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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un 05. 2024

직물의 기원과 교류

정완섭

정완섭, <직물의 기원과 교류-천연섬유->, 서경문화사, 1997.4.26.



제II장 역사와 시대적 배경

제1절 역사적 배경


... 당시 제 4빙하기에 들어 지구상의 추위를 막기 위해 동굴의 안에서 살며 불을 이용할 줄 알고 또 의복을 몸에 걸치기 시작한 처음이라고 한다.

이때의 의류는 먹기 위해 사냥해서 얻은 짐승의 모피였다... 모피를 조정하는 것은 여자들의 몫으로 모피 안쪽에 남아있는 고기와 지방을 석기로 제거해서 초지에 펼쳐 일광에 널어 말리고 그것을 두들기고 비비고 해서 부드럽게 만들었다.

조정한 모피는 어린아이를 감싼다든가 자신들의 몸에 걸친다든가 또는 동굴내의 습지에 깐다든가 입구에 드리워서 바람을 막기도 하였다. 그때의 유물 중에는 모피를 가공할 때 사용하였던 박피구剝皮具와 뼈로 만든 골침 등이 있는데 이것은 모피를 이어붙이는 데 썼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2절 동서의 교통로


'실크로드'란... 그 조어자는 독일의 저명한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Ferdinand Von Richthofel(1833-1905)'이다.

그는 19세기 후반에 중국각지를 답사하고 1877년부터 <중국china>이란 책을 5권 저술하였는데 제1권의 후반부에서 동서 교섭사를 개관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트랜스옥시아나Transoxiana(시르강과 아무강의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서 고대는 주로 소그드인들이 거주하였다)'와 서북인도로 수출되는 주요 품목이 비단silk이었던 점을 감안해 이 교역로를 독일어로 '제이덴스트라쎈Seidenstrassen'이라고 명명하였다

그후 스웨덴의 '허튼S. Hutton(1863-1952)'와 영국의 '스타인A. Stein(1862-1943)' 등의 탐험결과 중앙아시아 각지에서뿐만 아니라 지중해의 동안에 위치한 시리아에서도 중국의 견직물이 대량 발굴됨으로써 독일의 동양학자 헤르만Herrmann은 1910년에 이 실크로드를 중국으로부터 시리아까지 연장하였다.


1. 최초의 동서 통교로인 스텝로


고대로부터 많은 유목민족들이 이용한 스텝로의 서단은 종전에는 대체로 카스피해Caspian Sea 연안으로 보았으나 여러가지 유물이 고증됨에 따라 지금은 이 길의 서단을 북유럽의 발트해까지 연장시켜 본다...


이 스텝로은 기원전 7세기경에 스키타이인Scytai들이 이 흑해로부터 우랄산맥을 넘어 알타이지방으로의 동방교역을 시작한 때부터 알려졌다.

이 길을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B.C. 484-425)는 <역사>라는 저서에서 '황금의 길', '모피의 길'라고 했을 만큼 중요한 통교로였던 것이다.


2. 오아시스로


... 현존 기록에 의하면 파미르 고원 이서의 서아시아 지대에서는 기원전 6세기에 이미 정비된 교통로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인 다리우스 1세Darius I(B.C. 558-486) 시대에 동은 인도 서북부와 간다라 지방으로부터 서는 이집트, 북은 소그디아나Soghdinaa(구 소련령 서투르키스탄)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는 정연한 교통로가 사통팔달하여 영내 23개주와의 연계가 원활하였다. 심지어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운하까지 만들어서 이집트와 통교하였다.


처음으로 이 오아시스로를 이용하고, 그에 관한 기록을 남긴 사람은 기원전 139-126년, 제1차 서역사행에 나선 전한 무제때의 장건이다.


장건은 장안을 떠나 롱서(현 감숙성 민주)에 이르자 남하한 흉노에 체포되어 흉노에 압송되었다가 도주해 파미르고원을 넘어 대완, 강거를 거쳐 드디어 목적지인 대월씨에 이르렀다. 이 같은 <한서> 서역전에 소개된 오아시스는 북도에 해당된다. 귀로에는 오아시스 남로를 따랐는데 대월씨로부터 대하의 발흐에 도착한 후 거기에서 파미르고원을 넘어 강중(현 청해)을 경유해 장안으로 귀향했다...


3. 해상교류가 활발해진 남해로


... 중세에 이르기까지 이 남해로를 통해 동방의 견, 칠기, 도기, 향료, 차 등이 서방으로 대량 운반되어갔다.


남해로의 시원은 '역사의 아버지'라고 하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Herodotus(B.C. 484-428)가 저서 <역사>Historia에서 언급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남해로 항행의 효시로 보고 있다.


즉 기원전 510년경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조 다리우스 대왕이 그의 부장으로 하여금 인더스강 하구로부터 홍해에 이르는 바닷길을 탐험시켜 2년 반만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후 기원전 325년 9월 알렉산더 대왕의 부장 네아루코스가 인더스강 하구로부터 페르시아만의 유프라테스강 하구에까지 항해한 사실도 전해지고 있다. 한편 동방에 있어서 이 남해로의 이용은 중국 진시대에서부터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진시황(B.C. 247-210)이 중국천하를 통일하여 판도를 남해에까지 펼쳐 번우를 통해 남해무역을 한 흔적을 <사기> 화식열전은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번우番偶는 무역도시로서 거기에서는 주기珠機(온갖 구슬), 서犀(무소), 대모, 과(과일), 포 등 물품이 집산, 교역되고 있었다...

... <한서> 지리지에는 더욱더 명확하게 무역도시인 번우에서 중국상인들이 다량의 서(무소), 상(코끼리), 독모(대모), 주기, 은, 동, 과, 포 등을 교역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 서기 1세기 중엽에 로마의 한 항해사 히파루스HIpalus가 아라비아인들로부터 인도양 계절풍의 비밀을 알아낸 후에 아테네로부터 홍해를 지나 인도양에로 향하는 직항로를 개척함으로써 로마의 대 동방 원거리 무역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었다.


육로로 중국에서 인도로 반출된 견직물이 인도서안으로부터 해로로 로마에 운송되어가기 시작하였다. 서기 70년경에 남해무역에 종사한 이집트 상인 그레코의 저술이라고 전해오는 <에리트라해 안내기the 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에는 당시 홍해, 페르시아만, 인도양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남해무역의 항로, 항구, 운송, 화물에 관한 상세하고도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다.


6세기 그리스의 한 기독교 수도사였던 코스마스Cosmas(후에 이집트에서 승려됨)는 그가 청년시절에 페르시아, 인도, 스리랑카 등지를 편력하면서 해상교역에 종사하였던 일을 글로 모은 <기독교 풍토기>에서 남해요로로서의 사자국(스리랑카, 실론)의 위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스리랑카를 비롯한 인도, 페르시아 및 에티오피아 등 각국 선박들이 항상 내왕하는데 스리랑카에서 출발하는 선박은 대단히 많았다. 이 선박들은 가장 먼 나라, 예컨대 지니체(秦尼策, 중국)나 그와 통상하는 지역으로부터 늘 화물을 운반해 오는데 그중에는 잠사, 가남향伽湳香(최고급의 침향), 정향丁香, 자단紫檀 및 기타 산품이 들어 있다.



제III장 가락바퀴(방추차)


제1절 가락바퀴의 기원과 발달


가락바퀴는 실 제조에 쓰인 방적구의 부품이다. 일본에서는 방추차, 중국에서는 방륜, 방박이라고 한다...


가장 오래된 가락바퀴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지역인 북이라크에서 B.C. 7000년경의 원시농경 유적지인 자르모Jarmo에서 발견되어 조사되었다...

또 이집트에서 B.C. 4500년대의 파이윰Faiyum과 바다리Badari의 유적에서 가락바퀴가 발견되었다.

인도의 인더스강 하류의 B.C. 2500년경의 모헨 조다로Mohen-jodaro 유적에서도 가락바퀴가 조사되었다.

중국에서는 앙소천 유적에서 B.C. 3000년경의 가락바퀴가 조사되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아더 이반스Arthur Evans는 희랍초기의 크레타Crete 문화발굴에서 B.C. 34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방추차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후 수백 년 뒤에는 희랍 전역에 양 사육이 퍼져서 그때까지 아마나 기타 섬유를 가지고 실을 만들던 가락바퀴가 그대로 양모를 방적하는 데 응용되었다.



제IV장 천연섬유의 기원과 문명발상지

제1절 모섬유의 기원


이 대하류역에 펼쳐진 문명을 메소포타미아 문명 또는 바빌로니아 문명이라고 부른다(Babylonia는 '양모의 땅Land of Wool'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펠트Felt는 섬유로 실을 만들어 직조한 직물은 아니지만 가공처리해서 펠트천으로 의복을 만들어입고 모자를 만들어 쓰고 추울 때는 모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섬유로 실을 만들어 그 실로 직물을 직조해서 사용한 것은 아마가 앞서 있지만 최초로 사용한 섬유는 모섬유, 모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절 마섬유의 기원


1911년 Saqqara 유적에서 J.E. Quibell에 의해 발굴된 미이라의 권포 붕대Bandage는 제2왕조(B.C. 3200-2980)의 것이므로 지금으로부터 5000년 이상이 지난 마포이다.


제3절 견섬유의 기원


목면의 시원지는 남아프리카의 모잠비크에서 앙골라에 걸친 총림건조지대이다 인도의 목면은 이 종자가 남아프리카의 동안으로 전해진 것이다...


면의 발상은 인도의 신석기 유적인 모헨조다로 유적과 거의 동시대로 추정되는 페루의 허카프리에타Huacaprieta 유적 등에서 그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면의 재배, 제직 연대가 대단히 길며 또 그 재배지역도 여러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 13세기말엽 마르코폴로는 면을 'Vegetable Wool'이라고 하고 있는데 그것도 목면보다 양모의 역사가 더 오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제4절 견섬유의 기원


견이란 누에가 누에고치Cocoon의 형태로 자기몸을 둘러쌈으로써 만들어진 고체화된 단백질의 분비물로서 매우 가는 섬유의 가닥Strand이다.


... 누에가 만든 누에고치의 가는 실Filament로부터 옷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약 B.C. 2600년경에 중국에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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