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믹출판
대항해 시대에 전해진 포르투갈의 화승총
26~/ 1543년 무로마치 막부 말기 오스미국大隅國(가고시마현 남부) 다네가섬種子島(규슈 남단)에 한 척의 배가 흘러들어왔다... 그 배에 탄 명나라의 유학자 오봉五峰과 필담을 주고 받으며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 당시 오봉은 무역상 및 왜구倭寇의 두령 노릇을 했다고 전해진다.
영주 다네가시마 도키타가種子島時堯는 자신이 거처하는 아카오기성赤尾木城까지 그 배를 끌고 가서 정박시키라고 명했다. 그 뒤 다시 필담을 나눌 때, 상인을 대표하는 두 사람(Francisco Zeimoto, Antonio Da Mota)을 소개받았다.
... 1543년에 전래되었다는 근거는 도키타카의 아들인 다네가시마 히사토기種子島久時가 1606년에 편찬한 역사서 <철포기鐵砲記>를 토대로 한다...
전래 2년만에 대량 생산, 화승총이 전쟁에 등장
30~/ 사들인 철포 두 정 중 한 정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철포를 구하러 온 기이국紀伊國(와카야마현) 네고로사根來寺의 스기노보 아무개杉坊某라는 사람에게 양보하고 수중에는 한 정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복제품을 제작하기 위해 전국에서 대장장이를 모집한다. 그중 한 명이 야이타 긴베에八板金兵衛다. 그는 대장장이의 본고장 미노국美濃國(기후현) 출신으로 도키타카의 요청으로 다네가섬에 와서 살게 되었다.
당시 포르투갈인에게 구입한 가격은 한 정당 1,000먄 엔이었다고 전해진다... 1575년의 나가시노長篠 전투... 그 때의 철포의 가격은... 한 정단 60만 엔쯤 되었다고 전해진다... 오다 노부나가가 나가시노 전투에 대비해 준비한 철포의 수는 3,000정인데, 철포에만 18억 엔의 군비를 투자한 셈이다.
'야이타의 가계도'에 따르면 긴베에는 제조법, 특히 당시 일본에는 알려지지 않은 나사기술을 배우기 위해 딸을 포르투갈인에게 시집 보내고 그 대가로 겨우 기술을 손에 넣었다고 전해진다.
... 총포 제작 기술을 얻기 위해 다네가섬을 찾은 사카이 출신의 다치바나야 마타사부로橘屋又三郞는 고작 1~2년만에 기술 대부분을 배워 고향 사카이에서 화승총을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후 사카이는 화승총의 주요 생산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사카이 외에도 오미국의 구니토모무라國友村가 철포 생산지로 유명하다.
구체적인 수치는 남아 있지 않지만 16세기말부터 17세기에 걸쳐 일본의 철포 보유 수는 세계적으로 봐도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당시 일본은 장비로 보나 숙련도로 보나 세계 유수의 군사 대국이 되었다.
잇코잇키의 광풍이 전국시대를 덮쳤다!
68~/ 전국시대에 정토진종의 혼간사本願寺 일파인 일향종一向宗, 잇코슈의 신자들이 일제히 봉기해 권력의 폭정에 맞선 저항운동이 바로 잇코잇키一向一揆다...
잇코는 일향종을 가리키고, 잇키는 동일한 믿음으로 결속한 공동체를 뜻한다... '염불을 외고 신심을 깊이하면 정토로 갈 수 있다'라는 혁신적인 가르침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은 잇코잇키는 전국시대 초기부터 말기까지 약 120년 동안 활약하며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465~67년 오미 잇코잇키
1488~1580년 가가 잇코잇키
1563~64년 미카와 잇코잇키
1570~74년 마가시마 잇코잇키
1570~80년 이시야마 전투
1574~75년 에치젠 잇코잇키
원래 일향종은 정토종을 창시한 호넨法然의 제자인 신란親鸞을 시조로 직계자손이 대대로 법통을 계승하며 유지되어왔다. 신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제8대 법주法主인 렌뇨蓮如 시대부터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펼치며 교세를 확장한 덕분이었다.
헤이안 시대에 불교와 선종이 귀족들의 종교였다면, 일향종은 중생이야말로 부처가 구제할 대상이라고 외쳤다... 일향종은 일반 신도도 다른 사람들이나 신도를 구제할 수 있었다.
신도 개인의 포교활동을 인정했다는 점, 신도가 기도로 타인의 행복을 빌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신도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이 크게 호응을 얻어 일향종은 전국시대에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잇코잇키가 발생해 신도가 지배하게 된 지역에서는 '고講'라고 하는 일향종의 조직을 통해 신도들이 결속했다...
실제로 1488년에는 가가국加賀國(이시카와 현)의 슈고 도가시 마사치가富樫政親가 잇코잇키의 공격을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일향종 신도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던 마사치카의 본거지인 다카오성高尾城이 잇코잇키의 대군에 포위당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후 약 90년간, 가가국은 신도와 농민이 규합해 슈고를 쓰러뜨린 자치국으로서 '백성이 가진 나라'로 불렸다... 승려와 지방의 토착무사인 상급계급 신도들이 모여 합의한 내용이 조직 운영의 기반이 되었다...
단, 렌뇨를 비롯한 역대 법주는 세속의 권력과 종교는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왕법위본王法爲本'의 사상을 토대로 신도에게 세속법을 지키라고 설파했다. 즉 전국시대에 휘몰아친 잇코잇키의 광풍은 일향종 교단의 총의가 아니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한 다케다 신겐의 경제정책
88~/ ... 신겐은 금을 채굴하는 동시에 일정한 크기와 무게를 지닌 화폐로 만드는 제도도 정비했다... '고슈킨甲州金'이라는 이름의 이 화폐는 신겐의 영지 안에서만 유통되었으나 어찌 되었든 화폐제도의 개척자가 된 것은 분명했다.
현 야마나시현 고슈 지역에서 생산된 질 좋은 금으로 큰북 모양의 둥근 인장을 찍어 보증했다. 4진법에 의한 고슈킨 화폐제도는 신겐이 멸망한 후, 도쿠가와 막부에서도 사용되었다.
전국 다이묘에게 고용돼 전투에서 활약한 용병들
132~/ 전국시대의 군대 중에 가장 인원이 많았던 것은 경무장 보병인 아시가루다. 보통 군역에 의해 징병된 농민이 많았으나 드물게 금품에 고용된 다른 지역 출신 용병도 있었던 모양이다.
... 사이카슈雜賀衆와 네고로슈根來衆처럼 집단으로 각지의 전투에 고용된 용병 부대도 있었다. 두 부대는 기이반도 남부에 독자적인 지배력을 갖고 있었는데, 특히 사이카슈는 수준 높은 철포 기술과 군선을 보유하고 오다 노부나가를 오래 괴롭힐 만큼 전투력이 뛰어났다.
사이카슈: 기이국 북서부에서 활약한 용병, 수천 정이 넘는 철포를 소유하고 독자적인 무역도 했던 군사 집단.
네고로슈: 기이국 북부의 네고로사根來寺를 중심으로 일대에 거주하던 승병 군단. 많은 양의 철포와 탄약을 소유했다.
로닌슈浪人衆: 다케다 신겐에 의해 편성된 타 지역 출신의 용병부대, 로닌슈로 불리며 신겐이 이끄는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모로아시가루슈諸足輕衆: 호조 가문에 소속된 독립 무장조직, 보수를 받고 고용된 아시가루 집단으로 볼 수 있다.
노부나가 직할령이 된 자치시 사카이의 지정학
148~/ 사카이堺의 역사는 길어서 이미 고대시대부터 세토내해와 긴키近畿 지역을 잇는 교역 중심지였다고 한다... 한반도를 비롯해 명나라와 유럽과의 통상 등 해외와의 교역 거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훗날 사카이에 체류하던 선교사 가스파르 빌렐라Gaspar Vilela가 "이 도시는 주민이 많고 풍족하며 베니스 이탈리아의 상업도시처럼 집정관이 통치한다"라고 평하면서 '동양의 베니스'로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자치의 발단:
무로마치 시대 후반이던 1419년 사카이 주민들은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주민의 대표가 세금의 징수 등 업무를 대신 맡아서 처리하고 자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운영방법:
주민을 대표하는 36명의 유력 상인이 자치조직을 만들고, 또 지도자로서 도시 운영을 책임지는 제도였다. 그리고 조직의 실무자가 실제 관리를 맡는 중층적인 지배구조로 운영되었다. 센노 리큐, 이마이 쇼큐, 다케노 죠오 등이 대표적인 지도자들이다.
전국시대의 대표적 자치도시:
오사카-사카이, 나라-이마이쵸, 교토-오야마자키, 효고-아마가사키, 후쿠오카-하카다
시장의 독점권을 없애는 '라쿠이치라쿠자'를 시행
160~/ 전국시대에는 각지의 유력한 사원의 가호를 받는 '자座'라는 상공업자 단체가 매매특권을 보유했고, 그 특권을 가진 상인과 기술자만 거래할 수 있었다. 그런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자'를 해체해 시장을 일반에 개방한 정책이 이른바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다. 여기서 '라쿠樂'는 규제 완화를 의미한다. 사실 이것은 노부나가가 처음으로 실시한 정책은 아니다.
기후의 가노加納에서 공포한 라쿠이치라쿠자를 예로 살펴보자.
-이 시장에 온 자가 영지를 이동하는 데 제약이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돈이나 쌀 등의 빚, 토지세, 그 외 온갖 세금의 징수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
-강매하지 않는다. 행패부리지 않는다. 싸움·말다툼을 벌이지 않는다.
-무뢰배를 시장에 들이지 않는다.
이가와 고카에 형성된 '닌자 마을'의 지정학
164~/ 전국시대에 실재했던 닌자는 각지의 다이묘에게 고용되어 적국에 침입해서 정보 수집, 요인 암살, 파괴 공작 등을 도맡아서 했다. 호칭도 '닌자忍者'가 아니라 '슷파透波', '구사草', '모노미物見' 등이 일반적이었다.
전국시대에 이러한 닌자를 배출한 '닌자 마을'로 유명한 곳이 '이가伊賀'와 '고카甲賀'다. 이 두 곳은 현재 미에현·시가현에 위치해 산 하나만 넘으면 만날 수 있을 만큼 아주 가깝다.
첫째로 이 두 곳은 유력한 다이묘가 지배하고 수호하는 지역이 아니어서 스스로 마을을 지킬 수단이 필요했다...
... 둘 다 험난한 산에 둘러싸여 있는 형세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두 땅의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시노비忍び(忍ぶ(しのぶ, 숨다)의 명사형, 첩자)로 일하게 된다...
히데요시의 도수령은 병농분리 정책으로 정착
1585년 관백에 취임하고 명실공히 천하인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 3년 후에 농민들의 무기를 몰수하는 도수령刀狩令을 함께 발포했다...
강제로 수거한 도검류는 이번 생만이 아니라 내세에도 구원받을 수 있게 호호사方廣寺 건축에 쓰일 거란 명목을 내세우는 등 민심을 배려하는 정책도 빈틈없이 추진했다... 노부나가 시대부터 농민과 승려가 일으킨 무장봉기를 진압하는 데 애먹은 것이 도수령을 실시한 배경이라고 본다.
실은 도수령을 실시한 이유가 또 있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지역의 토착무사로 활약한 농민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토착무사들의 칼을 몰수하는 대신 농촌을 떠나 성하도시로 가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무사, 상인, 백성이라는 신분이 고정되고, 역사상 처음으로 '병농분리兵農分離'가 실현되었다. 참고로 병농분리 정책은 에도 시대에도 국가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시행된다.
히데요시의 토지조사는 봉건제 정착시킨 대개혁
248~/ ... 히데요시는 토지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되의 크기부터 먼저 통일했다.
... 1582년 야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격파하고 교토를 지배하게 된 그 해에 야마시로국山城國(교토부 남부)에서 처음으로 토지조사가 시작된다.
자신의 지배 지역 안에서 다테 가문과 호조 가문이 토지조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전국 규모로는 히데요시의 토지조사가 처음이다. 그리고 물론 그의 영주인 노부나가도 일찍이 토지조사를 실시해 일부 지역에서 수확고 제도를 시행했다.
... 그 이전에는 쌀이 아니라 돈으로 민중에게 세금을 내게 했다... 노부나가는 이러한 농민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쌀 수확고 기준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집행했다.
1석이란 1,000홉을 가리키며, 어른 한 사람이 1년간 소비하는 쌀의 양을 기준으로 삼는다.(192~194쪽)
당시 토지조사를 기반으로 통치의 기준이 된 것은 연공량이었다고 한다. 토지의 가치를 토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쌀의 양(생산량)이 아니라 토지에서 들어오는 연공량을 기준으로 평가했다...
... 당시는 농민이 직접 영주에게 연공을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히데요시가... 농민이 직접 영주에게 연공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바꾸려고 했다...
토지조사의 의의라면 무사계급에게 영지의 수확고에 걸맞은 군역의 의무를 지게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 한 명의 경작지와 주거지를 각각 토지대장과 지도에 기록하는 구조로 혁신한 것이다. 이 제도 뎍분에 농민의 토지 소유권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중간 착취인이 배제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나아가 히데요시는 천하를 통일한 후에 전국의 다이묘에게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의 토지대장과 지도를 만들어 제출하라고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