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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개똥 역사

갈문왕

조영필

by 조영필 Zho YP

신라에 갈문왕(葛文王)이라는 왕들이 있다. 추봉왕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인데, 나의 가장 큰 의문은 '갈문'이라는 단어 음운의 유래이다.


먼저 갈문왕의 사례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3대(24-57) 유리이사금의 장인 : 일지갈문왕(일성왕비의 부, 일성왕의 부), 허루왕, 사요왕

5대(80-112) 파사이사금의 장인 : 허루왕(파사왕모의 부)

6대(112-134) 지마이사금의 장인 : 마제국왕(마제갈문왕)

7대(134-154) 일성이사금의 장인 : 지소례왕

아버지 또는 장인으로 추정 : 일성이사금 15년에 아도갈문왕으로

10대(196-230) 내해이사금의 아버지 : 이매를 헌성대왕으로

12대(247-261) 첨해이사금의 아버지 : 첨해이사금 즉위시 골정을 세신갈문왕으로

13대(261-284) 미추이사금의 아버지 : 미추이사금 2년에 구도(조분왕모의 부) 갈문왕으로

외할아버지 : 이칠(이비)갈문왕

14대(284-298) 유례이사금의 외할아버지 : 내음갈문왕

21대(479-500) 소지마립간의 장인 : 기보갈문왕(습보갈문왕과 동일인물로 추정)

6촌동생 : 지도로갈문왕(지증왕)

22대(500-514) 지증왕의 할아버지 : 파호갈문왕

23대(514-540) 법흥왕의 동생 : 입종갈문왕(구진, 사부지)

26대(579-632) 진평왕의 장인 : 복승갈문왕

동생 : 진정갈문왕(백반), 진안갈문왕(국반)

27대(632-647) 선덕여왕의 남편 : 음갈문왕

28대(647-654) 진덕여왕의 외할아버지 : 만천갈문왕

29대(654-661) 태종무열왕의 아버지 : 문흥대왕(문흥갈문왕, 김용춘)

30대(661-681) 문무왕의 외삼촌 : 흥무대왕(김유신)


이상을 살펴볼 때, 갈문왕은 신라 초기에 왕비의 아버지(장인), 왕의 아버지, 왕모의 아버지(외조) 그리고 왕의 할아버지의 위호이었다. 따라서 초기 연구에서는 갈문왕을 추봉의 성격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후 영일 냉수리비의 지도로갈문왕, 울진 봉평신라비와 울주 천전리각석의 사부지갈문왕, 그리고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의 △△△△△지 갈문왕 등 금석문의 추가 발견과 연구를 통해 왕을 보좌하는 부왕(副王)의 성격이 확인되었다.


박-석-김 교체기에는 사위 승계가 많았으므로 왕의 혈통의 고귀함을 보강하기 위한 추봉이 많았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갈문왕이 단순한 추봉이었는지 아니면 생전에 부여받은 칭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김씨 왕통의 적자 승계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이후에는 그 지위를 동생에게 부여하면서 부왕(副王)으로서 자신을 보좌하도록 하는 방식이 나타난다.


'葛文(갈문)'에 대해 언어학적으로 접근한 이는 今西龍(1922)이다. 그는 葛(kal)은 친족의 뜻으로 骨品(골품)의 骨(kol)과 같은 말로 보았다. 그리고 갈문왕이 아니라 단순히 왕으로 표기된 허루왕, 마제국왕, 지소례왕의 경우, 왕 엎의 許婁(허루), 國(국), 支所禮(지소례)는 모두 葛(갈)을 뜻하는 것으로 보았다. 許婁(허루)와 支所禮(지소례)는 葛(갈)과 음성학적으로 유사하다. 그리고 國(국)은 고구려와 신라에서 忽(흘) 등으로 차자하는 한자인데 忽의 현대음은 hul이지만 고음은 kol이므로 이 역시 葛(갈)이라는 것이다. 今西龍은 여기에 덧붙여 ‘文(문)’은 ‘몸’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葛文을 '골몸'으로 추론하였다.


그러나 今西龍(1922)에서도 예시하는 바와 같이 연개소문(泉蓋蘇文)을 일본사서에서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로 표기하는 등 고문에서 '文(문)'이 '彌(미)'로 나타나는 용례는 상당히 많다. 그러므로 '文(문)'은 '彌(미)'에 해당하는 존칭접미사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는 葛文은 '골님'이 아닐까 제안한다. 해석하자면 신성한 혈통인 骨(또는 겨레)의 최고 어른이라는 의미가 된다.


갈문이나 매금에는 왕이란 말을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 매금이나 갈문에 이미 존칭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사금 시대에 갈문은 왕을 승계하는 기준점이었다. 혹 왕의 부, 비부(장인), 모부(외조)가 왕이 아닐 경우 그들을 갈문으로 추봉함으로써 새로운 적통의 표지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매금(마립간) 시대에 접어들어 김씨 왕조가 성립하면, 김씨 왕족은 결혼 동맹 대상도 자신의 씨족 내로 수렴시키면서 왕권을 지켜나간다. 따라서 갈문의 추봉 사례는 잠시 주춤하게 되고 이후 지증왕 이후 김씨 세습 왕권이 확고해지게 되면 더욱 더 혈족화되어 자신의 동생들을 갈문왕으로 삼아 친정체제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드디어 형제를 사위 삼아, 자신의 부계로만 왕위계승을 단속한 것이 성골주의이다. 성골이란 말 자체가 불교적이어서 불교를 공인한 법흥왕대부터 시작하는 사상의 산물이다. 법흥왕은 왕위를 진흥왕에게 물려줄 때 왕비와 함께 출가할 정도로 불법에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인 진흥왕의 이름은 사미를 뜻하는 심맥부(삼맥종)이다. 전륜성왕을 자처한 진흥왕은 또한 그의 아들을 동륜과 사륜(철륜)으로 지었다. 동륜의 아들들은 백정(白淨), 백반(伯飯), 국반(國飯)이었다. 그리하여 전륜성왕과 신성한 골품의 아이디어는 골품마저도 성골과 진골로 분리하여 왕위 계승권에서 무엇보다 우선하는 특수 혈통을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성골 지존의 논리는 우리나라 최초로 성골 여왕을 탄생시킨다.


갈문왕의 성격 자체가 계속 변화하여 왔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갈문왕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정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또한 진평왕대에 갑자기 나타나는 '성골'에 대해서도 '진골'과 별개의 골품이라고 생각하며 혼선을 빚어 왔다. 내가 생각하기에 성골은 신라 전 시대를 관통하는 개념은 될 수가 없다고 본다. 그것은 불교를 받아들이고 삼국통일을 완수해나가던 한 시기 흥분하던 국가문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국제질서에 순응하고 유교를 보편적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이면, 신라와 경주의 신성한 불국토 사상이 지지 기반이던 성골은 더 이상 개념적으로 존재하기 힘들다. 그리고 왕위 계승 역시 부자 승계로 정리되면 사위 승계 시의 원리를 뒷받침하던 가문과 가문 간의 혼맥의 결속을 상징하던 갈문의 중요성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대에 이르러서 적자 계승에 익숙한 삼국사기 편찬 유학자들에게 '갈문왕'과 '성골'은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도저히 알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