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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Aug 28. 2024

천공의 성 라퓨타

조영필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은 작화가 멋져서 좋아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아이들과 함께 보기 위해 정규판 또는 해적판으로 구입하여 자주 보았다. 아이들은 일본 애니보다는 영미권 영화나 애니를 좋아했는데, 나는 일본 애니가 더 좋았다. 이미 서구화된 내 아이들은 영미권 영화나 애니가 더 친숙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옛날 감성의 나에게는 일본애니의 19세기 낭만이 더 잘 와닿았다.


<천공의 성 라퓨타>가 <걸리버여행기> 3부에 나오는 이야기인지는 전혀 뜻밖이었다. <걸리버여행기>에서 소인국과 대인국의 모험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이어서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그 후속인 3부와 4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따라서 나는 1980년대 대학시절에 나의 고답적 아취를 만족시키기 위해 삼중당 문고판으로 성인용 <걸리버여행기>를 새로 읽어주는 수고를 마다 하지 않았다.


지금에도 생각나지만, 그 삼중당 문고는 원문 그대로의 내용(당시 영국 현실의 풍자판으로 저자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잘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인데다가, 일본어 중역판의 이단 세로쓰기이어서 독서광을 자처하는 나에게도 그것은 전혀 즐겁지 않은 고행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말 형상의 고등생물이 나오는 4부는 그나마 흥미로운 부분이 꽤나 있었던 것 같은데, 3부는 워낙 재미가 없어서 내 머리 속에 아무런 기억의 잔상도 남겨 놓지 않았다. 따라서 <천공의 성 라퓨타>를 처음 볼 때, 나는 <걸리버>를 전혀 연상하지 못하였다.


<걸리버여행기>는 1999년에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소 고전총서로 출판되어 본격적인 한국어 직역본의 시대를 맞이하였는데, 그때 나는 일순의 주저도 없이 절판을 염려하는 기우로 일단 구입해두었다. 이런 식으로 <걸리버여행기> 외에도 1차산업혁명 이전 및 이후 시대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상징하는 <15소년 표류기>, <로빈슨 크루소>, <80일간의 세계일주>, <해저 이만리> 등의 모험 소설들이 내 서가의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가를 정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은 읽어보려고 <걸리버여행기>의 3부를 펼쳤다.


책장을 넘기니, 미지의 바다를 표류하는 걸리버가 하늘에 떠다니는 섬, 라퓨타로 구조되는 장면이 나온다. 문득 <천공의 성 라퓨타>가 떠올라 바로 넷플릭스로 <천공의 성 라퓨타>를 다시 시청하였다. 감상 모드로 집중해서 보니 영화에서 이미 <걸리버여행기>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풍자의 <걸리버>가 반전(反戰)의 <라퓨타>로 변신하여 주제와 내용이 완전 달랐기 때문에 전혀 눈치를 못챘던 것 같다. 섬의 비행하는 동력으로 <걸리버여행기>에서는 당시 첨단과학 이론에 해당하는 자석의 전기력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는 아예 초고대문명의 비행석*이라는 상상의 원석(原石)을 제시하고 있다.


라퓨타의 왕족들이 섬에 되돌아올 때까지 70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걸리버여행기>에 나오는 라퓨타에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와 <천공의 성 라퓨타>의 로봇들만 남아있는 시대를 연결하는 합리적인 시간 간격 설정일 수도 있다. 나의 유년기의 <걸리버>와 아이들의 유년기의 <라퓨타>가 또 하나의 시대를 격하여 겹치면서 내게 아련한 추억의 여운을 남긴다. 이 묘한 상념에 젖어 나는 한동안 즐거울 것이다.

(2024. 8. 28.)



Note:

*이 비행석은 <아바타> 영화 속 우주 탐험의 주요 동기인 ‘언옵타늄’으로 이어진다고 하는데, 이 경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무슨 감춰진 연결고리를 발견한 듯 신난다. (2024.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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