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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과학 탐닉

1920년대초 양계초의 과학인식과 동서문화관

구범진

by 조영필 Zho YP

구범진 (1994), 1920년대초 양계초의 과학인식과 동서문화관 - <구유심영록>을 중심으로 -, 서울대 동양사학과논집, 18, 49-76.


49/ 5·4운동을 전후한 시기의 신문화운동은... 이 시기에 '과학선생'이 '민주선생'과 함께 사상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권위는... 때문에 胡適이 "최근 30년 동안 하나의 명사가 국내에서 거의 무상의 존엄한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50/ ... 그 명사는 과학이다..."(호적, '<과학여인생관>서' (왕맹추 편, <과학여인생관>, 아동도서관, 1923), pp.2-3.)


그러나, 1923년 2월 북경대학 교수 張君勱가 청화대학에서 '인생관'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하고, 그것을 <청화주간> 제272기에 발표하면서 과학은 인생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여기에 대해 같은 해 4월 지질학자인 丁文江이 '현학과 과학'이라는 글을 <노력주보> 제48·49기에 발표하여, 장군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필두로 그 주장에 격렬한 공격을 가하면서 과학의 '만능'을 옹호하고 나섰다. 여기에 梁啓超, 吳稚暉, 張東蓀, 林宰平, 王星拱, 唐鉞, 林叔永, 孫伏園, 朱經農, 陸志韋, 范壽康 등과 같은 당시 사상·학술계의 유명한 인사들이 <노력주보>, <학등>(<시사신보>의 부간) 등에 잇따라 글을 발표하여 논쟁에 참가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과학과 현학의 논쟁' 또는 '인생관 논쟁'이다.*


*(주3) 같은 해 11월에는 상해의 亞東도서관이 진독수와 호적의 序를 붙여, 그 동안 논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의 글을 한데 모아, <과학과 인생관科學與人生觀>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고, 12월에는 泰東도서관에서 <인생관논쟁人生觀之論戰>이라는 제목으로 6개월 동안 이루어진 약 25만여 자에 달하는 글을 수록하였다...



호적은 앞서의 인용문에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국 8·9년간에 梁任公(양계초) 선생이 그의 <歐遊心影錄>을 발표하기에 이르러, 과학은 이제 중국에서 문자 그대로 '파산'을 정식으로 선고받았다.(호적, '<과학여인생관>서', p.3.)


51/ 양계초는 1918년 12월말 북경정부의 특사로서 장방진, 장군매, 서신륙, 정문강, 유숭걸 등을 수행원으로 하여 유럽을 여행하였다... 1920년 3월 상해로 돌아온 후, 그 주요 내용을 상해의 <시사신보>와 북경의 <농보>에 나누어 연재하였는데... 바로... <구유심영록>이다. 호적은 바로 이 <구유심영록>이... '과학선생'에게 최초로 유효하고도 심대한 타격을 가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52/ '유럽여행 동안의 일반 관찰과 감상은 상·하 두 편으로 나뉘어 있다. 그 상편은 '대전전후의 유럽'이라는 제목 아래, 1. 서언, 2. 인류역사의 전환, 3. 국제상의 숨은 우환, 4. 각국 경제 및 재정의 파산, 5. 사회혁명의 어두운 분위기, 6. 학설 영향의 단면, 7. 과학만능의 꿈, 8. 문학의 반사, 9. 사상의 모순과 비관, 10. 신문명 재건의 전도, 11. 물질의 재건 및 유럽의 현재 국면 등 11개의 소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편은 '중국인의 자각'이라는 제목 아래, 1. 세계주의의 국가, 2. 중국은 망하지 않았다, 3. 계급정치와 全民정치, 4. 서두르면 안된다, 5. 최선을 다하는 주의, 6. 사상의 해방, 7. 철저, 8. 조직능력과 법치주의, 9. 헌법상의 두 요점, 10. 자치, 11. 사회주의에 대한 검토, 12. 국민운동, 13. 중국인의 세계문명에 대한 책임 등 13개의 소주제를 다루고 있다.


53/ ... 상편의 제7절인... '과학만능의 꿈'을 그 영향력의 측면에서 <구유심영록>의 핵심이라고 보아도 대과가 없을 것이다.(이하 관련 내용은 양계초, <구유심영록절록> (<飮氷室合集 專集> 권23, 상해중화서국, 1936), pp.10-12를 요약)


이 글에서 양계초는... 서양의 근세문명은 봉건제도, 그리이스 철학, 기독교 등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프랑스 혁명 후 봉건제도가 완전히 붕괴되고 기존의 도덕이 현실에의 정합성을 상실하게 되자, 유럽인들의 내면생활이 점차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54/ 즉 과학의 발달을 기반으로 형성된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유럽인들이 윤리적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56/ 신기루는 무엇이었나? 바로 이 분 '과학선생'이었다. 유럽인은 한바탕의 과학만능이라는 꿈을 꾸었지만, 오늘에 이르러 오히려 과학의 파산을 부르짖고 있는데...


57/ 독자는 절대로 이때문에 과학을 비천하게 대해서는 안된다. 나는 절대로 과학의 파산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과학의 만능을 승인하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관 논쟁'에서 양계초는 두 개의 글을 발표하였다. 첫번째의 것은 1923년 5월 5일 <學燈>에 게재한 「현학과 과학의 논쟁에 관한 '전시국제공법' -잠시 국외중립인 양계초의 선언-」이라는 글인데, 부제가 의미하는 대로 장군매와 정문강 사이의 논쟁에 국외 중립인의 입장에서 양측이 논쟁에서 지켰으면 하는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는 것에 불과하므로, 논쟁에 있어 그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 것인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지 않다.


58/ 반면에 5월 23일 역시 <학등>에 발표한 「인생관과 과학」은 '국외중립인'의 충고가 아니라, 사실상의 '참전인'으로서 자신이 생각하는 과학과 인생관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 글이다. 이 글에서 양계초는 우선 장군매와 정문강이 '인생관'과 '과학'을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고 쟁론을 벌인 탓에 양자가 말하는 '인생관'과 '과학'이 서로 같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나름대로 '인생관'과 '과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인간이 심계와 물계 두 측면을 조화롭게 결합하여 이루어내는 생활을 '인생'이라 한다. 우리는 일종의 이상을 걸어놓고 이러한 생활을 완성하는데, 이를 '인생관'이라고 한다. (물계는 자기의 육체 및 자기 이외의 인간, 내지 자기가 속한 사회 등을 포함한다.)

(2) 경험적 사실에 근거, 분석과 종합을 거쳐 진리에 가까운 공리를 구하고 이로써 동류의 사물을 추론하는 학문을 '과학'이라고 한다. (과학을 응용하여 만들어낸 물질이나 기관 따위는 '과학의 결과'이지, '과학'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인생 문제는 대부분 과학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하지만, 어떤 작은 일부분 혹은 가장 중요한 부분은 초과학적이다.


59/ 인생에서 이지 방면에 관계되는 사항은 절대적으로 과학방법으로 해결해야 하지만, 정감 방면에 관계되는 사항은 절대적으로 초과학이다.


장군매가 직각과 자유의지를 존중한 것에는 찬성하나, 그 응용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즉 인간의 존엄성은 자유의지의 존재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객관을 말살한 자유의지는 맹목적 자유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유의지는 理智와 상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문강처럼 과학만능을 과신하여 과학이 궁극적으로 인생관을 통일할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에도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랑이나 아름다움 같이 정감에 속하는 가치들은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지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0/ 양계초는 1922년 8월 20일 南通에서 열린 중국과학社** 연례회의에 연사로 초대되어 「과학정신과 동서문화」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적이 있다.


**주25) 중국과학사는 1914년 미국 코넬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는 중국 유학생들이 결성한 단체로, 1918년 본거지를 중국 본토로 옮겼다... 이들이 발행한 잡지 <과학>은 과학적 인생관의 채용을 논하는 글을 매호 실었다. 콕Kwok은 이 단체의 등장과 활동을 중국 '과학주의'의 등장과 발전을 상징한다고 평가하고 있다.(D.W.Y. Kwok, Scientism in Chinese Thought 1900-1950, New York: Biblo and Tannen, 1971, pp.14-15.)



61/ 그는 우선 그 동안 중국에서 과학이 올바로 발전하지 못한 원인을, 중국인들의 과학에 대한 인식이 갖고 있는 잘못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중국인의 과학인식이 갖고 있는 오류의 첫번째로 지적한 것은, 중국인들이 과학을 '형이하의 器'에 불과하다고 보는 전통적인 인식틀을 벗어나지 못하여 과학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 아무리 새로운 사상이라고 하더라도 과학의 뒷받침이 없이 섣부른 일반화를 시도하는 것은 금기시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정치학·경제학·사회학 등과 같은 사회과학 분야들을 과학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어떤 학문도 과학정신을 가지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고 있다. 「인생관과 과학」에서 장군매가 주장했던 과학이 해결할 수 없는 9개의 영역에 대해, "이중에서 십중팔구는 오히려 과학방법을 써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들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 양계초가 이처럼 과학을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인식했으며, 때문에 과학개념에서 본질적인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 방법 또는 정신에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62/ 셋째로, 과학의 폐해를 논하면서 과학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경향을, 과학에 대한 지나치게 공리적이고 속된 인식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64/ 양계초는 과학을 수단으로 하여야만 '본령'에 접근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66/ 양계초가 보기에는 19세기의 서양이 과학의 만능을 믿었기 때문에 초래된 나쁜 결과에는 제1차 세계대전만이 아니라, 전후의 빈부갈등과 사회혁명의 "어두운 분위기"까지 포함되고 있는 것이다.


75/ 그는 과학에 대해 상당히 '합리적'인 인식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관 논쟁'에서 자유의지의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과학파'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똑같이 '서구의 몰락'을 관찰하고도 계속 '西化論'을 주장해 나가는 호적과 같은 사람들이 양계초를 비롯한 '동방문화파'와 강한 대비가 됨을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