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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 과학

G.E.R. Lloyd

by 조영필 Zho YP

G.E.R. Lloyd, Early Greek Science : Thales to Aristotle, New York, Norton, 1970.

과학사개론, 김영식 편저, 제1부 고대의 과학, 2~7장.



2. 과학의 시작과 그 배경

18/ ... 인류는 B.C. 3000년경 이전에 망치질·용해·주조 등의 금속가공기술을 알고 있었다. 이보다 얼마후에는 구리의 합금이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두 가지 순수한 금속을 합금시켜서가 아니라 구리의 광석을 주석, 납, 아연, 안티모니 등과 같은 다른 금속들을 포함한 광석과 함께 용해함으로써 얻어졌다... 제1왕조(B.C. 3000년경) 시대의 것으로 것으로 알려진 아비도스Abydos 왕릉에서 나온 천은 한 방향으로는 1인치당 160가닥의 실, 그리고 다른 방향으로는 1인치당 120가닥의 실을 포함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자기를 손으로 만들었지만 B.C. 3250년경에는 "도공의 물레potter's wheel"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바퀴의 원리가 이보다 후에 - 아마도 B.C. 3000년경에 - 수레에 이용되었다. 도시문명의 발달이라는 관점에서는 이들보다 더 중요한 기술은 농업의 발전 - 여러 종류의 곡물의 경작, 관개 및 동물사육 기술의 발전, 그리고 음식물의 생산과 저장법의 발견 등 - 이었다. 끝으로 문자도 B.C. 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중요한 발명들 중의 하나였다.


이같은 기술적 진보들이... 많은 발견들에서 "우연"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은... 그렇게 생겨난 새로운 물질이 지닌 잠재적 용도를 알아내고 또 그 용도를 이용하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요구되는 "상상력의 도약imaginative leap"의 과정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야금술이나 섬유기술의 발전은 특히 "시행착오trial and error"에 의한 오래고 끈질긴 배움의 과정을 겪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더 일반적이고 비전문적인 의미에서 "실험experiment"을 행한 것이다...


19/ 기술은 B.C. 4000-2000년을 통해서 굉장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고대 중동문명들에는 고대 그리스과학과 더 밀접히 관련된 다른 두 가지 요소들이 있다. 이 중 첫째는 의술이고, 둘째는 수학과 천문학이다... 적어도 이집트의술은 어떤 측면에서는 민속의술folk medicine의 수준을 넘어서는 진보를 보였다.


20/ B.C. 16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훨씬 전의 자료들도 포함하고 있는 유명한 에드윈 스미스Edwin Smith 파피루스는 머리와 상체의 상처를 포함한 48개의 임상외과케이스를 다루고 있다... 마술과 미신의 영향이 놀랄 만큼 작은 이 파피루스에서도 그것의 저자가 초자연적인 도움을 청하는 일은 발견된다. 예를 들어 제9케이스는 처방이 효험을 지니기 위해서 외어야만 할 주문을 기술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는 것이다.


수학의 발전과 그것의 천문학에의 응용은 길게 봐서는 의술보다도 더 중요했다. 이 분야에서의 이집트인의 주된 업적은 태양력의 발명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바빌론사람들이 수학과 천문학 모두에서 이집트인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우선 바빌론 사람들은 60진법의 숫자체계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산술적 계산, 대수적 방법 등에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특히 2차방정식도 다룰 수가 있었다... 특히 셀레우시드Seleucid시기(대략 B.C. 3-1세기)는 많은 천문학 문헌들을 남겼는데, 그 이전 B.C. 1500년경부터도 많은 천상의 "징조omen"들이 관측되고 기록되고 있었다. 초기의 그 같은 자료들 중 하나는 금성의 나타남과 사라짐에 관한 것으로서 암미사두카Ammisaduqa, B.C. 1600년경) 재위시기에 수년 동안 기록되었다. 그리고 B.C. 8세기경까지에는 왕실을 위해 몇 가지 천문현상과 기상현상들이 체계적으로 관측되기 시작했다. 이런 관측들은 당초에는 왕국이나 왕의 운수를 예측하려는 점성술적인 목적이나 달력을 확립하려는 목적 - 그러기 위해서는 달이 처음과 마지막 보인 순간들에 대한 정확한 관측이 필요했으므로 - 으로 행해졌다.


물론 이와같은 바빌론의 초기 관측들의 정확도를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관심을 가졌던 현상들 중 많은 것들이 지평선 가까이서 일어났고 따라서 관측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천문데이터들에 대해 체계적인 수학적 이론이 응용된 시기도 정확히 밝혀질 수 없다... 첫째 바빌론사람들은 그리스과학이 시작되기 오래전에 제한된 범위의 천상의 현상에 대해 광범위한 관찰을 행했다. 그리고 둘째로 많은 기록을 축적함에 따라 그들은 몇 가지 현상을 예측할 수도 있었다. 물론 한 번도 그들이, 또는 고대의 어느 누구도, 지표면의 어느 특정한 점에서의 일식을 정확히 예견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언제는 일식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나 언제는 그것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그들은 월식에 대해서는 예측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측들은 천체들의 기하학적인 모형에 바탕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산술적인 방법 - 과거의 관측들로부터 얻어진 주기표들로부터의 계산 - 에 의해서 얻어졌다.


22/ 중동지역 사람들의 의술, 수학, 천문학 등 분야에서의 이같은 업적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탈레스가 첫번째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타당하다... 밀레토스철학자들의 생각들을 그 이전의 사상가들의 그것들로부터 구분해 주는 두 가지 중요한 특징들이 존재한다. 첫째는 "자연"의 발견이라고 얘기할 수 있고 둘째는 합리적 비평과 토론의 전통이다.


23/ ... 첫째로 페링튼Benjamin Farrington 같은 학자의 말을 빌면, 밀레토스인들은 "신을 내몰았다", 호머Homer나 헤시오드Hesiod가 지진이나 번개를 기술할 때는 대개 제우스Zeus나 포세이돈이 화난 것을 설명했는 데 반해, 밀레토스 철학자들은 신의 의지, 사랑, 미움, 열정이나 다른 인간적인 동기들을 제외시켰던 것이다. 둘째 호머가 설명한 것은 대체로 특정한 지진이었거나 특정한 번개였는 데 반해, 밀레토스인들은 그같은 현상의 특정한 예가 아니라 일반적인 지진, 일반적인 번개에 관심을 쏟았다...


밀레토스인들을 그 이전 사람들과 구별해주는 두번째 특성은 토론의 전통이었다...


24/ ... 초기 그리스철학자들이 서로의 관념들에 관해 알고 비판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증거가 있다. 많은 경우에는 철학자들 자신의 얘기가 그러한 증거를 제공한다... 헤라클리투스Heraclitus(B.C. 500년경 활동)가... "많이 배운다고 해서 많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헤시오드나 피타고라스Pythagoras(B.C. 560-480년경)가 많이 이해했을 것이며 크세노파네스Xenophanes(B.C. 6세기)와 헤카타에우스Hecataeus(B.C. 550-480년경)도 그러했을 것이다."...


의학저술가들도 B.C. 5세기말의 활발한 의견교환과 토론에 대한 보완적인 증거들을 남겼다. <고대의 의술에 대해서>의 저자는... 엠페도클레스를 언급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란 책은... "똑같은 청중 앞에서 똑같은 사람들이 서로 토론해도 한 사람이 계속해서 세 번을 이기는 일은 결토 없었다." 다른 곳에서 같은 저자는 철학자 멜리수스Melissus(B.C. 440년경 활동)의 이름을 언급했다.


25/ 초기 그리스철학자들에게로 눈을 돌리면 우리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게 된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전 사람들과 똑같은 문제들을 다루었고 똑같은 자연현상들을 탐구했지만, 그들은 이제는 그들이 제시하고 있는 이론들과 설명들이 서로 직접 경쟁하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 가정했다...


26/ ... 한때는 이것을... "그리스의 기적Greek miracle"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설명이 아니라 우리가 설명해야 할 사실 자체인 것이다... 물론 밀레토스는 B.C. 494년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파괴될 때까지는 부유한 도시였다. 밀레토스의 부는 부분적으로는 산업 - 특히 모직섬유제조의 -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교역으로부터 얻어졌고, 밀레토스인들은 또한 식민지개척자로서도 유명했다...


27/ ... 다른 많은 그리스도시들처럼 밀레토스 자체도 격심한 정파간 분쟁을 겪었고 가끔씩은 독재자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나 중동의 초대국들에서 정권의 교체가 흔히 왕조의 교체만을 의미했던 데 반해 그리스도시들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B.C. 7-6세기에는 도시국가제도가 성립되고 강화되었으며, 새로운 정치의식과 여러 가지 형태의 헌법들 - 독재정치로부터 과두정치를 거쳐 민주정치에 이르기까지 - 이 개발되었다. 아테네Athenes, 코린트Corinth, 밀레토스 등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국가의 통치에 자주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정부형태의 전반적 문제에 관한 토론에도 적극적이었다.


밀레토스철학자들이 과거의 관념들에 관해 질문하고 서로를 비판하는 데 있어 지녔던 자유로움은 자라나는 도시국가의 시민들이 가장 좋은 형태의 정치적 제도에 대해 토론할 때 지녔던 정신과 비슷한 것이다. 밀레토스인들의 공헌의 요체는 자연세계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새로운 비판적 정신을 도입한 것이었다...


3. 밀레토스인들의 자연과학

29/ ... 밀레토스인들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을 공격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아낙시만데로스에게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예는 특히 흥미롭다. 첫째로 그는 천체들을 불의 고리들로 묘사하면서 그것들에 대한 설명을 시도했다... 이 이론의 중요성은 그것이 그리스천문학에서 천체들에 대한 기계적mechanical 모델을 향한 최초의 시도라는 점이다.


30/ 두번째 예는 아낙시만데로스가 일반적으로 동물들의, 그리고 특히 사람의 기원에 관해서 제안했던 이론이다...


32/ ... 이미 시인 헤시오드는 <신통기Theogany>에서 맨 먼저 혼돈 - "하품하는 틈" - 이 생겨났다고 공헌한 바 있으며...


33/ ... 탈레스가 지구는 물 위에 떠 있다고 제안했던 데 반해, 아낙시만데로스는 지구가 "허공에 떠 있으며" "모든 것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고 주장했다...


35/ ... 근본물질의 미분화성을 주장하는 아낙시만데로스는 탈레스의 물의 가설에 대해 제기될 것이 뻔한 반론 - 그것에 대립되는 것인 불은 어떻게 생성될 수 있었을까? - 에 대해 응수한다. 그리고 아낙시메네스의 농축화와 희박화의 이론은 종자가 "무한"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다는 아낙시만데로스의 생각보다 한층 더 근본물질이 겪는 변화들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4. 고대 그리스자연철학의 근본문제 : 변화와 생성

37/ ... 그러나 철학자들은 그후 곧 외부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근거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질문들을 처음 제기한 철학자들은 헤라클리투스와 파르메니데스였다. 기원전 5세기 초반 언젠가 이들 둘 모두가 변화의 문제를 예리한 형태로 제기했고, 그것에 대한 완전히 상반되는 해답을 제시했다...


38/ ... "모든 것은 흐른다panta rhei"라는 유명한 문구도 분명히 헤라클리투스의 말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파르메니데스의... "진리의 길"에... "있으며 그리고 동시에 있지 않을 수는 없다It is and it cannot be"라는 진술이다...


39/ ... 기원전 5세기 후반의 사상의 역사는 크게 보아 파르메니데스의 지지자들과 그의 결론에 항거하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의 역사가 되었다. 파르메니데스 자신의 추종자들이며 엘레아학파Eleatics라 일컬어지는 제논Zenon(B.C. 490-425년경)과 멜리수스는 그의 입장을 진심으로 받아들였고, 다수성plurality과 변화의 관념들을 논박하기 위해 더 많은 주장들을 전개했다. 그러나 반대진영에서도 역시 파르메니데스로부터 그들의 출발점을 취했다. 그래서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둘 다 어떤 것도 비존재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지지했으며,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레우키푸스Leucippus(B.C. 5세기)와 데모크리투스Democritus(B.C. 5세기말 활동)의 "원자atom"들도 파르메니데스의 "진리의 길"에 나오는 하나의 변하지 않는 존재와 공통된 몇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변화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부정에 어떻게 응수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야말로 이들 후기 "소크라테스 이전Pre-Socratic" 철학체계들 모두의 주된 관심사였던 것이다.


40/ 파르메니데스가 이처럼 감각을 거부하고 오직 이성에만 의존할 것을 주장했던 반면, 엠페도클레스는 감각을 다시 받아들였다...


... 가령 인간이 "흙"과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은 널리 받아들여진 것으로서, 예를 들면 헤시오드의 판도라Pandora 신화 가운데에도 암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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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 기원전 5세기의 학문체계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이 컸던 것은 처음에 레우키푸스가 제창했고 후에 데모크리투스가 발전시킨 원자론이었다...


47/ ... 기원전 5세기에는 물리학은 인식론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묶여있었다..


5. 플라톤의 자연철학

51/ 그리스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플라톤이 차지하는 위치를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그의 주된 저술이 <티마에우스Timaeus>이다...


53/ 티마에우스의 우주론은 복잡하지만 분명한 철학적 체계 안에 세워져 있다... 그가 엠페도클레스와 피타고라스학파 및 원자론자, 그리고 생물학 분야에 있어서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B.C. 460-370년경)학파의 학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54/ ... 불은 정4면체, 공기는 정8면체, 물은 정20면체, 흙은 정6면체로 나타내어 주고 제5의 정다면체인 정12면체는 언급은 했으나 그것으로 어느 단순체를 나타내주지는 않았다...


59/ ... 피타고라스학파로부터 받아들여서 발전시킨 우주의 수학적 구조에 대한 그의 믿음과 관념적·수학적 천문학과 물리학에 대한 그의 옹호는 그의 생각 중 가장 중요하고 유익했던 두 가지였다...


6.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과 과학

62/ ... 그가 실제로 쓰는 방법은... 첫째, 논의할 주제가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들을 규정함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의 이론들이나 특정한 문제에 대해 널리 받아들여지는 "진리"들에 담겨있는 문제점들을 우선 고려한다...


63/ 일단 문제점들이 언급이 되고 통상의 견해들이 요약이 되고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해답을 향해 나아간다... 구조적으로 보면, 많은 문제들에 대한 그의 분석은 모든 이론적 가능성의 검토로부터 시작해서 그것들로부터 하나하나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최선의 해결책을 얻어내는 방법을 취한다...


73/ ... 그의 생물학저술들 중에는 레스보스Lesbos의 피라Pyrrha 석호lagoon에 사는 해양동물들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기술들이 들어있는데 우리는 그가 두 해(B.C. 344-342년)를 그 섬에서 보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75/ ... 그가 세운 학교, 즉 리케움Lyceum의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두 명의 교장들 - 테오프라스투스Theophrastus(B.C. 371-287년경)와 스트라토Strato(B.C. 270년경 사망) - 은 둘다 상당한 수준의 독창적 사상가들이었는데 이들은 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비판하고 거부했었다...


76/ ... 예를 들어 테오프라스투스는 주요 물질이론들의 역사와 그 이전의 지각sense-perception이론들의 역사를 썼고, 메노Meno(B.C. 320년경 활동)는 의학의 역사를, 에우데무스Eudemus(B.C. 4세기 후반)는 기하학과 천문학의 역사를 집필했다... 이처럼 리케움에서 수행된 연구의 규모는 전례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방법론적 원리들을 적용시킨 결과였다.


77/ ... 플라톤은 본질form이 구체적 사물과는 별도로 존재한다고 믿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거부하고 본질(또는 형상 form)과 물질(matter)이 머리속에서는 분리가 가능하지만 실제 우리 주변의 물체들에서는 분리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이 이성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감각의 역할을 격하시켰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의 중요성을 부활시켰다...


7. 알렉산드리아의 과학과 그 배경

79/ 알렉산더의 대정복의 결과들 중의 하나는 그리스인들과 이민족들 사이의 더 긴밀한 지적·문화적 접촉이 가능해졌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B.C. 3세기의 학자들 몇 사람에게서 우리는 지적 영역의 확대를 볼 수가 있다...


80/ ... 스토아학파의 창시자격인 제논Zenon(B.C. 335-263년경)은 키프루스Cyprus - 그 인구의 많은 부분이 페니키아Phoneicia에서 유래한 - 출신이며, 그 자신은 페니키아 출신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의 추종자들의 많은 수가 비그리스인들이었다. 그리고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us(B.C. 310-230년경)의 태양중심설을 받아들인 우리가 아는 유일한 천문학자였던 셀레우쿠스Seleucus(B.C. 150년경 활동)는 칼데아Chaleda 사람이거나 바빌론사람이었다. B.C. 3세기 이후부터는 바빌론 천문학과 그리스 천문학의 융합은 점점 중요해졌다. 예를 들어 히파르쿠스Hipparchus(B.C. 2세기)는 바빌론의 일식, 월식기록들에 접할 수 있었고 그것들을 널리 사용했다.


81/ ... "도서관Library"은 아마 프톨레마이오스 1세에 의해 창립되었을 것이며 "박물관Museum"은 아마도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즉위초인 B.C. 280년경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플라톤의 아카데미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케움처럼 박물관도 학자들이 함께 일하고 어느 정도 함께 생활하는 일종의 공동체였다. 아카데미와 리케움에서처럼 박물관의 구성원들은 함께 식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물관은 앞의 두 기관들이 경제적인 자립을 유지했었는 데 반해 박물관은 -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도 - 전적으로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의 재정적 지원에 의해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 예를 들어 지리학, 수학, 천문학, 역사학, 문학비평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B.C. 276-195년경)는 B.C. 3세기말의 "도서관"의 책임자였다... 고대에 있어 인체해부가 행해졌던 것은 알렉산드리아뿐이었는데, 해부학자들이었던 헤로필루스Herophilus(B.C. 4세기말)와 에라시스트라투스Erasistratus(B.C. 3세기 전반)는 왕들의 지원에 의존해서 감옥의 죄수들의 사체를 얻어 그들의 연구에 쓸 수 있었다.


84/ ... 필로Philo(B.C. 200년경 활동)는 그의 책 <대포건설에 대해서>에서... 과거의 작업수들의 "시행착오trial-and-error"의 방법을 알렉산드리아 기술자들의 체계적인 실험적 연구들과 대조했고, 이 분야에서 알렉산드리아인들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명예를 열망했고 기술과 공예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왕들"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이 "순수과학pure science"만이 아니라 "응용과학applied science"도 때로는 지원했다는 것이다...


... 물론 아르키메데스Archimedes(B.C. 287-212년)와 아폴로니우스Apollonius(B.C. 3세기 후반~2세기 초) 같은 수학자들은 다른 수학자들을 대상으로 해서 저술했지만, 그들도 때로는 그 같은 자신들의 저술들을 높은 사람에게 헌정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들이 유명한 과학자들을 알렉산드리아로 유치하려고 노력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문학의 걸작들의 원고를 수집했던 것과 같은 이유 - 그들 자신의 명성을 더욱 빛내기 위한 - 에서였다. 헬레니즘 시기의 다른 왕들 역시 과학과 문학 두 분야 모두에서 같은 정책들을 추구했다. 예를 들어 아탈리드 왕들도 페르가뭄에 있는 그들의 "도서관"에 소장할 원고들을 수집하는 데 열심이었으며, 많은 도시들에 "박물관"들이 창립되었다...


85/ ... 박물관은 A.D. 5세기까지 존속했지만, 그 활동은 - 그리고 그것을 본뜬 더 작은 많은 기관들의 활동도 - 세대에 따라 변화가 심했다.


... 예를 들면 아르키메데스는 분명히 부유하고 세력이 있는 가문에 속했다. 그는 시라쿠제Syracuse의 왕이었던 히에로Hiero의 친구이자 친척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