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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Jan 01. 2023

서구 세계의 성장 - 새로운 경제사

North & Thomas (이상호 역)

제1부 이론과 개관


제1장 쟁점들


11/... 효율적인 경제조직이 성장의 원천이다...

효율적인 조직은 제도기반과 소유권을 동반하는데, 이것들은 개인수익률을 사회수익률에 일치시키도록 개인의 경제활동을 유도할 수 있는 유인을 제공한다...


14/... 우리가 언급했던 요인들(혁신, 규모의 경제, 교육, 자본축적 등)은 성장의 원인이 아니라 성장 자체일 뿐이다...


해운업과 국제무역을 생각해 보자. 이것들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요 요인은 정확히 자신의 위치를 판별하지 못하는 항해사의 무능력이다. 이 능력을 갖추려면 경도와 위도라는 두 좌표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위도를 판별하는 능력은 일찍이 계발된 것으로 이것은 오로지 북극성 고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할 뿐이다. 그러나 남반구에서 북극성은 지평선 아래 놓인다. 대체방법을 찾는 중에 포르투갈의 헨리 공(Prince Henry)이 수학전문가 집단을 모았는데, 이들은 태양의 기울기표에 비추어 정오의 태양고도를 판별하면 위도에 대해 적절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경도를 판별하는 일은 장기 항해기간에도 정확성을 유지하는 시계(timepiece)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좀 더 어렵다. 스페인의 필립 2세가 이러한 시계를 발명하는 사람에게 1천 크라운의 상금을 걸었다. 네덜란드는 이 상금을 10만 플로린으로 올렸으며 마지막으로 영국은 시계의 정확성에 따라 1만 파운드에서 2만 파운드까지 상금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법으로 지식재산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보장해 주는... 이런 소유권이 없다면, 사회이익을 위해 개인자산을 희생하는 위험을 감수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 근대 초기 스페인의 토지정책에서 소유권을 불완전하게 규정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전에 국왕이 양목업자 길드(the Mesta)에게 관례에 따라 양 떼를 몰고 스페인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는 배타적인 권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 스페인 국왕은 실제로 메스타에서 상당한 수입을 얻었는데, 그가 메스타의 특권을 폐지함으로써 이득을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았다...


... 역사적으로 소유권이 개인수익을 사회수익과 같아지도록 유인하지 못한 두 가지 일반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1) 무임승차 문제를 제거하고 제3자에게 자신의 거래비용의 일부를 부담하도록 강요하는 기술이 부족할 수도 있다... 개인수익을 사회수익에 일치시키려면 다양한 순간에 비밀주의, 보상제도, 상벌제도, 저작권, 특허법 등의 수단이 고안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편익으로부터 외부자를 배제시키는 기술은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불완전하다.

(2)... 소유권을 설정하거나 행사하는 비용이 편익을 초과할 수도 있다... 스페인 국왕이 메스타의 특권을 폐지하면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립하고 소유권자에게서 소득세를 거두어들이게 되면, 그는 최종 수입의 불확실성에 직면했을 뿐만 아니라 이런 개혁조치에서 얻는 이득보다 (소유권의) 재조직 비용과 징세비용이 높다는 점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소유권에 따라붙는 배타성과 강제력을 쉽게 (즉 거래비용 없이) 확보할 수 있다면, 실로 경제성장은 간단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 서구사회의 성장은 제도혁신의 산물이지만, 후자를 유인한 것은 지배적인 파라미터의 변화, 즉 인구증가였다. 이제 역사적으로 이런 변화가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아보자.



제2장 개관


9-10/ <간추린 케임브리지 중세사> 418~419쪽을 참조하는 방식으로 봉건제를 가능한 상세하게...


... 봉건제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계약(명시적인 것이든 암묵적인 것이든 간에)에 기반을 둔 사회체계로 정의될 수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개인은 토지에 대한 관계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었으며 다른 측면에서 분여지land-tenure가 개인의 정치적 권리와 의무를 결정했다. 봉건 계약은 이른바 충성(homage)과 하사(investiture)라는 행위로 구성된다... 영주는 가신들에게 '하사'로 화답했는데... 또한 하사 받은 재산이나 관직의 또 다른 상징물인 봉토(fief/feodum 또는 Lehn)를 받았다. 이 봉토는 이전의 은대지(benefice)를 대신해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군역을 조건으로 하사 받은 자유롭고 명예로운 분여지(tenure)였다...


... 모든 농민은 자신의 쟁기와 황소, 그리고 모든 작업장비와 마차를 가지고 (개인마다) 통상 일주일 중 3일을 영주의 직영농장에서 일했는데, 이를 주간부역week-work이라고 불렸다...


38/ ... 봉건사회의 성은 원거리 무역을 충분히 보호할 수 없었으므로 좀더 넓은 지역을 통합한 정치체계나 정치연합이 출현했으며, 이것이 상업성장에 필요한 항로들을 좀더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었다.



제2부 900~1500


제3장 토지와 인간에 대한 소유권


43/ 소유권을 변화시키려는 압력은 오로지 사회의 욕구에 비해 자원이 희소해지면서 나타난 것이다. 분석의 출발점인 10세기에는 토지가 풍족했으므로 이를 사용하는 데 배타적인 권리를 고안할 필요가 없었다... 농촌은 바이킹, 이슬람 세력, 마자르족 등의 약탈집단이나 기타 토착 산적세력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고 있었으므로...


보호기능과 노동의 역할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본 요인들이 장원경제에 편입되었다... 영주와 기사는 보호기능과 정의수호 기능을 전담했으며 농노는 이들에게 생활수단을 제공했다...


노동은 장원경제의 세 번째 요소로서 인간 내면에서 소유권에 대한 본성을 찾아볼 수 있는 근거를 간직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봉건시대에 영주가 농민을 곧바로 소유함으로써 단순한 노예로 만들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의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이유는 노동이 희소해서 영주들이... 서로 경쟁했기 때문에... 두 번째로... 노예를 지휘하고 감독하는 일은 너무 비용이 들었다는 점이다... (1) 운영비용cost of enforcement이 높고 (2) 농노제serfdom와 비교해서 감독비용이 높은 경우에, 노예제는 가장 효율적인 체계가 아니었다.


영주가 단순히 농노의 생산물 중에서 일부를 가져가기보다 노역을 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조직화된 재화(및 서비스)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격에 대해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시장이 없는 경우, 양자(농노와 영주)는 농민이 영주에게 노역을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들이 원하는 재화묶음을 생산하는 데 동의함으로써 좀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목재 같이) 시간이 흘러도 공급량이 변하지 않는 경우에, 또는 (축제용 거위 같이) 재화가 너무 작거나 재화를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경우에, 이런 제도 체계는 영주에게 몇몇 재화를 현물로 제공하는 방식을 통해 보완되었다. 그러나 계약체계의 핵심은 영주의 보호에 대한 대가인 노역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것은 자연스러운 부속물인 장원재판소를 통해 정의로운 것이 되었다. 고전적인 장원제도는 초기 혼돈조건(풍족한 토지, 차별화된 군대시설, 희소한 노동)이 지배하는 동안 존속했다.


인구증가가 이 체계를 전복시켰는데...

인간의 역사에서 출생률은 항상 사망률을 앞지르는 경향이 있다... 토지가 풍족한 경우... 개인은 아이를 양육함으로써 높은 편익을 얻었다... 어린이들이 하나의 자산이 되었을 때 출생률은 아주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으며 풍족한 토지가 존재하는 곳에서 개인의 비용-편익은 사회의 비용-편익과 점차 같아졌다. 그러나 모든 옥토가 경작되고 수확체감이 나타나자마자 개인의 비용-편익과 사회의 비용-편익은 뚜렷한 차이를 드러냈다.


... 개인비용의 상승과 개인편익의 하락은 사람들로 하여금 만혼이나 원시적인 피임 같은 방식으로 출생률을 낮추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수익과 사회수익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 한, 사회를 위해 출생률이 여전히 너무 높다는 문제가 상존했다.


... 지역의 장원에서 수확체감이 나타날 정도로 인구가 많아지면 처녀지로 인구가 이동한다... 인접 장원들이 재화와 서비스 조합을 거의 비슷하게 생산해내는 동안 서로 다른 지역 사이에 점차 차별화가 진행되면서 교역에서 이윤을 획득하는 능력이 향상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도시가 다시 생겨나거나(이탈리아), 발전했으며(플랑드르) 도시마다 독자적인 전문기술을 '제조'품 생산으로 전환시켰다. 그래서 다양한 요소부존패턴(인적 자본을 포함해서)은 교역이윤을 향상시키면서 국지적인 농촌지역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상업 보호 조치를 확장시키도록 유인했다. 그 결과 인구증가와 식민지 개척coloniztion이 요소부존의 다양성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역으로 후자는 교역이익을 향상시킴으로써 하나의 장원보다 더 넓은 지역에서 소유권을 보호하는 것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교역의 팽창(과 함께 회계단위로서 화폐를 사용하는 것)은 고전적인 장원을 효율적인 체계로 만들었던 기본적인 경제조건을 변화시켰다.


지속가능한viable 시장경제가 발전하기 전에 영주와 가신은 생산요소를 분할하는 협정 때문에 낮은 비용으로 원하는 소비재 묶음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장에서 재화를 교환할 수 있고 화폐로 생산물을 평가할 수 있게 되자 임금체계나 지대체계를 설정하거나 계약을 통해 (생산물을) 분할하는 쪽이 분명히 거래비용을 낮출 수 있게 되었다. 각종 장원의 관계들은 비가역적인 변화로 뒤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리 '장원의 관례'가 이행속도를 늦추었다 하더라도 영주와 농노는 점차 노역을 1년 단위 화폐 대납annual commutation으로 대체하길 원하고 영주직영지에 대해서는 지대를 지불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들이 모든 옥토를 차지했기 때문에 계속된 인구증가는 경작자들로 하여금 기존 농토를 좀더 집약적으로 이용하거나 좀더 척박한 토지로 이동하도록 강요했다. 어느 경우에나 토지와 노동의 상대적 가치가 변했으며 이런 변화는 계약체계, 급기야는 근본적인 제도체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면서 노동시간의 가치가 줄어들었다... 영주에게는 노역을 1년 단위 화폐대납으로 대체하는 것(그 크기는 관례에 따라 고정되었지만)이 이익이 되었다... 토지희소성이 점차 일반화되자 공유자산 이용을 제한하려는 압력이 상승했지만, 장원의 관례가 기존 소유권의 변화가능성을 다시 한 번 떨어뜨렸다...


이런 상황을 가정한다면, 한꺼번에 공유제에서 무조건 사유지로 도약하는 것을 기대하지 못한다...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토지희소성이 높아졌으며 늘어난 인구에 대해 수확체감이 작동하던 시기였으며, 그 결과로 기근과 페스트가 사회를 집어삼키는 지점까지 생활수준이 떨어졌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한 번 경기순환 사이클이 노동이 희소하고 토지가 풍족한 상황으로 복귀했다. 다시 모든 신호signals가 역전되었다...


... 점진적인 이행에 따라 장원의 영주와 농민-하인은 고용주와 피고용인 또는 지주와 소작인으로 변모했다.



제4장 중세 초기 마지막 무렵의 경제조건


53/... 요즈음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중세가 역동적으로 팽창하던 시기였다는 데 동의한다. 확실히 11세기부터(그 이전은 아닐지 몰라도) 상업이 싹트고 도시가 세워지고 성장했으며 경제전문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구세계에서는 중세 절정기the high Middle Ages(1000-1300)라는 중요한 역사시기에 발전의 핵심이 한꺼번에 지중해 연안의 고대지역에서 북유럽 평원지대로 옮겨갔다. 이 현상을 만족스럽게 설명하는 것은... 위대한 역사학자 헨리 피렌느Henri Pirenne을 사로잡았던 문제였다. 오늘날 피렌느 명제Pirenne thesis가 거의 대부분 부정된다고 할지라도 그를 사로잡았던 문제의식은 아직도 커다란 역사적 쟁점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피렌느는 이런 발전을 지중해 무역항로를 다시 개척했던 십자군전쟁의 상업적 부산물로 정의하면서 북부유럽의 팽창을 외부자극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 보았다. 피렌느의 견해에 반대했던 일군의 학자들은... 대부분 북부유럽사회의 내부요인만을 강조했다. 오늘날 가장 널리 알려진 설명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 전통에 따르면 기술변화가 균형을 무너뜨리는 요인이며 바로 여기서 거의 모든 것이 시작된다... 오늘날 이 관점은 이 시기 경제성장을 (동물, 수력, 풍력을 좀더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좀더 효율적으로 생산요소들을 결합하도록 만든) 새로운 혁신과 체계의 누적된 효과로 돌린다. 지중해 상업의 발전이라는 외부자극보다 농업생산성 향상을 이 지역의 급속한 발전을 설명해주는 원인으로 거론한다.


... 우리는 이것 대신에 좀더 바람직한 경제학이며 역사적 사실에도 좀더 잘 부합된다고 생각되는 것을 대안명제로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는 인구증가가 기본적으로 중세 절정기에 서유럽의 성장과 발전을 설명해주는 외생변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중세에 인구증가의 산물인 전문화와 교역을 통해 이득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나면서 이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 시장경제의 발전과 팽창이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57/ ... 영주의 주요 역할은... 공공재(보호와 사법체계)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고전장원은 본성상 단순히 안정된 경제조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영주나 농민이 죽었을 때... 상속자들에게 분할되었다. 또한 (군주나 영주의) 교회와 귀족들에 대한 (토지) 증여가 노역의무와 장원의 생산물에 대해 (영주나 군주, 교회, 그리고 귀족들이) 산발적으로 청구권을 주장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이 권리가 종종 외부인에게 세습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그것은 점차 일정량의 곡식을 받는 것으로 충족되었다.


이 당시에도 장원은 완벽하게 폐쇄되거나 완전히 자급자족적인 경제공동체가 아니었다. 흔히 농민들은 영주에게 노동의무와 함께 소규모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있었는데, 이런 사실은 이들이 비록 제한된 것이긴 하지만 시장경제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9-10세기에 소규모 주간시장weekly markets이 나타나 번창했다. (지역별로) 고르지 못한 농업경제의 생산물 때문에 무역을 통해 서로 이익을 볼 수 있었으며 여행자들에 대한 식량공급이 약간의 식료품 교환을 가능하게 만들고 화폐은신처를 제공했다...


네 가지 유형에 따라 자유보유지freeholdings가 수여되었다. 기사의 공훈에 대한 분여지tenure by knight's service, 흔히 나타나는 자유로운 socage(특별한 봉사 또는 차지료 지불에 의한 차지권 부여)에 따른 분여지, serjeanty(국왕 또는 영주에 대해 특정 직무의 의무를 짐)에 따른 분여지, frankalmoign(토지 기부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조건으로 받음)에 따른 분여지가 바로 그것이다. 다섯 번째 분여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으로) 농노의 분여지로 불리며 자유스럽지 못한 것이다. 자유보유지를 차지한 사람은 언제든지 이것을 영주에게 돌려주고 떠날 수 있지만 농노는 법에 따라 토지에 묶여있다.


기사의 공훈에 대한 분여지는 계약을 맺고 영주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준 기사들에게 보답으로 토지이용권이 하사된 것이다. 흔히 나타나는 자유로운 소카쥬에 따른 분여지는 특정한 서비스(화폐나 생산물 상납, 노역제공, 영주의 재판정에 출석)를 제공한 대가로 하사된 것이다. 서전티에 따른 분여지는 무기나 운송수단 같은 군역을 제공한 사람들(오늘날로 치면 보급장교에 해당되는)에게 하사된 것이다. 프랑칼무아뉴에 따른 분여지는 종교적 의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하사된 것이다.


62/... 영주는 농노를 무한히 착취하지 못했다... 중세 절정기에 토지가 풍족했기 때문에 노동은 손쉽게 가장 희소한, 그러므로 가장 비싼 생산요소가 되었다...


... 고정된 현물임금의 선택은 영주에게 관리비와 온갖 위험요인을 혼자 떠맡도록 강요했다...

고정된 현물지대는 농민이 모든 위험요인과 관리비용을 떠맡아야만 한다는 정반대 문제를 제기했다...


66/ ... 봉건제는 탈집중화된 정치체계의 높은 운영비용을 충분히 상쇄시킬 정도로 협상비용을 낮추었다... 봉건제는 본질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체계였다... 이런 고전적인 정치경제 형태는 오로지 봉건세계가 본질적으로 비시장경제로 존속하는 한에서만 효율적으로 작동했다...



제5장 중세 절정기 : 개척 운동


68/ ... 남유럽에서는 베니스를 선두로 이미 10세기 이전부터 지역내 무역이 발전하면서 그것의 공간과 규모를 모두 키워가고 있었다. 다른 이탈리아도시들(특히 제노바와 피사)은 이용가능한 상업팽창 기회에 재빨리 적응하면서 이슬람 지역에 화폐, 목재, 철, 원목, 금속제품 등을 제공하는 대가로 향료, 향수, 상아, 정교한 직물, 올리브유 등을 받았다. 남유럽의 무역은 크기에 비해서 높은 가치를 지닌 제품들을 주로 취급했으므로 이것들은 역사가들에게서 사치품으로 분류되었다. 10세기부터 북유럽지역에서 점차 인구가 증가하면서 이 제품(사치품)을 거래하는 시장이 제한된 규모이긴 했지만 끊임없이 팽창했는데, 당시 중개상으로 활동하던 이탈리아 상인들은 이런 기회를 재빨리 이용했다.


북유럽지역의 상업은 남북유럽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업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북유럽지역에서는 좀더 기본적인 재화가 교환되었는데, 식료품(특히 곡물)이 무역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버터, 치즈, 생선도 주요 거래품목에 들어갔다. 이 시기 동안 목재와 기타 임산물(pitch(역청, 송진, 수지), 타르, 모피) 교역이 성장했으며 포도주 무역도 점차 중요해졌다. 당시 거래되던 제조품은 주로 옷감,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직물과 아마포linens였다.


... 점점 더 농노의 노동의무가 화폐대납, 1년 단위 화폐대납으로 바뀌게 되자 영주와 농노의 기본적인 계약체계까지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영주의 직영지가 점차 화폐지대를 조건으로 임대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1200년경에 10세기의 고전장원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가 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에 왕과 영주들 사이에 존재하던 전통적인 봉건계약 관계도 이와 비슷하게 변하고 있었다. 스쿠타쥬scutage라 불리는 화폐대납이 특정한 전통의무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기사의 공훈에 대한 분여지와 서전티에 따른 분여지가 자유로운 공통의 소카쥬와 실제로 같아졌다.


... 13세기초에 서유럽의 정치구조와 사회구조는 10세기 때 모습과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72/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 이런 수확체감현상이 나타났던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농민들은 950년무렵부터 손강Saone 유역의 진흙지대와 보조레Beaujolais의 구릉지대로 이주했다.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1100년 무렵에 습지배수 작업이 나타났는데, 습지를 매립하려면 실질적으로 자본 투자가 필요했다. <둠스데이 북(1086년 영국의 국세조사서)>에 따르면,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인구증가가 나타났다...


실제로 황무지를 식민화하려면 영주와 농민의 협력이 필요하다. 여기서 후자는 노동을 제공하고 전자는 습지를 (경작지로) 전환시키려는 기획venture을 승인하고 보호하며, 또한 이에 필요한 자본을 제공한다...


... 새로운 장원의 설립자들은...  이주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어떠한 노동의무도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몇 가지 현물세만을 요구했다. 때로는 새로운 장원의 야심만만한 기업가entrepreneur가 초창기에 전통적인 영주의 특권과 독점에서 비롯된 수입만을 유일한 소득원으로 갖고 있던 경우도 있었다...


... 지역마다 비교우위를 지닌 것에 주력했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은 노동집약적인 제품을 좀더 효율적으로 생산해서 이 제품을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의 토지집약적인 제품과 교환할 수 있었다. 중세에 의류산업이 팽창했다는 사실에서 하나의 좋은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플랑드르, 피카르디Picardy, 브뤼즈Bruges, 랑그독Languedoc, 롬바르디Lombardy, 이밖에도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아서 노동집약적인 제조업에 특화된 몇몇 지역들이 거대한 생산중심지로 떠올랐다. 플랑드르의 경우, 중세 융성기에 (자신이 생산한) 의류를 (타지역의) 곡물이나 포도주와 교환함으로써 거주자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식료품을 제공하는 무역에 의존하게 되었다. 또한 의류제조업은 동양의 사치품과 교환할 수 있을 정도로 값비싼 상품을 제공했다.


77/... 장원체계의 본질적인 요소(즉 노동의무 형태로 요소를 배분하는 방식)가 결정적으로 사라진 것을 설명하는 데 재화시장의 존재는 분명히 충분한 요인이 된다... 다른 것이 변하지 않았다면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자유노동이 그렇지 못한 농노의 노동보다 생산적이다. 시장이 발전해서 소비묶음을 명시할 필요성이 사라지고 그 대신에 화폐나 현물로 지급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효율성의 균형추가 좀더 낮은 이행비용을 보이는 다른 계약형태 쪽으로 기울었다.


80/ 봉건의무의 화폐 대납은 오늘날의 세금지불과 비슷한 것으로 영주와 소작인 모두에게 이익이 되었다. 영주는 소작인의 개인서비스와 무관하게 공공재를 생산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했다... 이제 왕과 대영주들은 원하는 만큼 상비군이나 용병을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영주들은 40일의 군역의무에서 해방되어 자신들이 원하는 순간이나 공간에 그리고 자신들이 운영할 수 있는 만큼 군대를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세는 13세기부터 일반화된 것으로 수익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쟁탈전을 일으키면서 궁극적으로 국민국가의 등장과 유럽의 경제성장 경로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


85/ 우리는 지금까지 시장의 팽창이 어떻게 도시개척, 전문화, 무역을 유도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동일한 현상(시장의 팽창)은 또한 중세의 기술상태에 영향을 미쳤다. 지역의local 곡물시장과 지역내regional, 지역간interregional 양모시장의 팽창은 물레방아를 이용해서 곡식을 빻고 축융하는 방법을 수용하고 전파하도록 유도했다.


... 1000년경부터 지역시장이 팽창하면서 물레방아와 풍차 같이 유명한 기술성과물이 전파되도록 유인했다... 오로지 지역의 인구밀도가 눈에 띄게 높아지고 지역간 무역이 팽창하는 것만이 이런 규모의 생산을 정당화시킬 수 있다...


11세기 무렵에는 물레방아가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1086년 <둠스데이 북>을 보면, 3천 개 촌락 공동체에 5,624개 수차방앗간이 있었다... 점차 수력의 이용범위가 곡식을 빻는 일 외에 (아마도 12세기에 발전된) 톱니바퀴 모양의 전동장치saws를 돌리고 축융공장을 운영하며 대장간의 스프링해머에 동력을 제공하는 데까지 확장되었다.


이렇게 순수하게 경제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 점진적인 발전은 (돌이켜 보면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모두 시장의 팽창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제도환경이 좀더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는데, 어떤 발명자나 기업가도 자신의 노력에서 나온 편익을 모두, 아니 일부라도 획득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비밀주의가 모든 사람이 (새로운 발명품을 무료로) 복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이런 제약이 존재하는 한, 결코 사회적 최적 규모에 가까운 지점에서 연구개발 행위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무기개발은 이런 규칙에서 유일한 예외에 속했다. 초기 전쟁시절에는 새로운 무기체계를 개발하거나 기존 체계글 향상시켰을 때 정치적으로 너무도 큰 보상을 얻어낼 수 있었으므로 당시 귀족들은 이 분야의 개발을 넉넉하게 후원했다. 여기서 나온 몇 가지 부산물들이 평화시에도 이용되었다.



제6장 13세기 유럽


89/ 13세기에 서유럽에서 개척운동은 끝났지만 인구증가는 그렇지 않았다. 인구는 계속해서 두드러진 증가현상을 보였다. 도시 지역도 확대되었다. 지역내부와 국제영역에서 무역과 상업이 번창했다... 13세기는 중세시대의 가을을 상징한다...


... 13세기에 도시화와 상업발전 측면에서 서유럽 최고의 선진지역은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서유럽의 상업팽창을 위한 자연적 교차로라는 전략적 위치 덕분에 제조업과 상업의 핵심지역이 되었다... 뮤즈강 계곡에 있는 수많은 도시들은 금속산업에 종사했으며 쉘트강 계곡에 있는 도시들은 면직물 공업과 상업에 매달렸다. 브뤼즈Bruges는 13세기에 북유럽의 주요 항구가 되었으며 이웃도시들은 이 도시 덕분에 번성했다...


... 13세기에 저 유명하고 오래된 지중해 지역 상업망은 육로와 해로를 모두 이용해서 북유럽과 연결되었으며 양자의 무역규모도 점점 늘어났다. 13세기말에는 이탈리아 상인들은 모든 북유럽 지역에 거주하게 되었다.

북유럽 무역은 한 가지 색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모피를 제외하면, 이것은 본질적으로 대규모 저가품 무역이었다. 여기서도 역시 곡물은 주요 무역품목이었다. 잉여농산물을 생산하는 지역들(발틱해지역, 13세기초 영국, 프랑스의 일부 지역)은 플랑드르와 저지대국가들과 같이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고 식량도 부족한 지역에 곡물을 수출했다.


포도주도 북유럽의 주요 무역품목이었다. 자연환경의 질적 차이가 13세기에 점차로 포도주 주산지를 만들어냈다. Poitou, Gascony, 부르고뉴Burgundy와 모젤Moselle 등은 당시에 이미 독특한 품질을 갖춘 포도주를 생산하는 중심지였다. 이 세기에 포도주 무역은 유럽 전역에서 선박(특히 가스코니에서 영국으로 가는 선박)의 주요 고객이었다.


또다른 주요 무역품은 목재였는데, 이것은 건축에서 폭넓게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선박을 제조하거나 포장용 상자를 만드는 데도 이용되었다. 플랑드르처럼 목재가 부족한 지역은 여전히 울창한 북유럽 삼림지역에서 해로로 목재를 공급받았다.


아마도 북유럽 무역에서 모직물이 가장 비싼 품목이었을 것이다. 양모원단은 주로 영국에서 공급했으며 제조중심지는 플랑드르였다. 플랑드르와 인접한 브뤼즈, 이프르Ypres, 겐트, Douai 같은 도시들도 북유럽의 모직물 제조 중심지가 되었다. 아마도 우리는 브뤼즈가 알프스 서쪽의 가장 중요한 시장으로 성장하게 된 이유를 모직물 교역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01/ 이들 도시(이탈리아 도시)의 상인들은 해외무역을 추구하기 위해서 코멘다commenda와 소시에타스sociatas(전자는 '상거래 규칙', 후자는 '상사'나 '회사'로 옮길 수 있다)로 얄려진 계약체계를 고안해냈다. 양자 모두 트락타토르tractator(짐꾼이나 행상인으로 옮길 수 있음)로 불리는 동반자와 현지에 그대로 남는 투자 파트너-스탄스stans로 불린다-의 협력관계를 포함한다. 단 한번의 항해를 위한 이런 계약형태는 모두 자발적 연합에 따라 자본과 사업파트너를 확보하고 위험을 분산하고 줄이며 정보흐름을 개선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투자자도 제한된 부채만을 떠 안음으로써 이런 사업의 위험성을 좀더 줄일 수 있다. 이밖에도 해상대부the sea loan라는 계약형태가 해상 교역을 위해 존재했다). 따라서 코멘다와 소시에타스는 수익성 있는 해외 모험행위에 대해 접근방법을 개선시켰다.


예금은행deposit banking은 이 시기에 발전된, 또 하나의 2차 제도체계였다. 물론 이것은 로마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새로운 제도가 아니었지만 12세기말에서 13세기초에 다시 부활했다. 초기 로마법에서 물려받은 예금은행의 법률적 원리가 당시에도 여전히 존재했다. 이처럼 이 제도가 유럽에서 부활하고 환대받았다는 사실은 안전보장에 대한 욕구와 상업금융비융을 낮춰주는 자본시장에 대한 욕구가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났음을 입증하는 사례이다.


보험 역시 이 시기에 시작되는데,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이것은 해상교역의 확장과 연결된다. 이런 움직임의 주역은 이탈리아인이었다. 이 시기에는 전형적인 보상범위가 확정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선적 화물 가치의 일정비율로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우리는 1287년에 팔레르모의 한 공증인이 작성한 계약서 초안에서 최초로 알려진 보험대부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 이것은 시장 메커니즘의 이용범위를 위험을 분산시키는 데까지 확장시키면서 다른 도시들로 전파되었다...


예금은행이 개설되자 잇따라 신용팽창을 촉진할 수 있는 여타 제도들이 만들어졌다. 창조적인 사람들이 원거리교역에 이용되는 다양한 환어음과 직접 대부형태만이 아니라 이러한 대부금을 모으고 상환하는 메커니즘까지 고안해냈다...


상파뉴 정기시는 12-13세기에 프랑스의 중앙에 세워졌던 것으로 남유럽과 북유럽의 상업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 이것은 6개 정기시가 차례로 들어서는 하나의 순환주기를 이루면서 거의 일 년 내내 서유럽의 상업중심지이자 북유럽과 남유럽의 만나는 장소로 기능했다. 재화규모가 점점 더 늘어남에 따라 정기시는 국제 신용거래와 지불 메커니즘에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공간을 제공하면서 주요 국제무역시장이자 초기 국제자본시장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기서는 프로뱅Provins의 1sou, 혹은 12derniers를 기준으로 환산하여 외국통화와 바꿔주는 화폐교환시장도 발전했다... 여기서 차용자는 나중에 다른 장소에서 다른 통화로 상환받는다는 조건으로 먼저 현지 통화를 받았는데, 이는 모두 교역을 위해 고안된 제도체계(환전증서) 덕분이었다. 이런 초기 환어음형태는 당시 국제교역에서 거래비용을 전체적으로 낮추는 데 크게 공헌했다...


13세기에 주기적인 정기시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상설시장 - 주로 도시지역에 세워진 - 으로 대체되었다... 프랑스 왕국은 상파뉴 지역을 병합하고 나서 이 지역과 정기시에 엄청난 조세를 부과했다. 한편 이 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1275-1300년)에 이탈리아에서 저지대국가들에 이르는 직접적인 해상 무역로가 개통되자, 남유럽과 북유럽을 잇는 다른 무역로에 대한 거래비용이 줄어들었다.


상법에서 중요한 부분은 채무나 계약이행과 관련된 행위준칙의 발전이었다. 이러한 절차는 상호협정을 통하거나 시장 영역 내부에서, 또는 상인법정-중세의 교회법정 외부에 존재하던-을 통해 유지되었다. 상업이 확산됨에 따라 기본적인 상업관행 역시 확산되었다. 따라서 피사의 해양법은 13세기초에 바르셀로나 해양법-곧 바로 코드화된 올레론 헌장charte d'Oleron으로 바뀐-의 모델로 기능했으며, 이후에도 네덜란드와 잉글랜드에서 상법이 발전하는데 모델로 기능했다.


13세기에는 제조업보다 주로 상업상의 이유로 도시가 나타났다. 그렇지만 북적거리던 중세 무역업자들이 장원보다 도시에서 좀 더 좋은 품질의 제품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동업조합(crafts)이 도시중심지에 좀 더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모두 시장팽창으로 전문화가 가능해지고 후자는 다시 좀더 숙련된 노동자 집단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전문화는 더 나은 제품을 생산하여 그 가치를 입증함으로써 스스로를 직업길드로 굳히는 과정에 돌입했다...

길드가 자신의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영역이 넓어질수록 길드의 구성원이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은 더욱 제한되거나 특화되었다...

이런 분업의 확대는 매우 효율적이었기 때문에 플랑드르산 옷감이 점점 더 효율적으로 작동되는 시장시스템에 기대어 유럽 전역에서 상대적으로 덜 특화된 지역의 옷감제조길드의 제품가격을 낮출 수 있을 정도였다. 낮은 가격의 플랑드르 옷감이 점점 더 지역 정기시의 매장을 장악하게 되자 당시 막 태동하던 영국의 섬유산업이 특히 타격을 받았다. 실제로 숙련된 플랑드르인 이주민들은 12세기에 영국에서 섬유산업이 탄생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13세기에 중세 유럽사회는 상업성장으로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시장을 이용해서 자원을 배분하는 비용이 상당히 떨어졌다...


따라서 13세기에 영주는 이중의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화폐소득의 실질가치를 떨어뜨리는 물가수준의 상승이라는 문제에 대처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구증대로 자신의 토지가치가 상승했지만 그 이익이 고정지대 아래서 자신이 아니라 소작농에게로 돌아가는 상황에 대처해야만 했다... 영주로서는 기존의 계약체계에 따라 계약조건을 번번이 재교섭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직영지를 직접 경작하는 방식으로 복귀함으로써 자신의 공인된 권리를 행사하는 편이 훨씬 더 비용이 적게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추론은 시장경제가 존재하고 노동의 실질가치가 떨어진 상황에서 노역의무가 영지경작 수단으로 다시금 등장하는 외관상 역설처럼 보이는 현상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농업부문에서 나타났던 모든 제도변화가 효율성 상승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다... 13세기 영국에서 전체 토지 중 자유롭게 보유할 수 있는 것이 몇 퍼센트였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세기에 자유인-영주에 대한 의무가 고정되고 특화되었던-이 보유한 토지를 자유롭게 양도할 수 있게 되었다.

글랑빌Glanvil이 통치하던 시절(1180년대)에는 이것이 불가능했으며 대여라는 속임수 형태를 이용해서 토지를 전매했다. 그러나 13세기말에 이르러 자유토지보유자들은 구매자가 판매자를 대신한다는 대체substitution방식으로 토지판매권을 획들했다. 이에 따라 영국법에서 사유재산권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조항-영유권right to enjoy과 양도권-이 확립되었다...

... 1235년의 머튼Merton법과 1285년의 웨스트민스터Wesminster 법이 그것이다. 장원의 영주들은 이것들을 이용해서 소작농들에게 나눠줄 토지가 충분히 남아 있는 한, 미경작지를 종획enclosure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영주들은 이전에는 모든 거주자들에게 귀속되었던 장원 토지의 상당부분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토지 양도권right to transfer land은 계속된 주요 쟁점 중의 하나였다. 중세법은 토지소유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았다...

토지양도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대체와 전봉subinfeudation이 그것이다... 분쟁이 나타났을 때 영주는 오로지 자신의 소작인에 대해서만 반대할 수 있었다... 소작인이 사라져 버리면 직속영주는 자신의 부대조항을 잃기 쉬웠다. 왜냐하면 영주는 실제로 토지를 점유한 사람(소작인의 소작인)에 대해 법률차원의 청구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작인이 자유인인 경우에 이러한 상황이 특히 자주 일어난다... 1217년 대헌장의 개정판에서... 13세기에 궁정재판소King's court에서 일련의 조치들이 나타났는데, 이것들은 점차 자유인들에게 장원영주의 허가 없이도 대체를 이용해서 (토지를) 양도하는 것을 허용했다. 1290년의 뀌아 엠포토레스Quia emptores법은 이미 관행으로 확립된 것을 단지 확인해준 것일 뿐이었다. 이 법은 특히 전봉을 금지했다. 흥미롭게도 이 권리(토지양도권)는 132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두머리 소작인(영주나 귀족)에게로 확장되었다.


영국에서 자유토지보유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무조건 봉토지 소유에 접근하는 소유권을 확보하면서 자신들의 토지 전체를 양도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했는지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다. 영국은 노르만의 정복 이후에 당시 어떤 중세세계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중앙집권화된 정부를 만들어냈다... 13세기에 궁정재판소는 점차 장원재판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신의 관할권을 더욱 확장했다... 궁정재판소가 자유인에 대해 관할권을 갖는다고 승인해준 것이었다. 이제 자유인은 의무가 엄격하게 규정된 사람으로 정의되었다. 장원의 영주는 자유인들에 대한 관할권을 상실하자마자, 이들이 보유한 토지에 대한 통제권도 잃어버렸다... 13세기에 대륙은 일반적으로 토지소유권의 발전측면에서 영국에 뒤쳐졌다.


... 가끔 국왕은 강제로 부유층들을 소집해서 이들에게서 특별세를 징수했다. 이것이 바로 대의제의 시초였다. 흔히 부자들은 이러한 소환을 통해서 과세를 받아들이는 대가로 특권을 보장받고 권한을 위임받았다. 우리는 이후 세기에서 영국의회가 이런 출발점에서 시작해서 점차 재정문제를 통제하는 쪽으로 진화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3세기초에 국왕은 다양한 소득원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봉건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까지 국왕의 수입은 대부분 현물형태였다...



제7장 14세기와 15세기


139/... 베니스의 무역은 14세기에 줄었다가 15세기에 다시 성장했지만 15세기 후반에 다시 시들기 시작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플로렌스의 거대한 모직물산업도 14세기에 쇠퇴했다. 롬바르디에서 투스카니로 금융업 중심지가 이동했지만 14세기에는 이 지역도 커다란 실패를 경험했다. 금융업의 부흥은 15세기에 메디치가의 번영으로 이어졌으며 플로렌스를 거대한 금융업 중심지 - 유럽전역에 지점을 거느린 - 로 만들었다...


146/ 이 시기는 1302년 꾸르뜨레Courtrai 전투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중무장한 채 말탄 프랑스 기사집단의 주력부대가 밀집대형을 갖춘 플랑드르 창병에게 살육당했다. 이는 중기병이 우월했던 시대의 마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백년전쟁 동안에, 특히 크레시Crecy 전투(1346), 쁘와티에Poitiers 전투(1356) 그리고 아쟁꾸르Agincourt 전투(1415)에서 영국의 대궁longbow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면서 프랑스군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다... 1453년 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영국의 궁병과 창병에 맞서 참호를 파고 그 안에 포대를 배치했다. 프랑스군은 승리했다. 대궁의 위력에 종말을 알리는 성공이었다... 영국의 궁병이 프랑스군의 천적이었다면, 잘 훈련된 대열을 갖춘 스위스 창병은 서유럽을 통틀어 접근전에서 가장 뛰어났으며 무장한 중세기사의 효율성을 감소시켰다.

화약무기는 개선속도가 느렸지만, 터키군이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돌파하자(1453), 낡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15세기말에는 대포와 (효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개인용 총기가 군사기술을 변형시켰다.


화폐경제의 성장은 전문인력-제노바의 석궁병, 영국의 대궁병, 스위스와 독일의 창병-의 발전을 촉진했을 뿐 아니라 전문화된 용병부대를 수익성 있는 사업으로 변모시켰다... 이 시기에 상비군이 점차 용병을 대체했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1445년에 (귀족으로 구성된) 친위부대를 창설했다...


... 영국과 달리, 프랑스에서는 전국대의기구national representative bodies와 지역대의기구가 인두세 통제권을 (국왕에게) 양도했다. 이 기구를 구성하고 있던 귀족과 성직자들은 (인두세 납부의무를) 면제받았으며, 이들 중 일부는 이 조세에 귀속된 이자를 받았다. 이들은 자신의 지역에서 세금을 징수할 의무를 지고 있었으며, 종종 그 일부를 가져갈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이 국왕에게 요구했던 연금이 이 조세에서 지불되었다. 일반의회Estates General의 과세권상실은 의미심장한 결과를 초래했다...


... 영국에서 국왕수입을 엄청나게 증가시킨 것은 해외무역이었다... 13세기에 주요 수입원은 모직물세였다...

에일렌 파워Eileen Power는 모직물교역과 관련된 세 집단(수출업자, 의회가 대변했던 양사육업자, 국왕)이 합의에 이르게 된 과정을 능숙하게 설명했다. 이러한 합의를 통해 특권staple 상인들은 수출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하고 칼레Calais에 창고를 마련했으며 의회는 과세권을 얻었고 국왕은 수입을 얻었다. 프랑스와 달리, 영주와 상인처럼 정치권력을 가진 계층이 납세부담을 안았다. 우리는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이래로 영국에서 국왕이 어쩔 수 없이 수입과 특권을 교환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제3부 1500~1700


제8장 재정정책과 소유권



제9장 근대초기


182/ 봉건주의는 1500년에 사라져 버렸지만... 자본주의는 아직 태동하지 않았으며 250여 년 지나서 비로소 산업혁명이 만개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러한 시간 간극을 메우기 위해 '조기 자본주의(nascent capitalism)'나 '상업 자본주의'라는 개념이 고안되었다.


192/... 16세기 초에 이러한 무역의 중심지는 여전히 북부 이탈리아 지역이었다... 유럽의 나머지 지역들은 지중해지역 제품과 동방의 고가상품을 이 도시들로부터 공급받았다...


195/... 중세에는 지중해 상인들이 이런 사치품에 대해 독점권을 쥐고 있었지만 16세기 초에 포르투갈은 여기에 도전했다... 17세기에 네덜란드는 사치품 교역에서 베니스의 우위를 붕괴시켰는데, 이는 폭력의 산물이 아니라 선박과 경제조직에서 모두 효율성을 향상시킴으로써 가격경쟁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16세기 북유럽 상업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저지대국가들 그리고 발틱해 지역국가들을 연결하는 것으로 처음에는 지중해 교역의 축소판이었다...


아직까지 북유럽에는 베니스나 제노바에 필적할 만한 도시지역은 없었지만, 16세기초에 해상무역에 특화된 두 개의 도시집단이 나타났다. 북부독일의 한자동맹 도시들과 네덜란드의 항구도시들이 그것이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안트워프가 브뤼헤 항에 해적토가 쌓이면서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여 전쟁으로 파괴될 때까지 16세기 북유럽의 주요 무역항으로 기능했다. 세기말에 이르러 해안을 따라 몇 마일 북쪽에 있는 암스테르담이 안트워프를 대체했다.


북유럽에서는 내한성을 지닌 한대지역산 곡물, 소금, 절인 생선, 모직옷감, 모피 그리고 목재 등이 주로 교역되었다. 곡물은 수입국-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공업지역-과 수출국-프랑스와 발틱해 지역국가- 사이에서 정기적으로 교역되었다...



제10장 프랑스와 스페인 - 뒤쳐진 국가들


226/ ... 엘리어트는... 요약한다. '이 경제체제의 본성은 사람들을 학생 아니면 승려, 거지 아니면 관료로 내모는 것이었다. 그밖의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11장 네덜란드와 성공적인 경제성장


235/ 1500년 이후에 발틱해 지역의 목재교역과 같이 특화교역이 발전하자 대규모 선박이 경제적인 것이 되었다. 해적의 소탕과 감소, 국제화물량의 팽창, 해상보험의 발전 등이 한꺼번에 나타나면서 무역로에서 대규모 선박이 좀더 경제적인 것이 되었다...

운송산업에서 생산성이 향상된 것은 대부분 혁신의 확산 때문이었다. 플루트flute라 불리는 새로운 화물운송선의 발전은 중요한 진보였다... 이 선박은 1595년 무렵에 네덜란드에서 개발되었지만... 플루트는 선박규모를 줄일 목적으로 화물공간과 조작의 단순화를 시도했으며 이를 위해 (대포의 무게와 반동, 그리고 다른 무기와 복잡한 설비장치의 무게를 동시에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보강건조방식을 포기했다...


16세기와 17세기에 상업조직에서 기존의 중앙집중화된 독일기업이나 이탈리아 가족기업보다 훨씬 더 유연하게 수익성 있는 상업기회를 공동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새롭게 나타났다. 공동출자회사the share company와 위탁매매인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239/ 1312년 교황 클레멘트Clement 5세가 이자조건부 대출을 금지한 이후로 효율적인 자본시장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마침내 1543년에 샤를 5세가 이자조건부 대출을 승인했다...


... 채무증서the letter obligatory는 미래 시점까지 지불을 연기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여기에 금액, 일자, 장소 등이 명기되었다. 이것은 I.O.U와 비슷했다.

점차 'U'를 대신해서 '소지자에게 지급함payable to bearer'이라는 문구가 씌어졌다... 이것은 양도증서assignment라고 불렸으며 또 다른 지급수단이 존재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발전이었다. 양도증서를 널리 유통시키려면 이서endorsement에 대해 법적 권리를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 1537년에 이것은 네덜란드 전역에서 법으로 정착했다. 그후 국가가 양도증서의 원리를 집행했다. 상인들은 자연스럽게 이 증서를 할인하기 시작했다...

또한 환어음에서도 양도증서의 원리가 이용되었다...

마침내 이런 관행으로부터 예금은행이 발전했다. 암스테르담의 외환은행의 경우, 정부가 예금에 대한 최종보증인이었다. 이것은 예금에 대해서 결코 이자를 지급하지 않았지만 안전했는데, 혼란기에는 이런 사실이 결코 적은 이점이 아니었다.


따라서 상인들이 활용할 수 있는 지불수단이 물물교환이나 현금에서 거치불수단으로 확장되었다...



제12장 영국


251/ 17세기초에 영국정부의 역사는 에드워드 코크 경(Sir Edward Coke)의 생애와 복잡하게 얽혀있다. 관습법을 영국 최고의 법이라 주장하면서 계속해서 제임스 1세를 화나게 만든 인물이 바로 코크였다. 1620년대에 의회의 반대를 주도한 인물도 코크였다. 이 집단(코크경을 추종하는 집단)은 상법의 발전에 대한 관습법의 통제권을 확보했다. 마침내 그는 의회의 반대를 주도하면서 의회와 관습법의 동맹을 확고하게 만들었다.


코크는 자신의 저작에서 국왕의 독점 허가권만이 아니라 배타적 교역특권의 존재에 대해서도 공격했다...


... 1624년 독점조례는 국왕의 독점을 금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진정한 혁신을 장려할 수 있는 특허체계까지 담고 있었다...


261/ ... 초기 유인정책과 보호조치는 1331년에 하인과 도제를 이끌고 영국으로 건너온 플랑드르 직조공인 존 켐프와 직공협회Weaver's Mystery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취해졌다... 곧 이어 국왕은 다른 옷감제조업자들에게 영국의 다른 지역에서 제조업체를 설립하는 것을 허용했다. 대륙으로부터 새로운 혁신기술을 가져오도록 외국인을 유인하는 정책이 다른 영역-광산업, 금속세공업, 비단제조업, 리본직조업 등-으로 확산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독점특권을 55개나 하사했는데, 이 중 21가지는 외국인이나 귀화한 신하에게 제공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비누, 토지 준설 및 배수 기계, 오븐 및 화로, 오일, 가죽, 연마기, 소금, 유리, 음료수용 컵, 물을 끌어올리는 강력한 펌프, 종이 등의 제품을 생산하는 일에 대한 특권이 포함되었다. 아울러 철 제련, 곡물 제분, 평지기름oil from rape seed추출, 옷감을 손질하고 염색/ 광택내는 일 등과 관련된 공정기술을 도입하는 것에 대한 특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Note:

Douglass C. North and Robert Paul Thomas, The Rise of the Western World - A New Economic History -

서구세계의 성장, 이상호 역, 자유기업센터, 199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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