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필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은 작화가 멋져서 좋아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아이들과 함께 보기 위해 정규판 또는 해적판으로 구입하여 자주 보았다. 아이들은 일본 애니보다는 영미권 영화나 애니를 좋아했는데, 나는 일본 애니가 더 좋았다. 이미 서구화된 내 아이들은 영미권 영화나 애니가 더 친숙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옛날 감성의 나에게는 일본애니의 19세기 낭만이 더 잘 와닿았다.
<천공의 성 라퓨타>가 <걸리버여행기> 3부에 나오는 이야기인지는 전혀 뜻밖이었다. <걸리버여행기>에서 소인국과 대인국의 모험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어서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그 후속인 3부와 4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따라서 나는 1980년대 대학시절에 나의 고답적 아취를 만족시키기 위해 삼중당 문고판으로 성인용 <걸리버여행기>를 새로 읽어주는 수고를 마다 하지 않았다.
지금에도 생각나지만, 그 삼중당 문고는 원문 그대로의 내용(당시 영국 현실의 풍자판으로 저자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잘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인데다가, 일본어 중역판의 이단 세로쓰기이어서 독서광을 자처하는 나에게도 그것은 전혀 즐겁지 않은 고행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말 형상의 고등생물이 나오는 4부는 그나마 흥미로운 부분이 꽤나 있었던 것 같은데, 3부는 워낙 재미가 없어서 내 머리 속에 아무런 기억의 잔상도 남겨 놓지 않았다. 따라서 <천공의 성 라퓨타>를 처음 볼 때, 나는 <걸리버>를 전혀 연상하지 못하였다.
<걸리버여행기>는 1999년에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고전총서로 출판되어 본격적인 한국어 직역본의 시대를 맞이하였는데, 그때 나는 일순의 주저도 없이 절판을 염려하는 기우로 일단 구입해두었다. 이런 식으로 <걸리버여행기> 외에도 1차산업혁명 이전 및 이후 시대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상징하는 <15소년 표류기>, <로빈슨 크루소>, <80일간의 세계일주>, <해저 이만리> 등의 모험 소설들이 내 서가의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가를 정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은 읽어보려고 <걸리버여행기>의 3부를 펼쳤다.
책장을 넘기니, 미지의 바다를 표류하는 걸리버가 하늘에 떠다니는 섬, 라퓨타로 구조되는 장면이 나온다. 문득 <천공의 성 라퓨타>가 떠올라 바로 넷플릭스로 <천공의 성 라퓨타>를 다시 시청하였다. 감상 모드로 집중해서 보니 영화에서 이미 <걸리버여행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풍자의 <걸리버>가 반전(反戰)의 <라퓨타>로 변신하여 주제와 내용이 완전 달랐기 때문에 전혀 눈치를 못챘던 것 같다. 섬의 비행하는 동력으로 <걸리버여행기>에서는 당시 첨단과학 이론에 해당하는 자석의 전기력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는 아예 초고대문명의 비행석*이라는 상상의 원석(原石)을 제시하고 있다.
라퓨타의 왕족들이 섬에 되돌아올 때까지 70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라퓨타에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와 <천공의 성 라퓨타>의 로봇들만 남아있는 시대를 연결하는 합리적인 시간 간격 설정일 수도 있다. 나의 유년기의 <걸리버>와 아이들의 유년기의 <라퓨타>가 또 하나의 시대를 격하여 겹치면서 내게 아련한 추억의 여운을 남긴다. 이 묘한 상념에 젖어 나는 한동안 즐거울 것이다.
(2024. 8. 28.)
Note:
*이 비행석은 <아바타> 영화 속 우주 탐험의 주요 동기인 ‘언옵타늄’으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이 경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무슨 감춰진 연결고리를 발견한 듯 신난다. (2024.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