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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벗는 소리

조영필

by 조영필 Zho YP

내가 좋아하는 김광균(金光均, 1914-1993) 시인의 시에 <설야>라는 시가 있다.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여의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追悔(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찬란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의 설야(雪夜) 전문(미래사)


이 시는 1938년 1월 8일 발표된 시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예전에 교과서에도 많이 나왔는데, 가장 주목받은 시구는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이다. 이 시인은 시적 감성을 회화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기인데, 이 시구는 눈이 내리는 소리마저 눈에 보이듯 묘사했다.


2025년 7월 12일 탁구장 단톡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는 퍼온글을 하나 보게 되었다. 그것은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명엽지해(蓂葉志諧)>에 나오는 글인데 원문은 다음과 같을 수 있다.


喜聽裙聲

鄭松江柳西崖 嘗送客于郊外 時李白沙沈一松李月沙三人亦參座 酒半相論聲之品 松江曰淸宵朗月樓頭遏雲聲爲好 一松曰滿山紅樹風前遠岫聲絶好 西崖曰曉窓睡餘小槽酒滴聲尤 月沙曰山間草堂才子詠詩聲亦佳 白沙笑曰諸子所稱之聲俱善然令人喜聽莫若良宵洞房佳人解裙聲也 一座大嗟


젬선생과 챗선생을 가동하여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기쁘게 듣는 치마 소리]
송강 정철(鄭澈, 1536-1594)과 서애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일찍이 교외에서 손님을 전송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백사 이항복(李恒福, 1556-1618), 일송 심희수(沈喜壽, 1548-1622), 월사 이정구(李廷龜, 1564-1635) 세 사람도 자리에 함께하였다. 술이 반쯤 돌았을 무렵, 좌중에서는 소리의 품격에 대해 논하게 되었다.

송강이 말하였다. “맑은 밤 밝은 달이 누각 꼭대기에서 구름을 멈추게 하는 소리가 좋습니다.”

일송이 말하였다. “산마다 붉게 물든 단풍이 바람에 흔들리며 먼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정말 좋습니다.”

서애가 말하였다. “새벽 창가에서 잠이 덜 깨었는 데 작은 술통에 술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더욱 좋습니다.”

월사가 말하였다. “산속 초당에서 재주 있는 선비가 시를 읊는 소리 또한 아름답습니다.”

그러자 백사가 웃으며 말하였다.
“여러분께서 말씀하신 소리들은 모두 훌륭합니다만, 사람으로 하여금 가장 기쁘게 듣게 하는 것으로는 좋은 밤 밀실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치마를 푸는 소리만은 못합니다.”

이에 좌중이 모두 크게 탄복하였다.


그 퍼온글에는 허균(許筠, 1569-1618)의 『한정록(閑情錄)』 중 12.정업(靜業)에 나오는 남송(南宋) 예사(倪思, 1147-1220)의 글도 적혀 있었는데, 제대로 된 글을 찾아 아래와 같이 복원하였다.


예문절공(倪文節公: 문절은 송(宋) 예사(倪思)의 시호)이 말하였다.

바람이 소나무에 부는 소리, 비가 만물을 적시는 소리, 산새 소리, 밤벌레의 울음소리, 학 울음 소리, 거문고 소리, 바둑돌 놓는 소리, 빗방울이 섬돌에 떨어지는 소리, 눈이 창밖에 흩날리는 소리, 차 끓이는 소리, 이 모든 것은 도시의 소리 가운데 지극히 맑은 것들이다. 그러나 책 읽는 소리는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다른 사람의 책 읽는 소리를 듣는 것도 이미 기쁜 일인데, 만약 다시 자신의 자제가 책을 읽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더욱 기쁘기 그지없다.

(젬선생 번역; 주간조선, 조정육, 2022.10.6.; 한정록, 한국고전번역원 (1984),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 티스토리 새소리 바람소리, 2021.10.24.)



[예문절공(倪文節公)의 원문]

松聲 潤聲 山禽聲 夜蟲聲 鶴聲 琴聲 棋子落聲 雨滴階聲 雪灑窗聲 煎茶聲 皆聲之至淸者也 而讀書聲爲最 聞他人讀書聲 已極可喜 更聞子弟讀書聲 則喜不可勝言矣

(독서지관록讀書止觀錄, 권4 - 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지락막여독서至樂莫如讀書)


[허균의 한정록 인용 문장]

風吹松聲 雨潤萬物之聲 山禽之音 夜蟲之鳴 鶴唳 琴音 棋子落聲 雨滴階聲 雪灑窗聲 皆都市聲中至淸者也 而讀書聲乃爲之最 欣聽他人讀書聲 已屬可喜 若復聽及己之子弟之聲 則尤喜也

(허균의 한정록 해당 문장의 출처는 지금 확인 어려움)



예사(倪思)의 글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눈이 창밖에 흩날리는 소리(雪灑窗聲)'이다. 이 소리와 백사 이항복의 '아름다운 여인이 치마를 푸는 소리(佳人解裙聲)'가 합쳐지면, 눈 내리는 밤(雪夜)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가 그저 단순히 도시적 감수성의 미학으로 알고 있던 김광균 시인에게는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엄청난 수준의 한학적 배경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박두진, 조지훈 시인 등에게서 발견되는 한문적 감수성의 또다른 발화를 나는 김광균의 시 <설야>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정말 찰나의 감수성이 시대와 문자를 격해 만나는 감동적인 순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Note:

명엽지해(蓂葉志諧) 희청군성(喜聽裙聲)의 정확한 원문을 확인하기가 힘들다. 현재 원문이라고 생각하고 게시한 문장은 티스토리 건빵이랑놀자의 건방진방랑자, 2020.4.26.의 다음 한문 문장을 기본으로 하였다.


喜聽裙聲

鄭松江柳西崖 嘗送客于郊外 時李白沙沈一松李月沙三人亦參座 酒半相論聲之品 松江曰淸宵朗月樓頭聲爲好 一松曰滿山紅樹風前猿嘯聲絶好 西崖曰曉窓睡餘小槽酒滴聲尤好 月沙曰山間草堂才子詠詩聲亦佳 白沙笑曰諸子所稱之聲俱善然令人喜聽莫若良宵洞房佳人解裙聲也 一座大嗟


해당글에서 붉은 색 글자들을 다음 글(뉴스프리존, 2023.10.10., 백제일보, 2023.11.13., 유교신문, 2023.11.30.)을 참조하여 일부 고쳤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이 청소낭월 누두알운성(淸宵朗月 樓頭遏雲聲), 맑은 밤 밝은 달빛이 누각 머리를 비추는데 달빛을 가리고 지나가는 구름 소리라 읊었다.

이어서 일송 심희수(一松 沈喜壽)가 만산홍수 풍전원수성(滿山紅樹 風前遠岫聲), 만산 가득한 붉은 단풍에 먼 산 동굴 앞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라 응수(應手)하였다.

그러자 서애 유성룡(西崖 柳成龍)이 효창수여 소조주적성(曉窓睡餘 小槽酒滴聲), 새벽 창 잠결에 들려오는 작은 통에 아내가 술 거르는 소리라고 애주가답게 넌지시 던졌다.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는 산간초당 재자영시성(山間草堂 才子詠詩聲), 산골 마을 초당에서 젊은 학동의 시 읊는 소리라는 동심을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재치가 넘치는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은 동방양소 가인해군성(洞房良宵 佳人解裙聲), 아늑한 침방 그윽한 밤에 아름다운 여인의 치마끈 푸는 소리라고 읊자 모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고친 부분은 두 문장인데, 하나는 樓頭聲을 樓頭遏雲聲으로 바꾼 것이고 다른 하나는 風前猿嘯聲을 風前遠岫聲으로 바꾼 것이다. 전자의 교체 이유는 다른 이들이 읊은 문장의 글자수와 호응하려면, 5자가 적당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자는 일송 심희수가 우리나라에 살지 않는 원숭이 소리를 표현하는 까닭을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티스토리 김영동교수의 고전 & Life, 2015.2.6. 게시글에 따르면, 고금소총 제1화 佳人解裳聲과 제450화 喜聽裙聲 항목은 같은 내용의 글이라고 한다. 첫 번째 수정문장 淸宵朗月 樓頭遏雲聲 爲好은 상기 게시글에서도 동일하다. 그런데 두 번째 수정문장의 경우, 滿山紅樹 風前遠岫聲 絶好는 시귀선외, 고금소총, 한국문화사, 1998, p.485. 출처이고, 滿山紅樹 風前猿嘯聲 絶好는 고금소총, 민속자료간행회, 1959, p.280. 출처이다. 한국문화사간이 보다 최근의 출판본이므로 더 정확한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아직 고금소총 원본을 확인하지 못하였으므로 무엇이 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2025.7.22.)



그리고 티스토리 보옴비세상의 2010.11.10 게시글과 티스토리 류재균文化하정공파의 ryu하곡의 2011.6.1. 게시글에 따르면

淸宵朗月 樓頭遏雲聲 滿山紅 風前猿嘯聲 絶好 曉窓睡餘 小槽酒適聲 尤 山間草堂 才子詠詩聲 亦佳 令人喜聽莫若 洞房良宵 佳人解裙聲也

역시 몇 자가 다르다. 그러나 이런 것은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다른 한자의 차이 정도는 문장의 해석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한 원문을 확인하는 노력은 아마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해군성(解裙聲)과 김광균의 시 설야(雪夜)의 '옷 벗는 소리'를 함께 연상한 글로서 가장 오래된 게시글은 거제신문, 윤일광, '여인의 치마 벗는 소리(解裙聲)', 2014.2.6.이다. 내가 '해군성'을 듣는 순간에 김광균의 시 '설야'를 연상했듯이 인간의 기본적 감수성은 어느 정도 보편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2025.7.20.)



탁구장 단톡방에 공유되었던 퍼온글은 확인해보니, 해럴드경제, 이영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2025.2.7.의 글이었다.


사람들은 인용문장인지 밝히지도 않고 원문을 한 번 확인해 보지도 않고 동일한 내용의 남의 글을 자기의 글인 양 계속 쓰고 있다. 그리고 한 번 틀린 오류는 수정되지도 않고 주구장창 이어진다. 논문에서나 신문에서나~(2025.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