해야 했다. 그런 다음 가열된 판을 필요한 형태의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압착기에 올려놓았다. 공정 중에 강철판이 섭씨 800도 이상으로 가열되면, 공기의 해로운 영향 때문에 손상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책임자는 즉시 회의를 소집하였다. "... 강철판을 섭씨 1200도까지 가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철판을 만들 수 없습니다. 동시에 표면손상을 막기 위해서는 섭씨 800도 이상으로 강철판을 가열할 수 없습니다." ... 젊은 엔지니어 중 하나가 말하였다. "중간 온도인 섭씨 1000도로 강철판을 가열합시다." "그것은 좋지 않습니다." 나이든 숙련자가 반대했다. "허용할 수 있는 온도 이상으로 여전히 가열하기 때문에 강철판은 손상될 것입니다. 또한 온도가 충분히 높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형태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발명가가 나타났다.

"나에게 해결책이 있습니다." 발명가가 말하였다.

발명가가 제시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문제를 처음 접하였을 때, 내게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저렇게 해도 안된다는 데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일까? 그러다가 심리학자 칼 던커(Karl Duncker)가 제시했다는 다음 문제를 접하게 되었다.**


당신은 의사다. 당신 앞에는 위에 악성 종양이 있는 환자가 있다. 이 환자를 수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종양이 제거되지 않으면 이 환자는 사망하게 된다. 그런데 이 종양을 파괴할 수 있는 레이저가 최근 개발됐다. 만일 레이저가 충분한 강도로 한 번에 종양에 도달하게 되면 그 종양은 제거된다. 하지만 강한 레이저가 종양에 도달하게 되면 거기에 도달하기 전까지 통과하는 다른 신체 부위도 마찬가지로 파괴된다. 반면 낮은 강도로 종양에 도달하면 다른 신체 조직은 피해를 보지 않지만, 종양도 제거되지 않는다. 건강한 다른 신체 조직을 파괴하지 않고 종양을 제거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겠는가? (Duncker, 1945, pp. 307 - 308)


첫 번째 문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역시 답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세 번째 문제를 또 접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지크와 홀리오크(Gick & Holyoak)가 제시한 문제라고 한다.


옛날 어느 나라에 독재자가 있었다. 그는 나라 가운데 위치한 튼튼한 요새에 살고 있었다. 요새 주변에는 농장이나 계곡 등이 있으며, 요새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어느 장군이 독재자를 제거하려는 마음을 먹었다. 자신의 모든 병력을 투입하면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독재자가 여러 갈래 길에 지뢰를 설치 놓았다. 이 지뢰는 적은 수의 사람들은 안전하게 피해 갈 수 있지만 많은 병력이 지나가게 되면 폭파된다. 지뢰는 길과 주변 마을까지 파괴할 정도로 강한 것이다. 적은 병력으로는 지뢰는 피할 수 있으나 요새를 함락시킬 수 없고, 많은 병력은 지뢰 때문에 손실이 클 것이다. 고민하던 장군은 고심을 거듭하다 묘안을 생각해낸다. 어떻게 하였을까?  (Gick & Holyoak, 1980, p 351)

                    

나는 이 문제는 쉽게 풀었다. 그렇게 되니 앞의 두 번째 문제도 금방 풀렸다. 그리고 첫 번째 문제도 풀 것 같은 자신감은 들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첫 번째 문제는 전기의 과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풀 수가 있는 문제였다. 만약 그러한 이론을 모른다면, 전기로 가열을 하고 있는 점에 특히 주목하여 이와 관련한 과학원리를 조사하면 된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은 열자(列子)의 탕문(湯問)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 노인이 산을 평평하게 해서 길을 내고자 하였다. 모든 사람이 비웃었지만 노인은 굴하지 않았다. 노인은 자신의 당대에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자손손이 계속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천제가 감동하여 노인이 길을 내고자 한 두 산을 옮기도록 하였다.


경제학자 알프레드 노스는 각 사회의 빈부의 원인을 알고자 하였다. 그는 어떤 나라에서는 자본이 축적되고 기술이 혁신되는데 왜 다른 나라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지에 대해 밝혀야 한다고 보았다. 노스는 그 근본원인이 생산요소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결합하는 메커니즘 즉 제도의 효율성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효율적인 제도란 개인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에 근접하도록 개인의 창의성을 유도하는 사회적 인센티브의 구조이다. 그 좋은 사례는 특허제도이다. 특허는 발명자에게 배타적인 경제적 권리를 부여하면서도 그 발명의 기술적 내용은 공개하도록 하여 혁신을 개인에서 사회전반으로 확산시킨다. 즉 사회에서 제도라는 혁신에 대한 인센티브 구조의 합리성 여부가 각 사회별 성공 여부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경제학의 교훈을 개인에게 적용해본다면 그것은 아마 습관일 것이다. 처음에는 작은 노력이라도 좋은 행동을 거듭하면 습관이 되고 이러한 습관은 훗날 저항하기 힘든 강력한 유혹에도 초연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동시에 몸을 아끼지 않는 선행이나 조직을 위한 헌신도 가능하게 된다. 이때 작은 것이 그냥 모여서 큰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옳은 방향성이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정확한 목표를 선택하고 그곳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은 전략의 핵심이며, 찰나에 불과한 인간 조건의 유일한 돌파구이다. 우공이산의 고사에서 보듯 사람들이 비웃는 곳에 지혜는 살고 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좋은 생각의 이야기에 빠져 걷다 보면 어느날 눈과 귀를 가리우던 험준한 산이 사라진 것을 보게 될 것이다.



Note:

*겐리히 알트슐러, 그러자 갑자기 발명가가 나타났다, 인터비젼, 2005, pp. 51-52.

**던커의 문제와 지커와 홀리오커의 문제는 aistudy.com/cognitive 에서 참조(John R. Anderson (이영애 역),  인지심리학과 그 응용 Cognitive Psychology and Its Implication (4th ed), 1995, Page 243~278,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0), 그리고 mind-journal.com, 김경일, 2019.7.10.도 참조함.


종양 레이저 문제와 독재자 요새 문제는 각각 따로 알게 되었으나, 유사한 문제로 여겨져 단계적인 문제풀이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이 글을 쓰면서 조사해보니, 지커와 홀리오커가 이미 그런 목적으로 구상한 이야기이었다.


독재자 요새문제는 블록체인의 작업증명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비잔틴 장군 딜레마와 서사 배경이 유사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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