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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Aug 31. 2024

경도와 리그

조영필

<걸리버여행기> 3부에 보면, 걸리버는 영국에서 출발하여, 인도의 마드라스를 거쳐 베트남의 통킹만에 이르런다. 여기서 다음 항해를 위한 비용을 일부 마련하기 위해 인접 지역과의 교역에 나서는데 풍랑을 만나고 또 해적을 만나게 된다. 결국 그는 해적에 의해 무인도에 버려지게 되고 여기서 하늘을 나는 섬, 라퓨타에 의해 구조된다. 그런데 걸리버는 해적선을 보기 한 시간 전에 자기 배의 위치를 측정하였었다. 그 위치가 북위 46도, 경도 183도이다.


북위 46도라면, 우리나라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것이지만, 경도 183도는 이상한 좌표이다. 지구의 경도는 BC 2-3세기부터 360도로 합의되었고, 본초자오선 기준으로는 동경 180도와 서경 180도까지로 표시된다. 1726년에 출간한 <걸리버여행기>의 필자는 16년 7개월간의 여행의 기록이라고 적고 있다. 또 <걸리버여행기> 저술의 아이디어는 조나단 스위프트가 참여한 토리(Tory)당 문사들의 친선 모임인 스크리블레루스 클럽(Scriblerus Club)에서 1714년 초 마티누스 스크리블레루스(Martinus Scriblerus)라는 가공의 인물을 통해 세계의 먼 나라를 방문하여 듣고 본 바를 바탕으로 풍자작품을 만들려는 기획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여행의 배경시기는 1714-25년경이다.


마침 1714년에는 영국에서 경도법을 제정하고 있다. 경도법이란 국적을 불문하고 경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 2만 파운드(오늘날 수백 만 파운드에 해당)를 포상하는 법이다. 법에 따라 과학자, 해군 장교, 정부 관료 등으로 구성된 최고 수준의 심사위원단(경도심사국)이 결성되고, 당대 최고의 과학자인 뉴턴(Isaac Newton)과 애드먼드 핼리(Edmund Halley)가 경도심사국 자문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소위 경도인(longitudinarian)으로 불린 수많은 사람들이 해결책을 제시하였으나 모두 하루 오차 6초 이하라는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드디어 1761년 무학의 시계공 존 해리슨이 제작한 해상시계 크로노미터 제4호가 81일의 항해에서 5초의 오차를 기록하여 마침내 1773년 소정의 상금을 받으며, 경도 측정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당연히 그 이전 시기인 걸리버의 경도 측정은 정확성이 그리 높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걸리버 시대에는 경도를 측정할 때 180도를 넘어도 되었을 것 같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태평양의 경우 동쪽에서보다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더 많이 항해 이동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경도 183도를 서경 177도라고 환산하여 이해하면 그만인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적도를 기준(0도)으로 하는 위도와 달리 경도의 기준선(본초자오선)은 마땅한 과학적 근거가 없어 더욱 어렵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그의 <지리학>에서 세상의 서쪽 끝으로 여겨지던 포처니트 제도(카나리아 제도마데이라 제도)를 지나가는 선을 기준점으로 삼았다. 이후 지도를 만드는 사람에 따라 나라에 따라 그 기준은 달라졌다. 아조레스 제도를 비롯해 로마, 코펜하겐, 예루살렘, 상트페테르부르크, 피사, 파리, 필라델피아가 모두 본초자오선의 기준점이 됐던 전력이 있다. 결국 1884년이 되어서야 그리니치 자오선이 국제협정에 의해 지구 경도의 원점으로 확정되었다.


대항해시대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비유럽의 새로운 개척지역의 선점권을 다투면서 지구를 세로로 금긋고 교황에게 보장받던 시기가 있었다.


포르투갈이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에 이의를 제기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시 포르투갈은 알카소바스 조약(1479년)을 맺어 이사벨의 왕위계승 및 카나리아 제도의 영유권을 카스티야에게 승인하는 대신, 카나리아 제도 이남에서의 항해와 식민지 개척의 독점적인 권리를 보장 받았다. 그러나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하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스페인이 새로 개척한 아메리카의 영토가 위도상 카나리아 제도의 이남이었기 때문이다. 양국은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게 중재를 요청한다. 교황은 아조레스 제도에서 서쪽으로 100리그(서경 38도) 떨어진 지점과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으로 100리그(서경 31도) 떨어진 지점을 경계로 하여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의 영토로 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때의 기준선을 교황자오선이라고 한다.


이러한 스페인 출신 교황의 중재에 불만을 품은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스페인과 직접 1년여의 교섭을 진행한다. 그리하여 양국은 새로운 조건의 토르데시우스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카보베르데 제도의 서쪽으로 370리그(서경 46도) 떨어진 지점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그은 선을 경계로 하였다. 이는 기존의 교황자오선에 비해 서쪽으로 270리그(약 1,300㎞) 이동한 것이다.


여기서 리그(레구아)의 단위가 궁금했는데, 위도나 경도의 1도를 해리로는 60해리라고 정의할 때, 리그로는 20리그이다. 보통 인터넷을 검색하면, 서경 38도 지점에서 서경 46도로 변경이 되었는데(경도는 8도 이동), 거리는 270리그(1,300km) 이동이라고 되어있다. 1도를 20리그라고 이해할 때, 산술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제 교황자오선이 남북으로 완전한 직선이 아니고 북쪽의 아조레스 제도와 남쪽의 카보베르데 제도의 두 기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270리그라는 거리 이동은 남쪽의 카보베르데 제도 기준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에서 '리'는 '리그(레구아)'를 의역한 것이라고 한다. 대항해시대에 자주 나오는 '리그(레구아)'라는 해상 거리의 단위를 걸리버도 자주 기록하고 있어, 독서 중 해상 좌표가 나오면 답답하기 그지 없었는데, 이렇게 한 번 정리하고 보니 비로소 머리가 뻥 뚫리는 듯 상쾌하다. 이제 다른 주제로 관심을 돌려도 되겠다.

(2024.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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