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야마 다쿠에이
우야마 다쿠에이, <SEKAISHI WA 99%, KEIZAI DE TUKURARERU(2016) 역사로 읽는 경제 - 경제, 우리가 아는 모든 세계를 움직이는 힘>, 라이프맵, 2017.5.29.
PART 1 경제, 역사의 길 위에서 해법을 찾다
23-/ <시대의 요인과 형태>
고대(-476년까지) 전제국가의 광역통제 경제 농업자본 팽창의 순환
중세(5-14세기) 영방/ 도시 간의 연대경제 상업자본 점과 선, 도시 사이의 네트워크
근세(14-18세기) 국민국가의 결합경제 산업자본 커지는 수익구조
근대(18-20세기) 제국주의의 확장경제 산업자본 K. Pomeranz, The great divergence
현대(20-21세기) 통화팽창의 자기증식 경제 금융자본 자기증식하는 경제
PART 2 고대, 사유재산과 화폐경제의 태동
43-/... 엘렉트럼은 그리스어로 보석 호박을 의미하는데, 화폐의 노란 색깔 때문에 호박금이라 부르기도 했다.
페르시아에서 금과 은의 교환비율은 1:13이었다. 당시 페르시아와 인접한 인도의 GSR(Gold/Siver Ratio)은 1:8로, 페르시아보다 은의 가치가 높았다. 그래서 인도의 상인들은 페르시아에서 금과 은을 교환했다. 결과적으로 페르시아의 은은 인도로 유출되는 한편, 페르시아에는 금이 유입되었다.
그리스의 GSR은 페르시아와 거의 같은 수준인 1:14로 금의 가치가 높았다. 페르시아는 구매력이 높은 금을 넉넉하게 보유해 비교적 싼 그리스의 물자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다. 이와 달리 은광을 소유했지만, 금이 나지 않은 그리스는 은본위제를 시행했다.
1717년 뉴턴은 영국의 GSR을 1:15.21로 책정했다. 이 수치는 '뉴턴의 금은 비가比價'라고 불리며 이후 영국을 비롯한 금본위제 국가의 GSR의 기준이 되었다.
기원전 6세기 중반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라우리온 은광이 발견되었다. 안정적인 은 채굴이 가능해진 그리스는 독자적인 화폐 '드라크마'를 주조했다. drachma는 '쥐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다.
... 기원전 6세기 말경에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금화가 그리스로 대거 유출된 상황에 직면했다...
기원전 483년에 그리스의 라우리온 근처 마로니아에서 또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었다. 은값이 더 떨어지자 페르시아의 금은 계속 그리스로 빠져나갔다. 페르시아는 금화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리스를 정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는 새로운 은광에서 채굴한 은으로 해군증강을 위한 예산에 충당하자고 제안했고, 의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스는 자체 생산된 은 외에도 페르시아에서 대량 유입된 다리우스 금화 덕분에 수월하게 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다.
... 군선에서 노를 젓는 사람으로 빈민들을 고용했다... 전쟁준비는 내수를 확대시킴과 동시에 실업률을 저하시켜 그리스의 경제를 크게 자극하였다. 이런 활기를 띠고 그리스 해군력은 빠르게 강화되었다.
기원전 4세기 무렵 페르시아는 재정난 때문에 상비군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일부 지역에서 그리스인 용병을 싸게 고용했다. 이들 용병을 통해 페르시아의 쇠퇴와 혼란 상황이 고스란히 그리스로 전해졌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은 용병 자격으로 페르시아의 곳곳을 돌아다닌 경험을 <페르시아 원정기Kyrou Anabasis>에 기록하였다.
71-/ ... 기원전 81년 소제昭帝는 유학자를 중심으로 지식인 60여명을 수도로 불러 관리들과 경제정책에 대해 직접 토론하게 했다. 주로 소금과 철의 전매제에 대해 논의되었기 때문에 '염철회의'라고 부른다.
유학자들은 국가가 민간과 이익을 다투는 것은 비열한 일이라고 주장하며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비판했다. 그러자 무제 시대 경제정책 추진에 적극 참여한 상홍양桑弘羊을 비롯한 관리들은 국가의 시장개입에 의해 가격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반론했다. 이에 대해 유학자들은 국가권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해진 가격은 시장의 수급을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열띤 토론의 모습을 환관桓寬이라는 학자가 10권 60편으로 엮은 <염철론>에 기록했다...
... 논쟁은 유학자 측이 우세했지만 국가의 재정난을 구제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에도 무제의 경제/ 재정 정책이 지속되었다.
PART 3 중세, 상업자본과 중상주의의 대두
86-/ 1130년 시칠리아 왕국을 세운 노르만의 왕 로제르 2세는 지중해 너머의 세계에 관심이 많아 이슬람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를 초빙했다. 알 이드리시는 모로코 출신으로 당시 이슬람세력의 지배하에 있던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지리학을 배운 학자였다. 그는 로제르 2세의 요청에 응해 세계지도를 제작했는데, 당대 지도로 가장 정확하다는 평을 받았다.
91/ 라테라노 공의회Lateran Council는 로마의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5차례에 걸쳐 열린 세계교회회의를 말한다.
제1회(1132년)는 교황 갈리스토 2세의 주재로 열린 서방 최초의 공의회였다. 성직서임권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보름스협약을 인가하여...
제2회(1139년)는... 서유럽 전국가들이 참석하여 '프레나리아(완전한) 공의회'라 불렀다.
제3회(1179년)는... 교황의 선거절차를 확정하였다...
[이자를 받는 자는 파문하고, 기독교도의 자격으로 매장하지 않는다고 결의하였다]
제4회(1215년)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소집하였다... 알비파... 등을 처벌하고, 신자는 1년에 적어도 한번은 고해성사와 성체배령을 해야 한다고 규정함과 동시에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명령했다. 이 공의회에는 각지의 주교들만이 아니라 왕후등도 참석한 점이 이례적이다...
[지불기일을 지키지 않은 채무자 때문에 채권자의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 이자(벌금 성격의 연체 이자)를 인정할 수 있다고 결의했다... 이 회의에서 인정한 이자의 상한은 33퍼센트로... // 중세 최고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자금 상환의 지연에 따른 손해배상에 대해 채권자가 채무자와 협정하는 것은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라테라노 회의의 결의안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리를 이용해, 자금을 빌려줄 때 상환기한을 최대한 짧게 설정해서 연체이자를 많이 받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이 이자징수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되었다.]
제5회(1512-1517년)는... 교황청 측의 교권과 프랑스측 정권의 조정을 도모한 정교조약을 인가했다. [이자징수를 해금했다. 이 공의회를 주도한 사람은 메디치 가문의 조반니 데 메디치였다. 피렌체의 황금시대를 구축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인 조반니는 재력을 이용하여 교황 레오 10세가 된 인물이다.]
16세기 중반에는 종교개혁을 이끈 장 칼뱅Jean Calvin이 5퍼센트의 이자징수를 인정함으로써, 영국과 네덜란드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금융업은 더욱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04-/ ... 송나라의 화폐인 동전과 철전은 무겁고 부피가 커서 휴대하기가 불편했다... 쓰찬四川성의 상인들이 교자포交子鋪라는 어음교환서를 만들었다...
... 쓰촨성이나 산시陝西성에서는 동보다 철이 많이 생산되어 철전을 흔히 사용하였다. 하지만 철전은 동전보다 무거워, 교자를 더 많이 이용하였다.
... 송나라는 1023년 교자포의 구제를 위한 방책으로 교자 교환사업을 국가의 전매사업으로 삼았다...
송왕조는 동전과 철전의 태환준비금 36만 관貫에 대해 교자의 발행한도액을 125만 관으로 정했다...
... 교자의 발행액은 12세기 초 2,600만 관으로 당초 발행한도액의 20배 이상에 달했다...
... 북송 말기에는 교자 발행이 약 7,000만 관으로 발행한도액을 이미 50배 이상 넘겨버렸다.
109-/ ... 칭기즈칸에 의해 등용된 호라즘 사람인 야라와치는... 몽골제국의 화폐와 세금정책을 도맡아 관리했다...
야라와치는 남송과 금나라에서 발행한 지폐를 높이 평가하고 칭기즈칸의 높은 신임을 받은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오도살합리)와 함께 지폐제도를 연구했다...
야라와치의 통화정책은 쿠빌라이의 원나라에 그대로 적용되어 교초交鈔라는 통화의 유통으로 이어진다.
쿠빌라이는 남송을 제압한 후 남송이 발행하던 지폐인 교자와 회자會子를 교초(중통초)로 교환시켜 법정지폐로 삼았다.
교자와 회자가 동전과 철전으로 교환가능한 태환지폐였던 반면 교초는 동전의 교환단위를 가지지만 동전과 교환이 불가능한 불환지폐였다. 교초는 원나라가 준비한 막대한 은 보유량으로 신용을 보증했다.
.. 마르코 폴로... 는 교초를 보고 깜짝 놀랐다...
원나라를 방문한 모로코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1304-1368년)도 여행기 <삼대륙 주유기>에 교초를 언급했다.
... 명나라는 보초寶鈔라는 지폐를 발행하였는데, 처음에는 발행한도액과 규율이 잘 지켜졌지만 점차 발행량을 늘리게 되었다.
17세기에 건국한 청나라는 이 문제에 대한 대응책으로 지폐를 발행하지 않고 실물화폐인 은화를 유통시켰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본격화되자 중국 명나라는 예상치 못한 형태로 이익을 얻었다...
이 시기 스페인은 멕시코에서 은광을 발견했다. 멕시코에서 산출한 은은 일단 태평양 연안의 아카풀코로 옮겨진 후, 스페인령 필리핀의 마닐라로 운반했다. 이 은으로 마닐라에서 중국 상인의 견직물이나 도자기와 교환했다...
아카풀코와 마닐라를 잇는 무역을 아카풀코 무역 또는 무역에 사용된 선박의 이름을 따서 갈레온 무역이라고 부른다.
은의 보급으로 16세기말 만력제(萬曆帝 13대 황제, 1572-1620 재위) 시대에 재상 장거정이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는 새로운 세제를 시행했다...
122-/ 3세기 중동에서는 이란계의 사산 왕조 페르시아sassanian dynasty(221-651)가 건국되었다...
사산 왕조는 독자적인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병사의 사기를 높이고 결속력을 강화했다...
이후 사산 왕조에서 조로아스터교, 불교, 기독교를 모두 아우르는 마니교manichaeism가 발생했는데, 마니교는 다른 종교들과 융합을 내세움과 동시에 다른 민족들과 공존을 목표로 삼는 종교였다. 이란 민족주의를 내세운 사산 왕조... 이단으로 몰아 심하게 탄압하였다.
하지만 마니교는 상인층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사산왕조는 마니교를 신봉하는 상인들을 탄압하였고, 결국 상인들은 주변국으로 흩어졌다. 이들이 주로 옮겨간 지역은 사산 왕조의 영향력이 닿지 않은 아라비아 반도 서쪽 끝 홍해 연안 지역의 헤자즈였다.
상인들은 홍해 연안이라는 지리상 이점을 활용해 해상 교역루트를 만들었다...
6세기말부터 바닷길이 발전하여 헤자즈의 중심도시 메카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계무역의 거점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한편 사산 왕조는 상업이권을 헤자즈에 빼앗겨 쇠락하였고, 군사력도 한계에 달했다...
해상무역루트를 만든 헤자즈 지역은 번영을 누림과 동시에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
이슬람은 '양도'라는 의미로 상거래의 용어에서 유래한다. 신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양도'하고 절대적으로 귀의한다는 신과의 계약이나 약속을 의미한다.
PART 4 근세,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전
139-/ ... 신항로 개척에 대한 이해관계가 일치한 제노바는 포르투갈에 적극적으로 자금을 투자해, 말하자면 '조인트벤처(공동사업체)'가 성립하게 되었다.
... 페르낭 브로델은 16세기를 '제노바의 세기'라고 부르며, 제노바에서 근대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자본축적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제노바는 16세기부터 스페인에도 자금을 투자했다...
15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뽑는 선거를 치렀는데.. 제노바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스페인 왕인 카를로스 1세를 적극 지원했다...
... 선제후들을 매수하기 위해 카를로스 1세는 금화 2톤을, 프랑수아 1세는 금화 1.5톤을 사용했다...
143-/ ... 1500년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는 공채를 발행했는데, 향신료 무역으로 얻은 이익의 대부분을 공채의 이자 지불에 충당해야 했다. 물론 포르투갈 공채를 인수한 쪽은 제노바였다.
포르투갈은 16세기 후반부터...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정복에 나섰다. 포르투갈은 모로코를 지배하던 이슬람의 사우드 왕조에게 대패했다... 포르투갈은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았다...
결국 1580년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병합하였다... 제네바의 교묘한 수완으로 스페인이 포르투갈의 부채를 떠안게 되었다.
스페인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중심도시 안트베르펜을 경제 특구지역으로 개방했다... 스페인은 안트베르펜에서 채권을 발행하고 자금을 조달했다.
... 스페인 입장에서는 높은 이율을 요구하는 제노바보다 안트베르펜 쪽이 훨씬 매력적이었다.
호황을 누리는 안트베르펜에 유럽 각지의 자금이 모여들었다. 제노바의 풍부한 자금도 장래성이 있는 안트베르펜 쪽으로 많이 빠져나가... 제노바 국채의 금리는 그때까지 4퍼센트 전후였지만 1555년에는 9퍼센트까지 급등했다(리처드 실라, 시드니 호머, <금리의 역사A History of Interest Rates>).
당시 제노바 국채의 이율이 급등한 까닭은 제노바가 금융지원하던 카를 5세가 1555년 독일 제후와의 전쟁(슈말칼덴 전쟁(1546-1547),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에서 패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 슈말칼덴 전쟁에 패한 카를 5세는... 황제 자리는 동생(페르디난트 1세)에게 스페인 왕위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었다.
... 펠리페 2세는 가톨릭을 강요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칼뱅파 신교도가 많은 네덜란드는 이에 반발해서 1568년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1576년... 안트베르펜은 스페인군에 의해 약탈/ 파괴되었고 상공업자들은 암스테르담으로 도망쳤다.
제이컵 솔Jacob Soll의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하는가 The Reckoning: Financial Accountability and the Rise and Fall of Nations>에 따르면, 재무관이 왕국의 회계 시스템을 조속히 정비하도록 조언했지만, 펠리페 2세가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펠리페 2세에게 훌륭한 상공업 도시 안트베르펜이 국고를 넉넉하게 해주는 중요한 재원이 아니라 발칙한 신교도들이 모인 악의 소굴로 비쳤다...
... 안트베르펜 붕괴 후 상공업의 중심은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졌고,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 설상가상으로 스페인은 1588년 아르마다 해전에서 영국에 패했다.
독일... 30년 전쟁(1618-1648년)에 스페인은 가톨릭 구교도를 지원했고... 구교도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스페인의 운도 다해갔다.
157-/...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매년 배당금을 지불했다. 1602년 설립이후 200년간의 평균 주주배당률은 18퍼센트였다...
...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주주의 책임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전체 투자액의 범위 내로 한정함으로써 부담없이 주식을 고입할 수 있게 했다...
... 1657년 영국은 '항해조례'를 발표하고 사실상 네덜란드와의 통상을 금지했다.
중개인과 도매시장을 잃게 된 영국의 모직물 생산자는 당연히 극렬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영국 무역상 조합이 의회에서 적극적인 로비활동을 벌여 보수계 의원을 움직였다.
... 1652년부터 167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벌어졌다...
네덜란드는 경제이익에만 관심을 쏟을 뿐 정작 그 이권을 지키기 위한 군사력에 예산을 쓰지 않아 장기적인 관점에서 안정적인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169-/... 몽골의 일칸국은... 1260년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공격했다. 하지만... 패배했고, 그 이후로도 시리아 지역에서 일 칸국과 맘루크 왕조는 계속 대치했다.
13-14세기 지중해 동쪽은 몽골, 비잔티움 제국, 맘루크 왕조가 각각 자리잡고 있었다. 세 세력의 완충지대로서 거의 방치되어 있던 지역이 아나톨리아 반도였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등장한 나라가 바로 1299년에 세워진 오스만 제국이다.
... 1509년 인도서해안에서 벌어진 디우해전에서 포르투갈 함대는 막강한 화력을 내세워 맘루크 함대를 격파했다. 인도양 교역의 거대 이권을 상실한 맘루크 왕조는 급속히 와해되었다.
... 1517년 오스만 제국은 마르즈다비크 전투에서 맘루크군을 크게 물리치고 멸망시켰다.
오스만 함대는 1538년 포르투갈의 점령지 아덴을 공략했다... 이후에도 오스만 함대는 디우 요새를 포위하는 등 포르투갈과 계속 대치했다.
결국 1566년 오스만제국과 포르투갈은 인도무역의 이권분배에 대한 상호협정을 맺었다...
또한 오스만제국은 동남아시아에도 진출했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북부에 있는 아체의 국왕은 포르투갈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560년경 오스만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177-/... 여진족은 세력을 키워 12세기초 금나라를 세웠다... 13세기에 몽골제국에게 멸망했다.
... 약 300년간 만주족은 '호시무역互市貿易'이라는 이민족 사이의 민간상업거래를 주도해 경제적 토대를 쌓았다. 만주는 몽골, 중국, 한반도의 세력이 교차하는 접점에 위치해 사람, 물자, 돈이 왕래하는 물류의 거점이 되었다.
14-15세기, 명나라가 북방의 몽골과 치열하게 싸우고 국교가 단절되었을 때, 두 세력의 군수물자는 만주의 호시무역을 통해 조달되었다...
만주족은 이러한 호시무역의 수익구조를 배경으로 힘을 비축하였다. 1616년 퉁구스계 만주족은 후금을 세우고 요동반도 북쪽의 선양瀋陽을 수도로 삼았다...
1630년대에 들어 만주족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634년 링단 칸이 병으로 죽자 몽골의 내부분열은 극심해졌다... 후금의 지배자 홍타이지(후금의 2대칸, 청 숭덕제)는 몽골족을 지원하고 '칸'이라는 몽골의 지도자 지위를 받았다...
... 마침내 1636년에 홍타이지는 청나라를 세웠다...
... 강희제는 과감하게 인두세 폐지를 선언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인구조사에 응하고 호적을 취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세기 후반에는 통계인구가 대거 증가하여 3억 명에 이르렀다...
인두세 폐지에 따른 세수감소는 토지세로 충당했다. 토지세는 부유한 토지소유자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평민은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다...
PART 5 근대, 산업혁명과 국부론의 시대
187-/ 바이오매스의 재생시간을 초월한 근대
태양과 지구가 저축한 '부'
'부富'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맨 먼저 떠올리는 것은 돈이다. 돈은 물건이나 서비스로 교환되면서 비로소 그 효용가치를 발휘한다. 물건이나 서비스는 자원에너지를 통해 만들어진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한정적이었다... 곡물이든 가축이든 물고기든 모두 순식간에 길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곡물은 수확하기까지 보통 1년은 걸린다.
근대 이전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바이오매스의 재생시간을 뛰어넘어 에너지를 획득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인류는 산업혁명 시기에 석탄,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를 동력에너지로 이용하는 장치를 발명했다. 그동안 땅속에 오래도록 쌓이고 쌓인 에너지를 증기기관이나 화력발전으로 단번에 전환하여, 바이오매스의 재생시간을 초월한 생산능력을 갖게 되었다.
산업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보다 인류가 에너지 자원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수만년의 세월 동안 동식물이 땅속에 퇴적하여 지열 등에 의해 생성된 화석연료 에너지를 산업혁명 이후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소급 이용하고 있는 셈이다. 태양과 지구가 저축한 '부'를 근대 사람들이 끌어내 탐낸 결과가... 급상승 그래프로 나타난다.
191-/ 18세기 중반에 제임스 와트James Watt는 글래스고 대학 천문학부의 계측기를 관리하는 유능한 기계기술자였다. 1757년 대학 내에 와트의 기공연구실을 설치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은 당시 글래스고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던 애덤 스미스Adam Smith였다.
제임스 와트는 토머스 뉴커먼이 개발한 증기기관 펌프에 흥미를 갖고 독자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1765년 개량장치 설계도를 고생끝에 완성했지만, 이를 실용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막대한 연구자금이 필요했다.
... 조지프 블랙과 존 로벅이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 존 로벅은 자금지원과 동시에 특허신청 관련 부분을 도맡았다. 하지만 존 로벅의 제철공장이 파산하면서 더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다행히 버밍엄의 금속가공업자 매튜 볼턴Matthew Boulton이 제임스 와트의 연구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후원자가 되어 존 로벅의 특허를 이어받았다. 볼턴은 웨지우드사의 도자기에 섬세한 철 가공을 더하는 상품을 개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775년 매튜 볼턴은 제임스 와트와 함께 볼턴앤드와트를 설립했다.
매튜 볼턴의 지원이 빛을 발해 제임스 와트는 1780년대에 방적과 연마 등 다용도로 적용할 수 있는 원운동 증기기관 장치를 잇달아 실용화했다...
경제학자인 요제프 슘페터Joseph A. Schumpeter는 경제성장에는 '자본축적', '기술혁신(이노베이션)', '인구증가' 이렇게 세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2-/ ... 사회학자인 이매뉴얼 월러스타인Immanuel Wallerstein에 따르면 패권국가의 세 가지 조건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생산, 유통, 금융'이다...
월러스타인은 대항해 시대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교역에서 우위 자리를 지켰지만, 두 나라 모두 생산과 금융이 발전하지 못해 패권국가라고 말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경제사학자 찰스 킨들버거Charles P. Kindleberger도 국제적인 무역, 금융, 자본 등을 패권국가의 조건으로 들었다. 월러스타인의 스승이었던 페르낭 브로델도 거의 비슷한 조건을 거론했다.
이러한 패권국가의 흥망을 자본축적의 사이클로 파악해... <장기 20세기 :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The Long Twentieth Century : Money, Power, and the Origin of Our Time>의 저자인 경제사학자 조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다...
아리기는 자본축적의 역사적인 변천을... 제노바, 네덜란드, 영국, 미국 네 나라의 사이클로 분류했다.
... 브로델과 월러스타인이 '장기 16세기'를 전제로 해서 그 후의 근대를 분석했다면, 아리기는 '장기 20세기'를 전제로 해서 근대를 거슬러 분석하려고 했다.
[조반니 아리기가 제시한 자본축적 사이클]
제노바 사이클 1460-1640년 180년 포르투갈, 스페인에 융자 지원
네덜란드 사이클 1640-1800년 160년 암스테르담의 발전, 해외무역 확장
영국 사이클 1800-1940년 140년 산업혁명, 노예/ 아편 삼각 무역
미국 사이클 1940-현재 ? 제2차 산업혁명, 금융패권
영국의 악랄한 수탈시스템은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16세기의 사략선이 약탈, 제2단계는 17-18세기의 노예 삼각무역, 제3단계는 19세기의 아편 삼각무역이다.
213-/... 영국정부는 1711년 남해회사The South Sea Company라는 특권회사를 설립했다. 영국은 신대륙의 식민지 쟁탈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했다. 영국정부는 이 조약으로 획득한 스페인령 서인도의 노예무역 독점권을 남해회사에 주었다...
또한 1718년 영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며 사실상 스페인과 노예무역이 불가능해져 계약은 무효나 마찬가지였다.
초조한 영국정부는 계획을 수정하여 남해회사에 복권발행을 허가하는 특별조치를 취했다...
남해회사의 신용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정부는 국채와 남해회사 주식의 거래를 제안했다...
국채와 남해회사 주식의 교환은 부채debt와 자본equity을 교환swap하는 채무출자전환debt-equity swap이었다. 이 교환에는 주식의 시가로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교묘한 장치가 숨겨져 있었다...
당시 복권사업으로 성공한 남해회사의 주식이 상승세를 타고 있어서 국채보유자 입장에서는 빨리 국채와 주식을 교환해야 손해를 덜 보는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엄청난 자금을 모은 남해회사는 이 자금으로 상환기한이 임박한 국채 결손을 충당하고(사실상 지불하지 않음), 남은 자금으로 정부가 신규발행한 적자 국채를 인수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정부는 부채상환에서 벗어났고 또 남해회사에 적자국채를 인수시킴으로써 궁지에 몰린 재정위기에서 빠져 나왔다.
정부는 비정상적인 주식시장의 거품을 진정시키기 위해 1720년 6월 '거품회사 규제법bubble act'을 제정했다.
1721년 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은 조지 1세의 신임을 얻어 수상으로 취임했다. 월폴정권은 1742년까지 약 20여 년간 정권을 유지하였다. 그동안 남해회사의 실패를 반성하고 국채상환 및 이자지불의 재원으로 새로운 세제를 제정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제도를 제정하고 법제를 가다듬었다.
이후 영국 국채의 발행과 상환은 의회의 심의를 거쳐 조정되었고 의사결정이 투명하게 진행되었다...
다양한 종목의 국채가 발행되고 그 재원이 되는 세금항목도 너무 복잡해서, 1752년 영국 수상 헨리 펠럼Henry Pelham은 각종 국채를 상환기한이 없고 고정금리가 적용되는 국채로 통합했다. 통합Consolidate이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국채 이름은 '콘솔채권Consols'이라고 불렀다...
226-/... 1719년 특허회사인 미시시피 회사가 만들어졌다. 이 회사는 신대륙(프랑스령 루이지애나)의 개발을 독점으로 맡아 미시시피 강 하구의 도시 뉴올리언스의 개발을 도맡았다...
그리고 미시시피회사 주식과 휴지조각이던 프랑스 국채를 거의 강제적으로 교환하게 했다. 하지만 영국의 남해회사와 다른 점은 시가 거래가 아니라 액면 거래였고, 은행의 지폐 발행에 의해 미시시피 회사의 이익이 보장되었다는 점이다. 왕립은행은 대량의 지폐를 인쇄해 미시시피 회사에 공급했고, 미시시피회사는 이를 이익으로 계상하고 주식의 배당 지불에 충당했다.
존 로John Law(1671-1729)는 1716년 루이 15세의 경제 참모가 되어 지폐제도(관리통화제도)의 구축에 몰두했다. 우선 지폐의 신용을 무엇으로 담보할지가 중요한 과제였다. 존 로는 왕립은행을 미시시피회사와 결탁하여 은행의 지폐가치를 미시시피 개발의 이익으로 담보하려고 했다. 또 지폐와 금화/ 은화의 교환을 가능하게 했다.
무엇보다 왕립은행의 지폐로 납세할 수 있도록 한 점이 사람들에게 크게 신용을 높였다...
237-/ 포메란츠Kenneth Pomeranz에 따르면, 17-18세기의 청나라는 금융업의 규제가 약해서 대도시에 자본이 축적되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는 예금/ 대부 업무를 하는 '전당典當', '전장錢壯', 환업무를 하는 '표호票号'라는 은행이 발달했다...
하지만 포메란츠나 아리기가 말한 중국의 경제발전은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이 제시한 '1인당 GDP, 1인당 GDP성장률' 자료에서 찾을 수가 없다...
중국의 '자본축적'은 어디까지나 중세적인 상업자본이며 근대산업자본이 아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중국은 왜 근대화가 되지 못했을까?... 청나라는 장원지주 한 명에 수천 명의 농노가 딸려있는 격차사회였다...
게다가 중국의 노동력은 넘쳐났고 유럽과 인건비를 비교하면 거의 무료나 다름없어서 노동비용을 줄여야 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막대한 투자금과 시간이 걸리는 기술혁신에 대한 동기가 없었다...
또 중국에서는 차, 설탕, 담배, 뽕(누에의 먹이) 등 상품작물의 생산이 번성하여 큰 수익을 거두었다. 관개시설을 갖춘 비옥한 논밭에는 곡물재배가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토지가 척박한 영국과 달리 중국은 농업의 생산성과 수익성이 높았기 때문에 굳이 공업화를 꾀할 필요가 없었다.
PART 6 현대, 불확실성 시대의 리스크
282-/ 1923년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수상은 초인플레이션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새로운 지폐 렌텐마르크Rentenmark를 발행했다. 햘마르 샤흐트Horace Greely Hjalmar Schacht가 새로운 중앙은행의 총재로 임명되어 렌텐마르크 정책의 총지휘를 맡았다.
종래의 마르크는 실체가 없는 '정부의 신용'에 의해 보증되었지만, 렌텐마르크는 '독일의 토지부동산'이라는 실체에 의해 보증되었다. 렌텐은 지대地代라는 의미다.
샤흐트는 재정운영기준과 규칙을 명확히 규정하고 렌텐마르크를 독일의 토지자산과 연동시켜 그 자산 가치를 뛰어넘는 통화발행을 용인하지 않았다. 렌텐마르크와 종래의 마르크의 교환비율은 1:1조로 정했다. 이는 단순히 통화단위를 절하하는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이 아니다. 동시에 통화발행량을 32억 렌텐마르크로 제한하고 국채인수도 12억 렌텐마르크로 제한했다.
1924년 미국의 부통령 찰스 도즈는... 렌텐마르크를 새로운 화폐단위인 라이히스마르크로 전환했다... 달러자본을 투입했는데...
하지만 1929년 세계공황이 발생하자 독일에 투자된 달러자금이 급격하게 회수되면서 독일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933년에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 후 '아우토반' 고속도로 건설을 시작으로 케인스형 정책인 대규모 공공사업을 전개했고, 또 주택정비와 군사 재무장을 하며 실업률을 대폭 낮추었다.
나치는... 가족이 있는 중년층을 먼저 고용하고 사회의 안정을 최우선시했다...
햘마르 샤흐트는 유령회사인 메포MeFo, Metallurgische Forschungsgesellschaft라는 이름의 야금연구협회 유한회사를 설립해서 메포 채권(독일 국방군으로부터 수주를 받은 기업이 채권의 발행인이 되어 정부가 이 채권을 사들이는 의무를 지며 라이히스 은행이 채권의 재할인을 보증하는 증권)을 도입해다. 메포는 정부의 외곽단체로 자리잡았다. 메포에 무기를 발주하면 메포는 지불금을 채권으로 결제했다. 그러면 메포 채권을 라이히스 은행이 보증하였다. 사실상 독일의 중앙은행이 발행하고 독일정부가 보증한 채권으로 상환기간은 3개월이었지만 최대 5년까지 연장이 가능했다.
... 정부는 메포채권에 의해 국채발행이나 통화량 증가를 하지 않고도 재정문제를 해결했다. 즉 위장 국채인 메포 채권으로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있었다.
293-/ 은본위제라는 전 시대적인 화폐 제도를 고수한 중국은 국제 은 가격이 심하게 요동칠 때마다 우왕좌왕했다. 따라서 장제스 정권은 1935년에 통화제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시작했다. 은화 유통을 금지하고 정부가 공인한 은행이 발행하는 지폐만 인정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 중국 각지에서 할거한 군벌은 각자 독자적으로 화폐를 발행했다. 화폐의 종류는 1,000개를 넘어섰고, 제각각인 경제권을 통일하는 것도 화폐개혁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장제스는 화폐개혁을 위해 영국의 손을 빌렸다. 영국은 '위안'을 파운드와 연동시키는 관리화폐 제도로 이행해서 은을 국유화하고 정부가 공인한 지폐만을 사용토록 강제할 것등을 제언했다.
일본은 1932년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에서 화북지역으로 진출을 노렸다... '화북분리공작'을 추진했지만, 국민당 정부가 화폐를 통일하며 경제권을 확립하자 일본의 분리공작은 점점 곤란해졌다.
그즈음 영국은 일본에게 중국의 화폐개혁에 협조하도록 권고했다(리스 로스, 히로타 고키/ 시게 미츠 마모루의 회담). 일본이 협조한다면 영국과 중국은 만주국을 승인하겠다는 조건을 일본에 제시했지만 일본은 계속 영토 확대 방침을 내세우며 영국의 권유를 거절했다.
이때 일본이 영국의 경제협조안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라는 재앙을 초래한 큰 원인이 되었다.
1937년... 노구교盧溝橋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국민당 정부의 법정화폐인 '위안'을 배제하고 새로운 화폐를 발행했다...
일본 군부는 '전쟁으로 전쟁을 조달한다'는 신념으로 점령지에서 뒷감당할 수 없는 지폐를 마구 찍어내 무작정 유통시키려고 했다...
일본은 식민지인 대만이나 조선에도 은행을 설립하여 각각의 은행권을 발행했다. 대만이나 조선은 면적이 작아 통치가 비교적 용이했다... 하지만 중국은 대만이나 조선과 사정이 달랐다...
... 일본군은 재정에 대한 충분한 계획없이 무작정 영토 확장을 시도했고, 당시 확산되던 중국 위안화에 대한 대비책 없이 무모한 전쟁에 돌입했다...
일본의 육군성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군에 타격을 가하기 위해 위안화의 모조지폐를 대량으로 제조해 중국 각지에 퍼뜨렸다. 본격적으로 위조지폐 공장을 만들어 1941년부터 대량으로 유포하였다. 일본군은 위조지폐로 금/은, 식량 등 물자를 구입했다... 이에 위안화의 가치는 훼손되었고 중국은 초인플레이션에 빠졌다...
... 민심이 장제스의 국민당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한편 마오쩌뚱이 이끄는 공산당 세력은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에 분배하는 '토지혁명'을 실행하여 농민의 지지를 넓혀갔다. 공산당은 세력을 확장한 해방구마다 '변폐邊幣'라 불리는 지역화폐를 발행하여 질서있게 재정을 운영했기 때문에 지역화폐의 신용은 일정 수준에서 보장되었다.
312-/ 예전에는 군사기술 개발이 앞서 이루어지고 민간에 파급되어 새로운 기술혁신을 낳아 연쇄적인 제품개발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민간기술이 군사기술로 이전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군사기술의 개발투자가 경제를 이끌어간다는 상황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