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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un 05. 2024

바다의 늑대

라스브라운 워스

라스브라운 워스, <바다의 늑대-바이킹의 역사>, 에코리브르, 2018.7.30.



01 본국의 바이킹


... 스칸디나비아는 펠트, 양질의 호박, 어마어마한 철광상 같은 방대한 자연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는 본래 1세기에 대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가 붙인 이름이다. 그는 스웨덴 최남단을 섬으로 오인하고 거기 사는 부족의 이름을 따서 그곳을 '스카니아Scania'라 불렀다. 그와 동시대인 타키투스Tacitus는 1세기말에 쓴 글에서 그곳 거주민 수이오네스Suiones(스웨덴 사람과 같은 어원)를 "무장이 잘 되어 있으며, 물욕이 많고, 양쪽에 장식을 단 신기한 배를 항해하는 솜씨가 빼어나다......"고 묘사했다.


로마인과 접촉했던 초기 몇백 년 동안 이 '이상하게 생긴 배'가 내려온 이유는 약탈이 아니라 통상을 위해서였다. 그들이 팔려고 내놓은 상품, 특히 멋진 말과 검은 여우 모피는 로마시장에서 값어치가 높았다... 이러한 교역을 통해 라틴문자와 그리스문자에 대한 지식도 함께 들어왔다. 이 문자들은 단단한 표면에 새기는 데 적합하도록 다소 변형을 겪었고 결국 초기 룬 문자의 토대를 이루었다.


로마인은 북방인과 직접 교류하면서 그들의 용맹함을 존중하게 되었다.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글을 쓴 역사가 요르다네스Jordanes는 스칸디나비아인을 "기골이 장대하고 흉포한" 상대라고 묘사했다... 요르다네스는 오늘날의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들어선 30여개 '국가'에 대해 언급했으며, 그 가운데 특히 고트족이 어떻게 로마 제국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들려주었다.


이 최초의 '바이킹' 침략은 육상을 통해 이루어졌고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고트족은 스웨덴 남부에서 흑해로 이주했으며, 3세기에 로마 영토로 넘어왔다. 이들은 378년 아드리아노플Adrianople에서 로마 황제 발렌스Valens를 살해함으로써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채 150년도 되지 않아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대부분의 지역을 정복했다.


로마가 이들 영토의 상당 부분을 되찾아오는 과정을 연대기순으로 기술한 역사가 프로코피우스Procopius는 북방 민족에 대해 일종의 경외감을 담아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은 그들 주위에 살아가는 다른 어느 종족보다 우월하다." 고트족에 이어 더 많은 종족이 이주 대열에 합류했다...


... 대대적인 바이킹의 침략이 가능했던 것은 8세기말엽 조선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바이킹 선박은 로마와 켈트족의 디자인을 본뜬 것이었고, '통상적인 노paddle'가 아니라 '선체에 붙어있는 노oar'를 저어 움직였다... 8세기의 어느때쯤 이들은 용골을 창안해냈다...


바이킹은 이처럼 머나먼 항해를 떠날 때면 운항을 돕기 위해 '조종 노styra bord(steering board)'라 불리는 특수한 노를 사용했다. 이는 선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존재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배를 한층 통제하기 쉽도록 만들고자 배오른쪽 옆 선미 부근에 두었다. 여기서 배의 오른쪽을 지칭하는 '우현starboard'라는 항해가 생겨났다. 반대개념인 좌현port 역시 비록 좀더 간접적이기는 하나 그 기원을 바이킹에 빚지고 있다. 배는 항구에 도착하면 대체로 오른쪽에 놔둔 '조종 노'가 망가지지 않도록 좌측을 붙여서 정박시킨다. 시간이 가면서 '좌현'은 '왼쪽left'이라는 의미로 굳어졌다.


... 해수면에서 미끄러지듯 나아가도록 고안된 롱십은 지중해 선박들에게 필요한 특수 기술 없이도 지역에서 확보한 재료만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바이킹의 롱십은 해양을 횡단하는 큰 배에 달린 용골이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흘수draft(선박이 수중에 떠 있을 때 물속에 잠기는 부분의 깊이)가 얕아서 배를 댈 때 깊은 항구가 필요한 다른 선박들과 달리 사실상 어느 뭍에든 댈 수 있었다. 따라서 롱십은 강 위쪽까지 항해하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일부 롱십은 강들 사이에서 들고 나를 수 있을 만큼 가볍기까지 했다.


... 롱십은 최대 1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지만 외해에서는 15명이 고작이었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4노트까지 달렸으며, 바람이나 해류가 순조로우면 최대 8-10노트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02 샤를마뉴의 눈물


프랑크인이 스칸디나비아와 접촉한 것은 샤를마뉴 시대보다 100여년쯤 앞선 때였다. 바이킹의 모피/ 호박/ 깃털 이불/ 숫돌은 프랑크 왕국의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었다. 네덜란드 상인은 라인강 유역의 도레스타드와 불로뉴Boulogne 부근 캉토빅Quentovic 같은 거대한 제국의 무역 중심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 샤를마뉴가 북해함대를 추가하겠다고 발표하자 덴마크반도의 거주민 대다수는 그가 진짜로 노리는 것이 슐라이피오르Schlei Fjord에서 국경 바로 위에 자리한 덴마크 항구 헤데비임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헤데비는 진작부터 바이킹 상품을 사고파는 중계 무역지로 자리 잡은 상태이며, 규모가 큰 프랑크 왕국의 시장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성장했다. 데인인은 스칸디나비아 최초로 도로 요금소와 화폐 주조소를 설치했고, 활발한 사업을 펼치면서 더 오래된 기존의 무역 중심지를 넘보기 시작했다.


헤데비의 성장을 이끈 주역은 바이킹 군사지도자 구드프레드였다...


구드프레드는 자신이 약탈한 프랑크 마을에서 상인을 잡아오는 식으로 헤데비의 인구를 크게 불려놓았다. 그리고 샤를마뉴의 공격으로부터 헤데비를 지키고자 다네비르케를 쌓기 시작했다. 다네비르케는 위에 목조 방책을 두른 거대한 성곽으로, 결국 유틀란트반도의 목 부분을 가로질러 북해에서 발트해까지 건설되었다.



15 루스인 류리크


... 바이킹은 처음에 원자재를 구하러 이곳을 찾았다. 발트해 연안에 살고 있는 핀족Finns으로부터는 꿀과 밀랍을, 더 북쪽의 랩족Lapps으로부터는 여러 종류의 북극 모피와 호박을 구했다. 오늘날의 러시아 내륙쪽에서 살아가는 슬라브족Slavs은 약탈할 만한 것을 거의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노예로서는 값어치가 있었던지라 스칸디나비아에서 쓰이거나 번화한 남쪽의 노예시장에 팔려나갔다. 바이킹은 이 같은 초기 핀족의 노예 약탈에 동참했다. 핀족이 스웨덴을 지칭하던 이름 루오치Routsi는 점차 루스Fus로 와전되었다...


... 753년 이들은 '스타라야 라도가' 기지를 장악했다. 이 요새는 볼호프Volkhov강 어귀와 이어진 라도가 호수의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었고, 이곳을 통해 러시아의 두 거대 수계 볼가Volga강과 드네프르Dnepr강에 접근할 수 있었다.


두 강 덕택에 스칸디나비아에서 수요가 많은 은과 비단을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었다. 볼가강은 동쪽으로 이슬람세계를 향해 있으며, 드네프르강은 남쪽으로 동방정교회 비잔틴 제국으로 이어져 있었다.


드네프르강 교역로는 더없이 위험천만했는데, 이 강을 최초로 성공리에 항해한 것이 바로 루스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900여 킬로미터의 강은 위험한 폭포 12개에 의해 툭하면 끊어지기 일쑤라 그때마다 부득이 배를 강물에서 끌어내 배와 거기에 실은 화물을 좀더 항해하기 쉬운 하류지점으로 옮겨야 했다. 그러다보면 공격에 노출되기 십상이었다. 페체네그Pechenegs이 거주하는 지역이라서 상당히 풀기가 어려운 문제였다...


반면 볼가강 교역로는 훨씬 단순했으므로 상인들이 더 선호했다... 카스피해로 흘러드는 볼가강 남단의 삼각주 유역을 누비고 다니는 강력한 부족 하자르족의 허락을 받아야 볼가강에서 장사를 할 수 있었다. 하자르족은 8세기에 유대교로 개종한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반半유목 생활을 했다. 이들은 카스피해 부근에 세운 자신들의 수도 아틸Atil을 중심으로 볼가강 남쪽에서 이루어지는 교역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하자르족은 루스인이 북방에서 가져온 상품을 팔 수 있도록 상업지구를 조성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훨씬 더 돈이 되는 이슬람시장에 접근해 그들이 싣고 온 노예를 팔 수 있도록 거들어주었다. 이 불행한 노예들 대부분은 루스인이 오늘날의 러시아에 사는 슬라브족 가운데 잡아온 이들로 결국 바그다드 시장에서 팔려나갔다.


...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루스타Ibn Rustah는 실제로 루스인이 확보하려고 애쓴 것은 오직 노예뿐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루스인은 슬라브인을 잡아오기 위해 배를 타고 항해에 나섰다"고 썼다.


아랍인은 루스인에 대해 양가감정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장대하고 기묘한 자들이었음에 분명했다. 여행가 이븐 파들란은 그렇듯 완벽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은 일찍이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는 "그들은 대추야자처럼 키가 크고 금발에 혈색이 좋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들을 "신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더러운 종족"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적어도 이슬람 세계의 기준에서 볼 때는 그랬다.


이때쯤 루스인은 하자르족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족장은 첩을 여러 명 거느렸으며 하자르족의 복식과 의례를 따랐을 뿐 아니라 스스로를 칸Khan이라고 불렀다.


바그다드의 힘은 쇠약해졌지만 하자르족의 권력은 기울지 않은지라 루스인이 침략을 하려면 그때마다 우선 그들에게 허락을 구해야 했다. 이 사실은 913년 감행된 악명높은 습격에서 너무도 자명해졌다..


... 바쿠는 종교적 중심지이자 나프타의 주요산지였다. 나프타는 '그리스의 불'의 주요 구성성분이자 비잔틴 제국과 무어인의 에스파냐에서 쓰이는 전쟁기구의 원료였다. 이 도시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고대의 언젠가 점화한 적이 있는 천연가스 간헐천이 있었다. 불을 숭배하는 페르시아인은 신전을 하나 세웠고, 그 신전 덕택에 수년 동안 멀리 인도에서 순례자들이 교역을 겸해서 찾아왔다. 페르시아인은 이 도시의 부 상당 부분을 일구어낸 장본인이었다.


... 862년 노르드 이름 에리크의 한 형태인 류리크라는 이름을 가진 바이킹이 라도가 호수 남쪽의 요새화한 시장 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이 도시를 홀름가르드Holmgard라고 불렀는데, 오늘날에는 노브고르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류리크는 드네프르강에 안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고 자신의 볼호프강 기지에서 아스콜드Askold와 디르Dir라는 귀족을 남쪽으로 보냈다. 바닥이 절벽으로 솟아있는 드네프르 강의 서쪽 강둑에 들어선 키예프시는 그 아래쪽 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하자르족의 최전방 기지였고, 류리크는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 사람들을 보냄으로써 루스인이 남쪽으로 관심을 돌리도록 유도했다...


... 6세기에 비잔틴 제국 사람들은 시설을 둘러본다는 명목으로 수도사 두 명을 중국에 보내 비단제조의 비밀을 몰래 캐왔다...


루스인이 바그다드에서 사들여오는 비단의 가격은 줄곧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비용에 이윤을 붙여서 파는 중개인이 없었으므로 루스인이 본국에서 그것을 되팔 때 얻을 수 있는 이윤은 크게 불어났다. 이 교역로는 위험했지만 루스인은 누구에게도 허락을 구할 필료 없이 자유롭게 그 교역로를 개발하는 게 가능했고, 그럼으로써 그에 따른 과실을 마음껏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바이킹은 거대 도시라는 의미의 미클라가르드라 불렀다-은 분명 위험천만한 급류와 용감하게 맞서고 그 과정에서 미개인들과 싸워볼 만큼 가치 있는 도시였다... 콘스탄티노플을 접촉한 데 대한 최초의 기록은 838년 루스인 사절단에 관한 것이었다...


... 860년 6월 18일 막 해가 질 무렵 루스인 함대가 콘스탄티노플의 거대한 성벽앞에 다가섰다...



16 미클라가르드


... 비잔틴 제국의 사절단이 키예프로 파견되었고, 양방 사이에 루스인이 콘스탄티노플에서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 류리크가 이끈 국가의 장래는 그가 통치했던 노브고르트를 중심으로 펼쳐지지 않았다. 그를 계승한 헬기는 다시 키예프로 이주했고 '루스인 대공Great Prince of the Rus'이라는 직함을 얻었다...


헬기는 907년경 중요한 군사 작전인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공격을 감행...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자신의 상인들에게 유리한 지위를 보장하는 공식적 조약이었다... 루스인 상인이 어떻게 할지에 관한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그들에게 특전을 부여한 장소를 제공했다. 특정 세금이나 의무는 면제해주었지만, 팔 수 있는 품목에는 엄격히 제한을 두었다. 비잔틴 제국 사람들은 루스인이 그 도시의 공중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합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으로 루스인에게 용병으로서 복무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 루스인은 907년 맺은 조약을 통해 몇 년에 한 차례씩 공격을 가하면 더 나은 조건으로 재협상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941년과 944년 두 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플을 습격했다.


... 비잔틴 제국 사람들은 '그리스의 불'을 질그릇에 담아 보관했다...


... 잉그바르가 공격했을 때 제국함대는 루스인의 선박을 수면 아래에서 불태우려고 물 속에 잠겨있는 놋쇠관을 사용했다...


... 루스인은 결국 용병으로 선택되었으며, 988년 황제 바실리우스 2세Basil II는 특수군을 창설했다...


금전에 목을 맸던 북유럽인들에게 바실리우스 2세보다도 더 후한 재정관은 없었다. 이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그때부터 '맹세한 남성'이라는 의미의 바랑기안Varangian으로 통했다...



17 비잔티움의 매혹


... 945년에 체결된 조약을 계기로 루스인에게 콘스탄티노플의 문호가 열렸고, 루스인은... 결국에 가서는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기독교 전파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친 계기는 940년대에 '그리스의 불'에 밀린 루스인의 대참패였다...


올가는... 955년경 콘스탄티노플로 여행을 떠났다... 금빛의 아야소피아 성당에서 콘스탄티노스7세가 그녀의 대부로 참석한 가운데  세례식이 거행되엇다...


... 루스인의 바이킹 기원은 비잔틴 기원으로 서서히 대체되었다...



18 루스인에서 러시아인으로


스비아토슬라프가 처음 진군한 것은... 하자르족을 상대로 한 전투였다. 6년을 끈 잔혹한 군사작전을 통해 스비아토슬라프는 그들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하자르족의 수도 아틸을 약탈한 것이 그 정점이었다... 10세기의 아랍 작가 이븐 하우칼Ibn Hawqal은... "포도 알 하나, 건포도 알 하나 남지 않았다. 나무에 이파리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다."


블라디미르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장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988년 황제 바실리우스 2세가 바랑기안 6000명을 요청하며 그 보답으로 자신의 누이와 혼례를 치르게 해주겠다고 제의한 일이었다. 먼저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다는 조건은 아마 블라디미르에게 크게 곤란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야망 넘치는 전제군주로서은 자기가 이교도라는 사실이 되레 불리했다... 오딘은 최고신일지는 모르지만 전지전능하다고 보기는 어려웠고...


블라디미르는 진작부터 토르를 최고신으로 밀면서... 이 계획은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고 확신한 블라디미르는 세계의 주요 종교, 즉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사절들을 파견했다. 먼저 이슬람은 제외했다. 성인이 되면 할례를 해야 한다는 관습도 소름끼치는데 거기다 술마저 금기시한 탓이었다. 유대교 역시 배제했다. 유대인은 고향이 없었기 때문인데, 중세인의 눈으로 볼 때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남은 것은 기독교뿐이었다. 그렇다면 서방의 가톨릭 교리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동방정교회의 교리를 따를 것인가가 문제였다... 서방의 가톨릭을 맡은 사절들은 신성로마제국을 찾아갔고 땅딸막하고 칙칙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를 보았다. 하지만 동방정교회를 담당한 사절들은 아야소피아 대성당에서 성찬식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했다...


... 비잔틴 제국의 전제정치는 신성한 권위에 관한 이러한 믿음 위에 구축된 것이었다... 신은 천사들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그들의 협조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이것이 바로 블라디미르가 키예프에 구축하고 싶었던 모델이다.


... 블라디미르의 딸 안나Anna는 프랑스의 앙리 1세Henry I와 결혼했고, 왕궁의 관료주의에 정통해서 아들 필리프Philip를 대신해 섭정을 펼치기도 했다...


... 키예프에 도착하자마자 처음으로 취한 조치는 옛신들을 모신 성전을 불태운 일이었다. 토르의 목조상은 말 꼬리에 매단 채 드네프르강으로 끌고가 곤봉으로 두들겨 패서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런 다음 도시민 전체가 드네프르강으로 몰려가 대규모 세례식을 거행했다...


블라디미르의 기독교 개종에 따른 가장 극적인 효과는 아마도 기독교와 더불어 키릴 알파벳이 도입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블라디미르의 아들 야로슬라프Jaroslav는 키예프 최초의 법률을 공표했을 때 키릴문자를 사용했으며, 바이킹의 법률이 아니라 비잔틴 제국의 법률을 참고했다.


... 바이킹의 유산은 동로마제국의 문화적 영향력에 의해 서서히 사라졌다. 이 과정은 1472년 마지막 비잔틴 제국 황제의 질녀가 이반 대제Ivan the Great와 혼인하면서 막을 내렸다.



맺음말: 바이킹의 유산


... 북유럽인이 당도하기 전의 잉글랜드는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조직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바이킹은 단 하나의 토착왕국만 빼고 다른 왕국들을 모두 무너뜨림으로써 웨섹스왕국이 단일 국가로 통일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스코틀랜드 역시 바이킹의 약탈로 인해 장기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이득을 누렸다.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던 토착의 픽트인/ 스트래스클라이드인/ 노섬브리아인은 모두 붕괴됨으로써 뜻밖이지만 스코트족, 즉 게일어를 쓰는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영국의 북쪽 3분의 1을 통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 바다늑대들에게는 잔혹한 폭력 이상의 것이 있었다. 이들은 법(이 용어 자체도 옛 노르드어에서 왔다)을 만들었으며, 배심원에 의한 재판이라는 참신한 제도를 잉글랜드에 도입했다. 1세기에 걸친 조선기술의 혁신은 해양을 가로지르거나 피오르와 강 상류까지 항해할 수 있는 멋진 용머리 배의 축조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이들은 바이킹 시대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이 같은 기술적 성취를 통해 바그다드에서 북미 연안에 이르는 정교한 교역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훌륭한 바이킹의 특성은 군사적 기량이나 항해술이 아니라 그들의 놀라운 적응력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오딘 스스로가 "길은 떠나는 사람에게 풍부한 상식보다 더 중요하게 챙겨야 할 짐은 없다"고 조언했다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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