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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과학 탐닉

1920년대 중국에서 '현학'과 '과학' 논쟁

김창규

by 조영필 Zho YP

김창규 (2012), '1920년대 중국에서 '현학'과 '과학' 논쟁', 중국사연구, 78, 129-160.


129/ 신문화운동 시기 陳獨秀는 <신청년>에 발표한 글에서 과학을 '賽선생'(賽의 중국 발음은 '사이'이며, 이는 science의 첫 부분의 발음이다)이라고까지 의인화시켜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130/ 1923년 2월 독일에서 귀국한 장군매는 「인생관」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든 인생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을 한다. 그 내용이 <淸華주간>에 발표되자, 지질학자 정문강이 <노력주보>에 「현학과 과학」이라는 글을 써서, 장군매의 몸에 "玄學이라는 귀신이 붙었다"고 즉각적인 반격에 나섰다.


과학파는 과학적 방법, 태도, 정신을 신앙으로 삼아 그것으로 심신, 사회,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현학파는 개인의 자유, 의지의 자유, 개성의 독립을 강조하였지만 그 중요성과 절박성이 전자에 비교해 보면 훨씬 뒤떨어져 과학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택후 저/ 김형종 역, <중국현대사상사의 굴절>, 지식산업사, 1992, p.78.)


133/ 1차 대전 후 유럽에 가서 각국의 상황을 살펴본 양계초는 <구유심영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비유컨대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은 나그네가 멀리서 커다란 검은 그림자를 보고 그 인도를 받으면 되리라고 생각하여 죽을 힘을 다해 뒤쫓아 가다 거의 다다를만 하자 갑자기 그림자가 사라져 버린 것과 같다. 이 그림자는 누구인가? 바로 '과학 선생'이다...


134/ 이러한 기계론적 인생관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일종의 운명론이며,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적 책임을 부정하여 약육강식의 사회를 조성했다며...


140/ 현학파는 과학이 아닌 과학적 인생관을 반대했다... 과학적 인생관은 이성일원론·기계적 결정론 및 공리주의와 실용주의를 대변하는 것으로 이 모든 것들이 과학의 본분을 넘어선다고 보았다.


현학파는 과학 또는 과학적 방법의 유용성을 인정하면서도 과학만능주의에는 반대했다.


142/ 정문강은 인류의 모든 심리적 내용까지 과학의 재료이며, 참된 개념추론은 과학이 연구할 수 있고 또 연구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인생관 문제 역시 과학적 방법을 통해 분류하고 질서를 찾아낼 수 있는 것으로 결코 과학과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143/ 과학은 날마다 진리를 추구하고 시시각각으로 사람들의 선입견을 타파하며, 과학을 배우려는 사람에게 진리를 추구하는 능력을 배양케 할 뿐 아니라 진리를 사랑하게 하는 마음도 생기게 하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현학은 사실·논리·분석 등을 부인하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신앙이 없는 종교' 혹은 '방법 없는 철학'일 뿐이었다.


144/ 정신과 물질 문명 사이의 경계 설정을 거부하고, 서구 과학 기술 문명의 정신성과 우월성을 단언한 인물이 호적이었다. 그는 인간의 위대한 정신이 요구하고 있는 행복과 만족은 비행동적이던 동양의 성현이 이룰 수 없었던 과학 법칙의 발견으로 충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45/ 서양 근대 문명의 정신 방면의 첫째 특색이 과학이다. 과학의 근본 정신은 진리를 찾는 데 있다.


"이렇게 활활 타오르는 과학의 불기둥을 현학귀가 결코 흔들어 넘어뜨릴 수는 없다"면서 장군매를 석가여래의 손바닥 안에서 스승에게 물려받은 재주를 뽐내는 손오공에 비유하며 조롱했다... 호적은 오히려 중국이 과학의 축복조차 누려보지 못하였으니 과학이 가져오는 재난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고 단언한다.


147/ 계몽과 救亡이 이중 변주를 이룰 수 없는, 곧 구망이 모든 것을 압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148/ 구망이 대두되면서 논쟁은 새로운 양상을 맞이하였다. 과학파는 유물변증론자(유물사관파)와 유심자유주의자(과학방법파)로 분화한다.


149/ 진독수는 역사 발전의 동력과 국민 경제의 향상을 놓고 국가(사회)와 개인 중 누가 그 주도권을 갖느냐를 놓고 호적과 대립하였다.


150/ 양자는 과학적 인생관에는 동의했지만 그 과학을 누가 어떻게 주도할 것인가 놓고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 자유의지인가, 사회적 인과율(결정론)인가 하는 문제였다.


152/ 마르크스주의가 점점 사람들에게 과학으로써 이해되고 받아들여졌으며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데올로기(공산주의)와 과학(유물사관)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마르크스주의가 광범하게 파급되고, 1949년에 마침내 사회주의 혁명이 완성되는 것도 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과학으로 받아들였다.


153/ 한편 과현 논쟁 이후 현학파는 형이상학의 길을 걸어 현대신유가로 발전하였다...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우주관은... 인류의 정신 세계와 정신 생활의 평면화를 초래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熊十力은 이를 '物化'라고 하였으며, 牟宗三은 '量化'라고 했다.


155/ 과학만능주의가 가져다 줄 인간에 대한 폐해와 장래에 닥칠 재앙을 경고하였던 현학파를 '현학귀'로 내몰았던 정문강은 1936년 세상을 떠났다. 과학을 그토록 맹신했던 호적은 중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허수아비 총통인 줄 알면서도 장개석의 총통 출마 권유를 수락하였다. 물론 선거는 치르지도 못하고 공산화되었다.


성찰과 비판을 수용하지 못한 채 과학을 맹신하였던 정문강과 호적의 입장에서 보면, 결과적으로 과현 논쟁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호적이 그토록 염원하였던 과학과 민주가 조화를 이루는 중국 건설은 공염불이 되었다. 대신 그는 상해 부두의 뱃전에서 붉은 중국을 뒤로 하고 쓸쓸히 미국으로 향했다. 장군매 또한 미국 망명길에 오른 후 세계를 주유하면서 조국의 민주주의 실현을 염원하였지만, 정작 조국 중국은 그를 외면했다.


156/ 과학만을 고수하면 물질적 부만을 추구하거나 계급전쟁 혹은 사회혁명을 초래할 뿐이라던 장군매의 예상은 놀랍게도 적중하였다.


중국의 과학파가 승리하였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허나 과학은 인생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내지 못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대로 모든 과학 문제는 해답을 얻을 수 있지만, 인생에 대해서는 여전히 해답을 얻을 수 없다... "인생관의 통일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것이며, 불필요할 뿐 아니라 해로운 것이다"는 양계초의 말이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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