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한
42/ ... 아스카 이외에 다른 곳으로 천궁을 시도한 첫 번째 사례는 지금의 오사카에 해당하는 '나니와難波(또는 浪華, 浪花, 浪速)'였다. 그런데 나니와 천도는 645년에 벌어진 '잇시의 변乙巳の變'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44/ ... 실제 현장을 눈앞에서 지켜본 고교쿠 여왕은 정변을 주도한 동생 고토쿠孝德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잇시의 변 당시 또 한 명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나카노오에 왕자가 소가씨를 대신해 야마토 조정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다이카大化'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지시하고 '개신改新에 관한 조詔'를 내려 호족 세력이 보유한 인민과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국가로 이양하는 대신 이들에게 식봉食封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공지공민公地公民'에 관한 원칙을 표명했다.
47/ ... 667년 아스카보다 좀 더 내륙에 있는 비와琵琶 호수 연변에 '오미오쓰궁近江大津宮'을 짓고 천궁을 실시했다... 나카노오에 태자는 이듬해 그곳에서 대왕의 지위에 올라 덴지天智 대왕이 되었다.
59/ 아스카에 이어 두 번째로 살펴볼 곳은 '후지와라경藤原京'이다. 후지와라경은 중국의 도성제에 바탕을 두고 일본에서 최초로 건설한 '도성'이란 점에서 아스카를 비롯한 이전의 도읍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일본에서 중국식 도성제에 입각한 고대 도시가 등장한 것은 663년 백촌강 전투 이후 동아시아 정세의 급변 속에 '천황'을 정점에 둔 새로운 지배체제가 성립하는 과정과 궤를 함께했다...
60/ ... 나카노오에 태자(후에 덴지 대왕)의 동생인 오아마 왕자이다...
오아마 왕자는 후에 군주의 지위에 올라 덴무天武 천황이 되었다... 덴무의 사후 그의 유지를 받들어 율령을 반포하고 후지와라경 건설사업을 완수한 이는 다름 아닌 그의 부인 우노노사라라鵡野讚良였다... 그가 죽고 나서 지토持統 천황으로 즉위한 우노노사라라의 지지와 후원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평가는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62/ 지금까지 '천황'이란 칭호의 등장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 그런데 1997년 덴무 시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아스카 연못 공방 유적에서... 덴무가 천황에 즉위한 지 6년째인 677년에 해당하는 "정축년 십이월丁丑年十二月"의 간지를 적은 목간이 함께 출토된 점을 고려했을 때 '오오키미' 대신 '천황'이라는 호칭을 새롭게 만들어 사용한 이가 덴무일 가능성이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63/ ... 덴무와 비슷한 시기에 집권했던 당 고종은 674년 '황제'를 대신해 스스로 '천황'이라 칭하고, 황후 무씨武氏를 '천후天后'라 부르도록 했다. 고종이 사망한 이후 태후의 지위에 올라 690년 무주혁명武周革命을 일으켜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여제에 오른 무후武后 역시 황제에 즉위한 다음에 '천황'과 '천후'의 칭호를 계속해서 사용했다...
64/... 오히려 천황이란 칭호는 견당사보다 도교의 영향이 더욱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도교에서 천황은 천문 성좌의 중심인 '북극성'과 같은 존재로 매우 중시되었다. 다시 말해 천황은 관료질서에 기반한 '인황人皇'의 통치에 앞서 무위자연의 국가 사회를 이루었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도교의 이상적인 정치상을 표현한 초월적인 존재였다... 천황 호는 덴무가 자신을 도교의 '신'과 같은 존재로 격상하기 위해 붙인 호칭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70/ ... 일찍이 주례 고공기考工記는 사방을 도로로 일정하게 구분한 '방坊'이 마치 바둑판처럼 연속한 형태로 도시를 구획하는 '방제坊制'를 도성 건설의 기본 원칙으로 제시했다. 방은 동서 방향의 도로인 '조條'와 남북 방향의 도로인 '방坊'으로 나뉘었다...
97/ 헤이안경으로 천도한 이후 헤이조경은 '남경' 또는 '남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101/ 일본 불교는 신도와 결합한 '신불습합神佛習合' 형태를 띠었다. 자체 경전을 갖추지 못한 신도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종교의 체계와 형식을 갖출 수 있었고, 불교는 신도와 결합해 일반 대중 사이로 손쉽게 전파될 수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신불습합이 이루어졌다. 쇼무 천황이 도다이사에 모신 비로자나불을 천황의 조상신이자 태양신인 오마카미大御神가 그 몸을 빌려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 것은 신불습합의 실례를 잘 보여준다...
124/ 율령제에서 관인에게 주어지는 위계는 1위부터 3위까지의 경우 정, 종의 구분을 두어 6단계, 4위부터 9위까지는 정, 종에 또다시 상, 하의 차이를 두어 24단계로 나누어 모두 30단계로 구분했다...
5위 이하의 하급 관인이 상급 관인으로 승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섭정, 관백을 비롯해 태정대신, 좌대신, 우대신과 대납언, 중납언, 참의 등을 비롯해 3위 이상의 지위를 일컫는 '공경公卿'은... 후지와라 가문의 북가를 비롯해 천황가에서 나뉜 미나모토源씨와 다이라平씨 계열의 귀족들이 차지하고 권세를 누렸다.
8세기 초 5위 이상의 관인 숫자는 대략 120여 명 전후로 추정된다. 이들에 대한 경제적인 대우는 5위를 기준으로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 헤이안경 천도 당시 3위 이상의 관인에게는 1정町, 즉 사방 120미터의 택지(14,400평방미터)를 하사했는데, 대략 잠실야구장의 그라운드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3위에서 5위까지는 1/2정 이하, 6위 이하는 1/4정 이하가 수여되었다. 이에 반해 일반 서민은 1/32정, 대략 450평방미터에 불과했다...
134/ ... 교토의 경관을 묘사한 낙중낙외도洛中洛外圖는 현재 100여 점 이상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개는 에도 시대 전기에 제작된 것이지만, 무로마치 막부 시기인 16세기에 만들어진 것도 4점 존재한다...
... 헤이안경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조방제에 따라 대로-소로로 나눈 사방 40장(약 120미터)의 구획을 뜻하는 '조町'였다. 그러나 율령제의 쇠퇴와 함께 도성을 조영할 당시 관인 귀족에게 나누어준 택지가 점차 일반인에게 매각되면서 조의 형태와 의미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도성의 행정구획인 '조'가 점차 유명무실화하는 가운데 상공업에 종사하는 도시 거주민이 결성한 자치조직을 '조'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36/ 조 공동체를 결성한 주민들은 조에 속한 개인들이 마음대로 토지와 건물을 매매하거나 임차를 주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더욱이 이들은 오닌의 난 이후 치안과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출입구를 제외하고 사방을 토담으로 두른 '가마에構'라 부르는 방어시설을 만들었다. 이들은 해자를 파고 토담을 세워 방어시설을 굳건하게 만드는 한편 검문소 역할을 겸하는 목호木戶를 세워 무사의 출입을 제한했다. 아울러 무사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 무장하거나 용병을 고용하기도 했다.
138/ '백지장도 맞들면 낮다'는 속담처럼 교토 주민은 개별 조 단위로 무사의 침입에 대항하기보다 서로의 힘을 합하기 위해 '조구미町組(또는 '마치구미'라고도 읽음)'라는 연합체를 결성했다...
148/ ... 미쓰이三井 재벌의 시원인 포목점 에치고야越後屋가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에도, 오사카, 교토의 역할을 살펴볼 수 있다. 에도의 유명한 포목점 에치고야를 창업한 이세伊勢 마쓰자카松坂 출신의 상인 미쓰이 다카토시三井高利는 1673년 교토의 신마치新町와 에도의 혼마치本町에 상가를 열었다. 그는 교토의 니시진西陣에서 생산되는 고급 견직물을 다량으로 매입해 에도로 가져가 상급 무사와 상층 조닌에게 기존에 없던 현금 할인, 박리다매 등의 방식으로 판매해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금화를 사용하는 에도와 주로 은화로 거래하는 오사카 사이에 화폐 유통의 차이를 이용해 에도와 교토에 환전상을 열어 사업을 더욱 확대했다. 오미近江 출신의 목재상으로 교토에 본점을 두고 있던 시로키야白木屋 역시 비슷한 시기에 에도에 상점을 열고 견직물을 판매해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49/ ... 17세기 중반 이후 고급 수공업품 생산기지인 교토와 전국적인 상품의 집하지인 오사카, 참근 교대제의 실시로 최대의 소비 도시로 부상한 에도를 잇는 전국적인 분업체계가 만들어졌다. 에치고야와 시로키야의 성공은 삼도를 중심으로 하는 전국적인 상품 생산과 유통, 소비의 분업체계를 효과적으로 이용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78/ 가마쿠라를 무사의 도시라고 하지만 실제 이곳의 주민은 따로 있었다. 지방에서 상경한 무사들은 봉공을 위해 잠시 머물다 갈 뿐, 정작 이곳에 터전을 잡고 생활하는 이는 무사를 상대로 물건을 팔거나 제조하는 상공인들이었다...
219/ 오사카는 해안지대에 위치해 거친 파도가 밀려든다고 해서 예부터 '나니와難波(또는 浪速, 浪花)'라고 불렸다. 고사기에 따르면 오사카의 시원은 4세기 무렵 닌도쿠仁德 대왕이 이곳에 왕궁을 짓고 요도강의 치수를 위해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고 항구를 정비한 기사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645년 잇시의 변을 일으켜 전횡을 행사하던 소가 씨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고토쿠 대왕은 국정을 일신하고자 나니와에 새 궁을 짓고 천도를 단행했다. 하지만 고토쿠 대왕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다시 아스카로 천도하면서 나니와는 한동안 역사에서 잊혔다.
... 1496년 렌뇨蓮如는 현재의 오사카성이 있던 곳에 포교를 위한 승방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는 이곳 지형이 지금과 매우 달라 바다에 접한 해안지대에 야트막한 돌산이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소판小坂', 즉 작은 언덕이라고 불렀는데 작은 것보다야 큰 게 좋으니까 큰 언덕을 뜻하는 '대판大坂'이라 적고 '오사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직후 새로 오사카부를 신설하면서 '판坂' 자가 땅(土)을 뒤엎는다(反)는 뜻에서 좋지 않다는 여론에 따라 언덕 '판阪' 자로 교체한 결과 현재와 같은 한자 표기가 일반화 되었다.
220/ ... 렌뇨의 후계자들은... 1532년 지금의 교토 야마시나山科에 위치한 일향정 총본사인 혼간사를 오사카로 이전했다. 오사카 혼간사는 해안가의 돌산, 즉 이시야마石山에 지었다고 해서 '이시야마 혼간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성채와 같이 튼튼한 방어시설을 갖춘 이시야마 혼간사가 완성되자 기나이 일대의 신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광대한 사원도시가 형성되었다. 오사카가 도시 형태와 규모를 갖추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230/ ... 본래 무사 출신인 고노이케 가문은 센고쿠 시대가 끝날 무렵 오사카 인근의 고노이케촌鴻池村(현재의 다카라즈카시寶塚市)에 정착해 탁주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면서 상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31/ 유키모토는 술도가가 많아 경쟁이 치열한 오사카가 아니라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부족한 에도를 새로운 시장으로 보고 판로를 개척했다. 그는 말 한 필에 4두짜리 술통을 양쪽에 싣고 에도로 가지고 가서 비싸게 팔았다... 1619년 오사카에 상점을 열고 본격적으로 양조업에 뛰어들었다.
고노이케 가문의 사업은 양조업에 그치지 않았다... 오사카와 에도를 오가는 물동량이 많아지자 대량 수송을 위해 해운업에 뛰어든 것이다. 1630년대부터 자신의 가게에서 만든 청주를 선박에 대량으로 싣고 에도로 가져가 팔고, 오사카로 돌아오는 길에 에도의 다이묘로부터 위탁받은 화물이나 물품을 싣고 왔다. 고노이케가에서 제조하는 청주 '아이오이相生'를 만드는 데 필요한 쌀은 연간 최대 10만 석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 전체의 쌀 생산량이 대략 3,000만 석 정도임을 고려하면 엄청난 물량이 아닐 수 없다...
232/ ... 이득이 별로 남지 않는 양조업 대신에 서국 일대에서 생산한 영주미를 오사카로 싣고 오거나 에도에 물건을 싣고 가는 운송업에 전념했다. 고노이케가에서 운영하는 선박 수는 무려 100여 척에 이르렀다고 한다...
233/ ... 고노이케가에서 다음 사업으로 주목한 분야는 자금 사정이 좋지 못한 다이묘를 대상으로 한 금융업이었다. 17세기 후반 고노이케가는 후쿠오카, 히로시마를 비롯해 무려 30여 곳이 넘는 다이묘에 자금을 융통해주었다.
에도 막부에 앞서 전국적인 화폐 유통에 관심을 가진 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 교토의 조금彫金업자인 고토 시로베後藤四郞兵衛에게 무게 10냥(약 165그램)의 '덴쇼 오반天正大判'이라는 금화를 제조하도록 지시했다...
한편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인 1601년 교토 인근 후시미伏見에 은화를 주조하는 긴자銀座를 설치한 다음 덩어리 형태의 정은丁銀과 콩알 모양의 두판은豆判銀을 주조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에도에는 긴자金座를 설치해 소판小判, 일분판一分判의 금화를 제조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금·은화의 주조에 비해 조금 늦지만 1636년에는 '간에이 통보寬永通寶'라는 동전을 발행했다. 이로써 에도 막부는 금·은화, 동전의 세 가지 금속화폐를 주된 교환수단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교토,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서일본 지역에서는 은화를 주로 사용했지만, 에도 주변 동일본 지역에서는 금화를 기본 화폐로 이용했다.
236/ ... 환전상이었다. 이들은 금화, 은화, 동전 서로 다른 세 가지 화폐의 무게를 달고 가치에 맞게 교환하는 등, 사실상 에도 막부의 금융거래를 뒷받침했다... 오사카에서 최대 소비시장인 에도에 싣고 간 각종 상품의 판매 대금 회수와 도지마 쌀시장의 연공미 판매대금을 에도에 거주하는 다이묘에게 송금하려면 반드시 환전상을 거쳐야 했다. 막부는 오사카에서 영업하는 환전상 가운데 '주닌료카에十人兩替'라는 공인 환전상을 지정해 금은의 시장 시세를 통제하고자 했다...
... 막부가 1691년부터 기나이 지역의 막부 직할 영지에서 거둔 연공미를 쌀시장에 판매한 다음 그 수익을 은화가 아닌 금화로 환전해 에도로 상납하도록 지시하면서 이들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275/ 본래 참근參勤은 중국에서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참관參觀'에서 비롯된 용어다... 애초에 참근 교대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가문에 복속을 맹세한 도자마外樣 다이묘를 대상으로 했다. 하지만 1642년 이후부터는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에 충성해 온 후다이譜代 다이묘를 포함한 모든 다이묘에게 예외없이 적용했다.
357/ ... 시마즈 씨는 센고쿠 시기의 통일 과정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가고시마를 지배해 온 유서깊은 무사집안이다. 12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시마즈씨의 가고시마 지배는 메이지 유신까지 무려 700여 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그렇다 보니 가고시마는 영주 교체가 빈번했던 여타 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곳만의 독특한 제도와 풍습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향사鄕士'제도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에도 시대 무사 신분은 전체 인구의 대략 7퍼센트 내외였다. 이에 반해 사쓰마번은 무사 비율이 무려 30퍼센트에 달했다... 이들은 가록家祿을 수여받지 않는 대신 촌락에 거주하며 농사를 짓다가 비상시에만 참전하는 '반농반무'의 생활을 영위했다. 이들은 유사시 전투에 참전할 의무를 지는 대신 세금을 면제받고 무사의 특권인 패도를 인정받았다.
359/ ... 시마즈씨는 1471년 무로마치 막부로부터 류큐 왕국의 교역에 관한 특권을 인정받은 이후 사실상 류큐와의 중계무역을 독점했다. 그런데 세키가하라 전투 직후 돌연 태도를 바꾸어 류큐 왕국을 무력으로 침공했다... 사쓰마번은 에도 막부로부터 류큐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아 규슈 남부의 60만 5,000석에다 고쿠다카石高로 환산한 류큐 왕국의 12만 3,700석을 더해 대략 73만 석에 이르는 영지를 보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지 대부분이 화산재로 덮인 척박한 토지일 뿐만 아니라 토지조사에 허수도 있어 실제 생산력은 장부 숫자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전체 인구의 30퍼센트가 무사이다 보니 연공수입도 얼마 되지 않아 번재정은 언제나 힘들었다. 번 재정을 건전하게 만들기 위해 사쓰마번은 류큐 왕국에게서 빼앗은 아마미 군도에 흑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 다만 독점무역체제 아래서도 막부는 류큐 왕국이 조공무역의 형태로 중국에서 가져온 생사, 한약재 등의 상품을 사쓰마번이 가져와 나가사키에 되파는 이른바 '류큐무역'만큼은 예외적으로 인정해주었다. 그런데 사쓰마번은 류큐무역이라는 위장막을 활용해 막부가 허가한 규모 이상의 중국 상품을 밀수입해 되팔아 많은 차익을 남겼다. 중국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대금은 지금의 홋카이도에서 생산한 말린 건어물(해삼, 전복, 다시마)을 몰래 가져다 팔아 충당했다...
360/ ... 제8대 번주인 시마즈 시게히데島津重豪는 '난벽蘭癖'이란 별명을 가질 만큼 난학蘭學, 즉 네덜란드를 통해 전수된 여러 학문에 많은 흥미를 보였다...
361/ 난학을 비롯한 서양 학문에 대한 시게히데의 관심은 그의 증손에 해당하는 제11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齊彬에게 계승되었다...
378/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인 페리M. Perry 제독은 2척의 증기선을 포함해 4척의 함대를 이끌고 1853년 6월 3일 에도만에 도착했다...
... 막부 수뇌부는 일단 미국의 국서를 수리하는 대신 협상을 위한 시간벌기에 나서 이듬해 다시 방문할 것을 페리 측에 요청했다...
379/ 17세기 초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와 교역을 시작한 이래 에도 막부는 네덜란드 상관商館에 서구 각국을 포함한 해외 각지의 사정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네덜란드 상관장이 작성한 이른바 풍설서風說書는 일본어로 번역해 막부에 전달되었다...
그런데 아편전쟁에서 청이 영국에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막부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 구미 각국의 동태에 한층 민감해진 에도 막부는 네덜란드 상관에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별단풍설서別段風說書를 작성해 제출할 것을 지시했다. 이러한 가운데 1852년 새로 부임한 상관장은 별단풍설서에 심상치 않은 정보를 담아 일본 측에 알렸다. 미국이 페리 제독을 사령관으로 삼아 4척의 함대를 파견해 통상을 요구할 것이며 이를 거부할 시에 함포 공격을 시도할지 모르니 미국의 제안을 수용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380/ ... 홍콩으로 돌아갔던 페리 함대가 예정보다 이른 1854년 2월 다시 일본을 찾아왔다... 결국 지난한 협상 끝에 양측은 3월 3일 마침내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미일화친조약의 주된 내용은 시모다下田·하코다테函館 개항, 미국 선박의 필수품 구입 허용, 외교관의 시모다 주재, 그리고 최혜국 대우에 관한 것이었다... 한편 일본은 미국에 이어 영국(1854)을 비롯해 러시아(1855), 네덜란드(1856)와도 화친조약을 체결하고 외국에 본격적으로 문호를 개방했다.
381/ 미일화친조약에 따라 1856년 초대 미국 총영사로 타운젠트 해리스Townsend Harris가 부임했다... 해리스의 끈질긴 설득과 협박 끝에 1858년 6월 일본은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 이 가운데 제3조는 가나가와神奈川를 비롯해 나가사키, 하코다테, 니가타, 효고兵庫(후에 고베神戶로 교체) 다섯 항구를 개항장으로, 에도와 오사카 두 곳을 개시장으로 정해 외국에 개방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개항장은 해안에 면한 항구를, 개시장은 시가지를 외국인에게 개방하는 곳이다. 개항장에서는 외국인 영구적으로 거주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개시장에서는 일시적인 체류만을 허용했다. 이후 막부는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안세이安政 5개국 조약'이라 부른다.
386/ 한편 개항을 앞두고 해외 무역을 통해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전국 각지에서 모험적인 상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고슈야추에문甲州屋忠右衛門은 고향 가이甲斐(현재의 야마나시현)의 친구들과 함께 요코하마로 이주해 고슈야甲州屋라는 상점을 열었다. 그는 고향에서 생산하는 차와 생사 등을 가져와 외국 상인에게 팔고 이들이 수입해 온 해외 상품을 일본 각지에 넘겨 30~40퍼센트의 높은 이익을 챙겼다. 이 같은 방법으로 고슈야는 불과 수년 만에 대규모 상점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391/ 에도 막부는 1634년 그리스도교 포교를 막기 위해 일본 각지에서 활동하는 포르투갈인을 한 곳에 수용해 이들의 대외 무역을 관리하고자 나가사키 앞바다에 약 4,000평 규모의 인공섬인 '데지마出島'를 축조하도록 지시했다. 건설 비용은 나가사키의 일본 상인이 부담하는 대신 포르투갈 상인에게 사용료로 매년 은 80관을 징수해 충당하도록 했다.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나가사키 앞바다에... 인공섬이 조성되었다.
... 그리스도교 세력에 대한 막부의 경계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1637년 규슈 시마바라에서는 그리스도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의구심은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더욱 멀어지게 했다.
1609년부터 규슈 히라도平戶에서 일본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던 네덜란드는 이참에 포르투갈과 단교할 것을 막부에 청원했다... 이에 막부는 1639년... 포르투갈인을 모두 추방했다. 그 결과 데지마는 무인도가 되고 말았다.
1641년 막부는 히라도에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관을 비어있는 데지마에 이전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네덜란드 상관은 1856년까지 215년간 데지마에서 상존하며 서구 사회와 일본 사이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