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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필 Zho YP Oct 14. 2024

종교와 정치의 궁합

조영필

종교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종교가 경쟁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종교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으며 또한 세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볼 때는 같은 종파 같아 보여도 내부에서는 서로 다른 신념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종교를 나누는 그 기준이 매우 애매할 뿐만 아니라, 종교의 생멸 또한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생기고 또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실 같은 종교를 믿는다 하더라도 개인간의 편차가 있다는 일부의 주장을 감안한다면, 종교는 인류의 인구수만큼 많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종교는 살아남고, 어떤 종교는 사라진다. 어떤 종교의 세력은 강대하고 어떤 종교의 영향력은 줄어든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그 종교의 가르침의 질적 수준 차이일까? 아니면 다른 요인이 있는 것일까?


각 종교를 창시한 성인의 수준은 너무 고매하고 그 가르침의 수준은 또 인간 이성의 수준을 넘는 것이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그 차이를 분별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무언가 현세적으로 강한 종교와 약한 종교를 가르는 어떤 요인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그 종교간의 우열을 가르는 각 종교의 경쟁력의 핵심 요인은 무엇일까?


종교의 경쟁력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정치체제와의 결합력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결합력은 당연히 그 정치체제가 현실정치에서 서로 다른 종교를 채택한 국가 또는 사회집단과의 경쟁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의 가장 성공한 사례로 우리는 로마제국과 기독교의 결합을 떠올릴 수 있다. 서기 312년 예수의 환시*를 본 콘스탄티누스는 그 다음날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경쟁자인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서방 로마정제의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그는 동방정제 리키니우스와 협의하여 서기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공인에 이어 서기 380년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테오도시우스는 이듬해에 아나타시우스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기독교의 핵심 교의에서 예수의 신격을 확고히 한다.** 이때 아타나시우스파의 승리 이유를 후세 학자들은 제국황제의 입장에서는 아리우스파에서 주장하는 예수의 인격과 그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보다는 아타나시우스파에서 주장하는 예수의 신격과 그의 후계자로서의 지위가 그의 통치권의 신성한 후광에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본다.


훗날 서유럽에서는 서기 800년경 이후 로마 교황(감독에서 교황으로 신분 상승)의 출현으로 교황과 황제 간의 구별이 있게 되지만 (그 이전에는 동로마황제가 교황의 역할을 겸함), 교황의 역할이 없는 황제나 왕권이라 하더라도 신의 대리자인 교황에 의한 성스러운 도유의식으로 기독교는 그 왕좌의 신성함을 여전히 하늘로부터 보증하였다.


이에 반해 기독교에 필적할 만큼 막강한 교세를 자랑하는 이슬람교에는 칼리프와 술탄이 있다.*** 칼리프는 법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술탄은 세속의 지배자이다.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칼리프와 술탄 간의 신성한 상호 보증의 체계적 역학 관계의 역사는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칼리프 시대에서 술탄의 시대로 넘어갔을 뿐이다. 그리고 일본의 신도에는 천황과 쇼군이 있다. 천황과 쇼군의 관계도 이슬람의 칼리프와 술탄 간의 관계와 비슷하나, 다행히 일본의 무사들은 서구화 단계에서 천황의 역할을 활용하여, 군주정으로 그리고 패전 후에는 입헌군주정으로의 의미있는 이행을 실행한 점이 조금 다르다.


그외의 다른 종교문화권에서 종교가 보증하는 왕권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힌두교와 불교에는 전륜성왕 사상이 있다. 대표적인 전륜성왕에는 인도의 아쇼카왕이 있으며, 대부분의 불교국가에서 왕들은 전륜성왕을 표방하였다. 중국과 북방유목민들에게는 천자 또는 천손의 후예인 칸이 있었다. 이러한 천손의식은 유교의 훈도를 받으며, 왕도사상으로 순화되어 견제되었다. 즉 세상에는 베드로의 후계자와 술탄과 전륜성왕 그리고 천자와 천손과 천황이 싸웠는데, 가장 성공한 권력은 베드로의 후계자들이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베드로의 후계자들이 가장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왕권을 보증하는 신성함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현명한 통치로 그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 받아야 하는 전륜성왕이나, 천손의 족보로 포장해서 이어져야 하는 중국의 천자에 비해 도유를 통한 왕권신수설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보다 더 유리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서유럽에는 교황과 왕권의 분리와 긴장구조의 역사가 있었다. 두 개의 권력, 신권과 속권의 이원적 권위와 그에 따른 상호간 경쟁은 보다 더 진일보한 정치체제를 낳을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슬람의 실패는 칼리프와 술탄 간 적절한 힘의 균형을 만들지 못한 역사적 정치적 구조에 있으며, 일본의 성공은 그와 정반대로 그 관계를 서구화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다른 종교권의 국가들은 이러한 이원성을 구축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근대정치체제로의 발전을 꾀하기 힘들었다.


종교의 영향력, 그것은 그의 교리가 영향을 준 국가의 힘에 의해 결국 세계화되거나 도태되었다. (2024.10.14)


Note:

* 당시 교부이자 교회사를 집필했던 에우세비우스(Eusebius, 263~339)는 콘스탄티누스로부터 직접 들었다는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황제는 석양이 질 무렵,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 문양을 보았다. 십자가에는 ‘이것으로 승리하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던 그는 잠이 들었고 그때 그리스도가 찾아왔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문양을 그에게 건네며 적과 싸울 때 사용하라고 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이 십자가 상징을 깃발에 새긴 후 전투에 나섰고, 결국 승리를 거뒀다. 이 문양이 십자가 문양이었는지, 또는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키로(Chi-Ro; PX) 문양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가톨릭신문, 2010.8.31)


**324년 동방과 서방의 유일 황제의 지위에 오른 콘스탄티누스는 공인된 종교의 내부적 이견을 제거하기 위해 서기 325년 니케아에서 첫 번째 종교회의(공의회)를 개최한다. 이때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의 대결이 있었다. 그것은 예수의 인격을 주장하는 아리우스와 예수의 신격을 주장하는 알렉산더와 그의 수행원 아타나시우스 간의 논란이었다. 그리고 첫 회의의 결론은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아리우스파의 의견을 이단으로 하는 니케아 신조를 공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집회에 참석했던 교회 대표는 전체 318명이었는데, 비록 니케아 신조를 합의하여 선포하기는 하였으나, 참석자의 대다수는 유세비우스의 중도파로서 그 신조의 내용과 의미를 모두 정확히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 60여 년간 아리우스파의 권력 시기에 알렉산더의 후계자인 아타나시우스는 5차례나 감독직을 박탈당하고 17년간 유배생활을 하여야 했다. 그러나 서기 379년 아나타시우스파의 테오도시우스가 황제위에 오르고, 이듬해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후, 그는 서기 481년에 다시 콘스탄티노플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통해 니케아의 신앙고백(Nicene Creed)을 재확인한다. 이로써 예수의 신격은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한 로마제국의 수도(콘스탄티노플)에서 비로소 영구히 확정되었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 그리고 칼케돈의 공의회(서기 451년)에 이르기까지 계속 패퇴한 아리우스파의 입장은 유럽 게르만에 대한 포교와 북아프리카 및 레반트 지역에서의 기존 영향력으로 그 세력을 유지하다가 8세기 초에 로마가톨릭과 교황의 게르만 왕들에 대한 체계적 선교에 밀려 서유럽에서 쇠퇴하는데, 북아프리카와 레반트 지역에서도 이슬람의 진출 후 거의 소멸하게 된다. 7세기에 아라비아반도에서 갑자기 탄생한 이슬람교와 그 단성론의 교의는 아리우스파의 교의와 일정한 영향 관계가 있을 것으로 일부 학자들은 제안한다. (교회와신앙, 2024.1.31; 네이버블로그 iam1810, 2016.11.22; J.N.D.  켈리, <고대 기독교 교리사>, 경기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앞블로그 참조; 나무위키, 아리우스파.)


***이슬람에서 지도자를 뜻하는 대표적인 용어가 칼리프와 술탄이다. 흔히 칼리프는 종교지도자, 술탄은 정치지도자로 통한다. 칼리프는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 사후에 그를 대리하는 인물에게 부여된 칭호다. 술탄은 칼리프가 통치하는 지역의 통치자를 의미하며, 칼리프보다 나중에 등장했다. 다시 말하면 술탄을 임명하는 지위에 있는 자가 칼리프다. 그러나 오스만제국(1299~1922) 시기 두 지위가 역전됐다. 이때부터 술탄은 이슬람 최고 지도자를 뜻했다. 보통은 1922년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무너진 오스만제국의 군주를 의미한다. 623년 동안 36명이 이 칭호를 받았다. 오스만제국이 무너지면서 술탄이라는 용어도 사실상 사라졌다. 지금은 오만과 브루나이가 정부 형태로 술탄제를 유지하고 있고,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의 일부 부족 지도자들이 술탄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경향신문, 2017.4.17)


흔히 오스만 제국의 황제를 지칭할 때 술탄-칼리프라고 지칭하고는 합니다. 그런데 이 용어는 엄밀히 말하면 분명 잘못된 용어입니다. 오스만 제국의 군주는 술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술탄은 황자(Prince)에게 붙는 칭호이지 황제에게 붙는 칭호가 아닙니다.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파디샤(Pad-e-shah),즉 '왕들의 주인' 이라는 명칭을 썼습니다. 즉 왕의 왕, 황제라는 뜻입니다. 술탄이라는 명칭을 쓴 것은 오스만 제국이 황제국으로 격상되기 전까지인 무라트 2세 때까지로,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의 황제를 술탄으로 지칭할 때에는 반드시 술탄 에스 셀라틴(Sultan-es-selatin), 즉 술탄중의 술탄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목이 날아갔습니다. 칼리프는 법왕이라는 뜻으로 이슬람 세계의 교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orbi.kr, 2016.3.7)


술탄은 이슬람 세계에서 정치 지도자를 뜻하는 명칭의 하나로 힘을 의미하는 슐타나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슬람교의 종교적 최고 권위자인 칼리프가 수여한 정치적 지배자의 칭호입니다. 칼리프는 이슬람권에서 최고 종교지도자를 겸하는 보편 군주를 말하며, 뒤따르는자라는 뜻의 아랍어로 무함마드가 죽은 후 움마, 이슬람 국가의 지도자, 최고 종교 권위자의 칭호이며 가톨릭의 최고 지위인 교황과 유사합니다. (aha, 2023.10.18)


종교의 경쟁력의 요인에 대한 추가 단서 :

한 종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엘리트로 길러낼 수 있어야 한다. 한국사에서 여말 선초때 불교가 유교한테 진 이유는 그 엘리트 간의 경쟁에서 밀린 것이다. 한국사를 중국사와 함께 봐야 한다면, 중국에서 또한 유학자가 스님들에게 승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 밀려난 후 다시는 불교의 고승이 권력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엘리트를 길러내는 종교의 경쟁력은 어디에 있을까? 어느 지점에서 그 승부가 나는 것일까?

종교가 엘리트를 길러내는 것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경전이다. 경전은 일차적으로 문서이므로 문해력을 길러준다. 다음으로 경전은 해당 집단의 공통의 텍스트이므로 담론의 주요한 소재가 된다. 경전은 긴 것이 좋을까? 짧은 것이 좋을까? 정경을 정해놓는 것이 좋을까? 계속 새로운 경전이 생산되는 것이 좋을까? (2024.10.15)

또 중요한 것은 종교가 사회질서(재산권과 신분질서)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인의 평등은 처음에는 혁명적이지만, 곧 한계를 맞는다. 어떤 종교이든지 더 높은 대우를 받아야 하고 받고 싶어하는 그의 엘리트들에 대한 종교적 사회적 명분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계급적 질서의 근간이 되는 합리적 이론은 전근대 사회에서는 사회를 영속시키는 힘이 되었다. 아마도 그러한 의미에서는 불교가 가장 약한 종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교는 그를 신봉하는 정치집단과 국가가 세속질서에 투철하지 못하게 하고, 또 승려계급의 지향점 자체가 속세의 정치를 떠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국가의 정교로서 자리잡는데 일정한 한계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2024.10.16)

동아시아에서 만약 불교와 유교가 잘 결합하였다면 어떠했을까? 하고 상상할 수 있다. 불교는 신권을 맡고, 유교는 속권을 맡는다면, 동아시아에서도 이원적 통치체제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불교는 신권을 맡기에는 너무나도 회의적인 종교이었다. 불교는 절대로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믿음 또는 미신이 없는 종교는 신권을 맡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유교가 속권만을 맡기에 유교는 너무나도 제사를 중시하는 종교이다. 제사의 예법이 바로 유교를 잉태하였다. 따라서 끝없이 회의하는 이성의 불교는 속권을 침범하고, 조상에게 또 천신과 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유교는 신권을 침범함으로 두 가르침은 양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는 신권과 속권의 이원체제가 불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2024.10.17)

유교나 불교보다는 무교가 보다 더 신권에 적합한 종교이다. 무교가 강할 때에는 유교는 국가 종교로는 기능하지 못하고, 세속의 원리만을 규정하는 정도의 지위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불교가 유입되고, 무교의 신성함은 도전받는다. 무교가 불교에 그 신권을 내어준 나라는 한반도의 삼국이며, 특히 신라에서 그 자취를 진하게 목도한다. 그에 반해 일본에서는 무교가 신성함의 지위를 불교로부터 지켜내었다. 신성한 무교를 몰아낸 신라의 불교 그리고 고려의 불교는 그 논리와 합리성에 훈육된 유가에 의해, 신권이든 속권이든 도시에서 쫓겨나게 되지만, 신권을 지켜낸 일본의 무교(신도)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지위를 고수함으로써, 서구바깥에서의 유일한 봉건제와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한반도의 백성들은 외래문물을 좋아하여 자신의 종교는 일치감치 내버렸으되, 합리적 우주질서와 기복신앙만큼은 절대로 버리지 못하였는데, 또 그렇게 많은 이가 기독교에서 자신들의 피난처를 찾았다. 너무 많은 종교에 질려서일까요? 한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비종교인이 많다. 그러나 80%의 가정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조사되므로, 집안의 예식에 단순히 참여하는 MZ를 제외하고 장년층 이상은 무종교자로 자신을 인식하고 있을지라도, 행동으로 볼 때는 조상신 교도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20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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