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식(편저)
김영식(편저), <동아시아 과학의 차이>, (주)사이언스북스, 2013.
1부 동서양 과학의 비교
1장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바라본 서구 과학 전통
30/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차이점은 중세 서구에서 자연 철학이 대학에 받아들여져 그 교과과정의 필수 구성요소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전통시대 중국에서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요점은 도리어 자연세계의 사물과 현상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것들은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당연하게 여겨졌으며 따라서 단순하게 받아들여졌다...
31/ 과학 혁명에서 필자에게 특히 흥미로운 측면은 16세기 서구 유럽에서 시작된 과학 발전이 최고점에 이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전이 정점에 이른 이후에 고착화, 침체 혹은 쇠퇴로 이어지는 것이 수순이며, 세계사에서 과학이 융성했던 다른 사례들, 예컨대, 송대 중국, 고대 그리스, 중세 이슬람 등은 거의 대부분 이런 수순을 밟았다. 그런데 융성한 과학의 발전이 얼마 뒤 정점에 도달하고 이후 200~300년에 걸쳐 발전의 속도가 늦춰졌던 이런 여타의 사례들과 달리, 유럽의 과학 혁명으로 시작된 과학의 발전은 멈추지 않았으며 심지어 속도를 더해 갔던 것이다...
32/ ... 유학자들은 세계의 실재성을 수용함으로써, 현상 세계의 실재를 부인하고 현실 세계에서 시선을 돌려 내적 통찰에 정진하도록 가르치는 도교 신도들이나 불교도들과 스스로를 구별지었다. 그래서 공空과 무無, 무한, 공간, 물질 등의 개념을 거부하고 이에 대한 논의를 회피했다. 유학자들에게 이런 개념들은 현실 세계의 실재와 대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가상의 개념일 뿐이었다. 이는 그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했던 현실 세계의 도덕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데에도 쓸모가 없는 개념들이었다.
33/ ... 중세 유럽의 기독교 사회에 유입된 그리스(혹은 아랍) 과학이다. 이때 그리스 과학은 단독으로 유입된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동반했다. 중세 유럽인들은 과학 자체를 문제삼지 않았으며 오히려 과학의 상당 부분을 선뜻 수용했다...
... 서양 과학이 기독교를 동반하고 동아시아에 유입되었을 때... 그러나 여전히 과학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여기서도 쉽게 수용된 것이다...
34/ ... 서구에서 발생한 세 가지 사건 혹은 현상...
① 철학자의 전통과 기술 전문가 전통이 수렴된 일.
② 자연 세계에 관한 주제가 식자층의 보편적 관심사로부터 분리되었으되, 여전히 중요한 주제로 취급된 것.
③ 전문화 및 직업화의 결과 자존적 집단으로서 '과학자들'이 출현한 일.
35/ ... 한 문화 내에서 과학적 우위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자리바꿈하는 현상이다. 유럽에서는 이런 현상이 계속해서 일어났는데, 이 점이 흥미로운 것은 중국 문화권에서는 언제나 중국이 과학적 우위를 점하여 두 문화의 상황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후자에서는 중국이 '중심'이었고, 중요한 발전들은 거의 어김없이 중국에서 처음 일어난 뒤에 '주변' - 나카야마 시게루가 즐겨 쓰는 용어를 빌리자면 - 으로 확산되었다.(Shigeru Nakayama, "History of East Asian Science: Needs and Opportunities," Osiris10 (1995), 80~94.)
36/ ... 이른바 '반사적reflective' 이해라고 불릴 만한 예... 19세기 후반 일본이 서양 과학의 도입과 산업화에서 이룬 성공이 바로 그것이다.(J.R. Bartholomew, The Formation of Science in Japan (New Heaven, 1989), 49~237.)
... 일본에서 진행된 일은 서구 역사의(혹은 세계사라고 해야 할까?) 일부로 볼 수 있고 또 그렇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일본은 19세기 후반 서양의 주요 국가들에서 진행되던 경쟁적인 산업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당시 여러 국가들의 과학 기술 발전 상황을 지금 돌이켜보면, 여러 면에서 일본이 당시 주요 서양 국가들과 비등하거나 이들보다 앞섰으며 비슷한 일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에서 진행된 일의 상당 부분은 19세기 후반 여타의 유럽 나라들이나 미국이 스스로가 근대 과학 기술의 어떤 측면을 뒤따르는 중에 있다고 생각하며 추격을 위해 노력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는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이 보인 행동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 아울러 일본 초기 역사의 경로가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는 상당히 다르고 많은 점에서 서양 국가들과 유사하다는 사실도 꽤 의미심장하게 읽힐 수 있다. 이를테면 소위 고대 일본 과학의 '쇠퇴'와 고대 그리스 과학의 '쇠퇴'를 둘러싼 상황의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이다.(Masayoshi Sugimoto and D.L. Swain eds., Science and Culture in Traditional Japan, AD 600-1854 (cambridge, 1978).
3장 중국 과학에서의 Why not 질문
과학 혁명가 중국 전통 과학
55/ ... 일례로 펑유란(馮友蘭) 같은 사람은 자신이 쓴 글의 제목을 "왜 중국에는 과학이 없는가?"라고 붙이기도 했다.
56/ ... 조지프 니덤은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졌다. "왜 중국은 1400년 동안이나 여러 면에서 유럽보다 앞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근대 과학을 이룩해 내지 못했는가?"
... 철학자 로버트 코헨Robert S. Cohen은 이렇게 표현했다. "중국은 충분히, 자신 있게, 화려하게 과학 전통을 발달시켜 근대적인 과학, 기술의 문턱에까지 도달했지만 그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왜 못했을까?" 철학자 코슬로Arnold Koslow의 경우 질문은 이런 식이었다. "고대 및 중세 중국에서 상당 수준에 도달했던 광학optics, 음향학acoustics, 수학mathematics과 같은 분야의 전통들은 왜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되었는가?" 과학 혁명을 연구한 과학사가 플로리스 코헨H. Floris Cohen은 "갈릴레오와 같은 사람이 중국에 출현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만약 그랬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라고 물었다. 때때로 이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대답이 Why not 질문의 형태로 표현되기도 했다. "왜 과학 활동은 서유럽에서만 기능적으로 분화되고 제도화되었으며, 중국이나 여타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못했을까?" 아마도 가장 중립적이지만 별로 흥미롭지 않은 형태는 나 자신이 제기한 질문인 "왜 중국인들은 자연 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을 그들이 했던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유럽 인들이 근대 과학을 이끌어낸 형태로는 발전시키지 않았던 것일까?"일 것이다.
57/ 우리가 Why not 질문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것을 아무 문화권에 대해서나 묻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Why not 질문을 제기하는 경우라면 보통 ① 해당 문화권의 과학이 '과학 혁명'에 매우 근접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과학 혁명으로 넘어가는 '문턱'을 넘지는 못했을 때이거나 ② 해당 문화권의 다른 영역이 아주 진보해 있어서 사람들이 왜 과학은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는지 궁금해 하게 될 때에 해당한다. 실제로 중국, 인도, 이슬람은 이 거대 질문이 제기되는 극소수의 문화이고, 그중에서도 중국에 대해서는 Why not 질문이 아주 빈번히 제기된다...
Why not 질문은 좀 더 제한된 범위로, 17세기 중국, 세종 시기 조선(1418~1450), 도쿠가와 막부 시기 일본처럼 다른 문화권에 대해 제기되기도 한다. 때때로 Why not 질문은 "왜 정체되었는가?," "왜 쇠토했는가?"의 질문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런 질문은 고대 그리스, 이슬람, 명대 중국, 세종 이후의 조선 등에서 제기되고는 했다.
59/ ... 그레이엄A.C. Graham... 그는 질문이 필요한 것은 어딘가에서 "과학 혁명이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일어난 곳, 즉 유럽에서 "왜 일어났는가?"라고 말한다.
60/ ... 사건 E가 일어나는 것보다 일어나지 않는 not E가 더 자연스러운 경우에는... 사람들은 not (not E)이라는, 즉 사건 E가 일어났다는 덜 당연한 사실에 대한 이유를 물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드 배리William Theodore de Bary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 수 있다...
... 왜 서양은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에서 행해지는 문명화된 행동양식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해는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는가?
62/ ... 사건 E가 일어나지 않았으면서 그런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던 문화권과 사건 E가 전혀 일어날 가능성이 없었던 문화권을 구분할 수 있다. 혹자는 이슬람과 중국이 이런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64/ ... 과학 혁명 이전과 그것이 일어나는 동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는 "왜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과 관계된 여러 종류의 잘못된 생각을 낳았다. 그런 오해들 중에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유형은 모든 문화권들의 전통과학이 유럽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4, 15세기까지는 다소간 비슷했었고, 그 이후 유럽 과학만 도약을 했다는 가정이다. 우리는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중세의 서양 과학과 전통시대 중국 과학 사이에는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논의된 맥락에서도 실제로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
65/ ... 또 하나의 오해는 근대 과학이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의 채택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믿음이다. 예를 들어 니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근대 과학이 수학과 실험이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른 유형의 잘못된 이해로서... 코슬로가 제기했던 대로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설령 중국의 과학 전통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외연이 확대되고, 깊이가 더욱 깊어졌다고 하더라도 왜 꼭 근대과학이 되어야만 하는가?" 과학 발전(혹은 과학혁명)과 기술발전(혹은 기술혁명)을 혼동하는 것 또한 잘못된 이해의 한 예이다... 전통 중국에서도 과학과 기술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넬슨Benjamin Nelson이 지적했듯이 과학 지식을 기술적으로 이용하는 데 자본주의적 이해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과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다.
66/ ... 전자(이슬람)의 경우 과학은 사회 주변부의 고립된 지식인 그룹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고, 후자(중국)의 경우 과학적 지식은 광범위하게 집대성된 학문 체계의 일부로 들어간 후 학문활동의 주류집단에 의해 그저 당연한 것으로만 여겨졌다.
67/ ... 우리는 역사에서 '왜'라는 질문을 물으면서 그런 종류(필요충분조건)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필요 충분 조건이라기보다는 영향, 촉진reinforcement, 연관correlations, 연결connection, 연쇄linkage, 우연의 일치coincidences와 같은 다양한 것들이다...
68/ ... 지금까지 중국 과학에 제시된 방해 요인으로는 인과성causality, 자연법칙, 창조자로서의 신에 대한 관념, 증명, 형식 논리, 기하학, 대수학, 실험 등의 몇몇 방법론적인 요소들, 그리고 자본주의, 도시화, 상인 계급, 노예제, 대학, 조직화된 종교, 개인주의, 관용 등의 사회, 문화적 요소 등이 중국에 없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그러나 방해 요인으로서 무엇인가의 부재를 내세우는 것은 결국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어떤 사건을 그곳에 없었던 어떤 요인이 방해했다고 말하는 셈이 된다.
69/ ... 특히 서양의 과학 발달에서 중요했던 요인들은 중국의 과학의 발달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가정이다...
... 중국의 순환적 시간 개념과 서양의 단선적 시간 개념 어미 변화가 없는 중국어와 어미 변화가 있는 서양 언어, 해석학 위주의 중국 수학과 기하학 위주의 서양 수학, 물리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중국의 파동 이론에 대한 편향과 서양의 입자 이론에 대한 편향 등이 그것이다.
... 로버트 코헨은... "인과적 조건 논변들causal conditional arguments"이라고 부른 것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73/ ...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런 대단치 않아 보이는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리라는 것이다...
4장 유교와 동아시아 과학의 발전
75/ ... 서구 과학 기술에 바탕한 것으로 간주된 서구 열강의 힘에 깊은 인상을 받은 20세기초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중국의 과학 전통이 미숙하거나 심지어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여겼다. 서양의 학자들은 중국학 연구자뿐 아니라 아인슈타인, 레비브륄Lucien Levy-Bruhl 같은 이들도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를 공유하고 그 기저에 놓인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해 했다...
91/ ... 유교의 자연 지식이 개별적인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반화된 이론적 틀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그 존재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존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가능한 모든 세부사항과 결과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며, 모든 모순을 검토하고 해결하는 데까지 논의를 밀어붙이는 것이 그들의 습성은 아니었다...
... 유학자들은 서구 인식론의 핵심 질문이었던, 어떻게 지식을 얻는지, 혹은 어떻게 자신이 아는 것이 온전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지 등의 논의에 매진하지 않았다. 그들이 '방법'에 대해서 논의한 경우는 거의 모두가 공부의 방법, 특히 '독서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때의 목표는 책 속에 담겨있는 리였다. 어떻게 책에 기록된 정보로부터 리에 도달할 것인지가 그들의 문제였다. 책에 기록된 것을 어떻게 알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그들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2부 과학의 전파
5장 동아시아 역사상 과학의 전래와 과학의 변화
95/ 다양한 종류의 과학 전래의 결과로 일어난 크고 작은 많은 변화를 서양 과학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바빌론 천문학의 고대 그리스 세계로의 전래, 그리스 고전 과학의 이슬람 문화로의, 그리고 이어서 중세 유럽으로의 전래, 18세기 뉴턴 과학의 프랑스로의 전래, 그리고 이어서 프랑스 과학의 독일로의, 독일 과학의 미국으로의 전래 등은 모두 과학상의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99/ 어떤 경우에는 과학이 수용된 다음 '무시'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 중세 이슬람 문화 속에서 그리스 과학의 위치가 전형적으로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또 원대 이래 중국에서 회회력回回曆(이슬람 역법)의 위상도 그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회회력은 존재했고 사용도 되었지만, 그것은 궁정 내의 특수 전문 부서에서 고립된 채로 남았다...
... 때로는 수용과 무시가 한꺼번에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청대 궁정에서 서양 역법은 큰 파문을 일으킨 후 수용된 것은 분명하지만 차츰 흠천감欽天監 내의 고립된 활동이 되어갔다.
102/ ... 중세 유럽 기독교 사회에 전래된 이슬람 과학(또는 그리스 과학)의 경우이다. 중세 유럽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슬람 과학 자체가 아니라 그것과 함께 전래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었다. 전래된 과학은 중세 유럽인들에 의해 대체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중세 유럽대학과 가톨릭교회가 과학은 환영했던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 서양 과학이 들어왔을 때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지적 요소였던 유가 철학과 충돌을 빚은 것은 과학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수반되어 들어온 기독교였다... 중세 유럽의 경우 외래 철학이 기존의 종교와 충돌을 빚은 데 반해 17, 18세기 동아시아의 경우는 외래 종교가 기존 문화의 지배적 철학과 마찰을 빚은 것이다...
103/ ... 이슬람의 주류 지식인들이 그리스 과학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그리스 과학이 이슬람 종교와 충돌이나 마찰을 빚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과학이 그들에게 유용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도 이슬람 지식인들이 해로운 '외래의 침입자'로 여겼던 것은 그리스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었다.
... 17, 18세기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왜 서양 과학을 받아들였는가?
... 우선 이 질문은 왜 당시 동아시아인들이 외래의 과학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끌렸는가 하는 또 다른 질문과는 같지 않은 질문이다. 이 또 다른 질문에 대한 답에서는 분명히 '호기심'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이나 현대의 학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답 한 가지는 서양 과학은 그 '우수성' 때문에 동아시아인들에 의해 신속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그같은 우수성을 보여준 가장 두드러진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서양 천문 계산의 정확성일 것이다... 또다른 예로 유클리드 기하학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마테오리치Matteo Ricci利瑪寶(1552~1610)는 그 엄밀성(rigor)과 확실성(certainty) 때문에 중국인들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이야기한다. 서양 과학이 가진 수학적 방법의 우수성을 인식한 사람들도 있었고, 서양의 세계 지도, 무기, 농법 등의 우수성이 중국인들에게 인식되었다...
*많은 현대의 학자들이 중국 지식인들이 예수회 신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온 서양 과학의 우수성 때문이었다는 데 동의한다. 이와는 다른 견해를 보이는 예로는...
104/ ...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님도 또한 분명하다. 예를 들어 서양 과학의 한 분야나 주제가 중국의 해당 분야나 주제에 비해 우수하다는 판단은 어떤 기준에 근거해야 할 것인가? 과학이란 그 성격상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고 가치중립적이어서 우수성에 대한 그 같은 판단이 과학에 대해서는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또한 비록 한 동아시아인이 서양과학이 실제로 우수했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왜 굳이 친숙한 재래의 과학을 버리고 새로운 외래의 - 오랑캐의 - 과학을 받아들이는 수고를 하려고 했을 것인가?
더 그럴듯한 대답은 서양과학이 '유용'했고 이를 받아들인 사람들에 의해 실제로 사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수용되었다는 것일 것이다... '유용함'에는 여러 종류 - 실용적 유용함에서부터 그렇지 않은 유용함까지 - 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 과학의 유용함의 예로 흔히 드는 것은 물론 앞에서 본, 서양 천문학에 기초한 역법 계산의 정확도, 서양 지도에 담긴 지리적 정보의 풍부함 등이지만, 중국인들은 서양과학에서 다른 종류의 유용함도 찾아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중국인들 중에는 서양의 우주론적 사고가 가진 기하학적이고 구조적인 양식, 특히 천문 현상의 '소이연所以然'을 설명해 주고, 실제 세계의 물리적 구조를 표현해주는 점을 높이 평가한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서광계가 마테오 리치와 함께 유클리드의 <기하원본幾何原本>을 번역한 것은 기독교 교리가 의심할 나위 없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 경우는 과학의 유용성이 그것을 전래한 사람들의 종교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105/ 앞에서 이야기한 호기심, 우수성, 유용함 이외에 고려해야 할 점 한 가지는 전래된 과학지식을 기존 문화의 큰 사상적 체계 속에 편입시키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그 같은 사상적 체계가 신축성 있는 체계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서양의 우주론적 지식이 앞에서 본 것처럼 18세기 조선학자들에 의해 <주역>에 바탕한 그들 재래의 상수학적 체계 속에 편입된 것이 좋은 예라고 할 것이다.
4. '서학중원론'
서양과학 지식이 활발히 전래되던 17, 18세기에 중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생각 한 가지가 이른바 '서학중원론西學中源論'이다. 이에 따르면 당시 중국으로 들어온 서양 과학 지식의 기원이 고대 중국이라는 것이었다...
18세기 조선 학인들 중에서도 이 생각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서양의 과학만이 아니라 청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일종의 '중국기원론'이 나름의 역할을 했는데 청의 문물이 중화의 유제遺制이므로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북학파 학자들의 생각이 이를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조선이 오랑캐 청의 우수함을 인식해 가는 과정과 중국이 오랑캐 서양의 우수함을 인식해가는 과정 사이의 유사성까지도 볼 수 있다.
106/ ... 중세 유럽인들은 아랍으로부터 이슬람 과학과 학문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이 외래의 것이 아니라 그 기원을 따지면 자신들의 고대 황금기인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 마치 지역적으로도 고대 그리스 세계에 더 가까이 살았고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자신들보다 먼저 받아들여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던 아랍 인들을 제외하고 자신들만이 고대 그리스 문화의 후예라고 주장할 근거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 생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학의 서양 기원론'이라고도 부를 만한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또 편입, 토착화 과정의 일부로서 나타나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 예를 들어 남북조 시대의 중국인들은 불교가 원래 노자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인들만이 중국 기원론을 주장했던 것도 아니어서 유럽인들도 그같은 주장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테오 리치는 땅을 계란노른자에 비유하는 고대 중국 문헌들의 구절들에서 '지구' 개념의 기원을 보기도 했다. 때로는 외래의 요소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에서의 생소한, 또는 이질적이거나 저급한 요소를 받아들이는 데도 같은 식의 생각이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세기 <황제내경>이나 <주비산경周髀算經> 등의 편찬자들이 이 책들을 먼 고대의 황제와 연결시킴으로써 의학 지식이나 수학, 천문학의 전문 지식을 주류 문화 속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것은 좋은 예이다. 또한 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장인들과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작업의 이론적 배경을 아르키메데스 같은 고대의 문헌들에서 찾음으로써 그 지적 지위를 높여보려고 했다. 한편 서양의 과학적 개념에 대한 중국의 기원을 찾는 것이 모두 고대 중국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더 가까운 과거에서 기원이 찾아지기도 했다. 장재의 <정몽>에서 '지전' 개념의 기원을 찾은 17, 18세기 동아시아의 학자들 - 황백가黃百家(1643~?), 김석문金錫文(1658~1735), 강영江永(1681~1762), 홍대용洪大容(1731~1783) 등 - 이 좋은 예들이다.
110/ 서양과학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중심은 중심의 역할을 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19세기 중엽까지 조선인들은 서양과학을 받아들임에 있어 거의 전적으로 중국의 책들에 의존했다. 심지어 조선인들은 서양의 언어를 배우려 하지도 않았다. 중국으로부터 얻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많은 조선인들이 서양 과학 지식을 받아들인 이유 역시 주로 중국인들이 이미 받아들였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조선 정부의 시헌력 채택 결정은 서양 역법을 채택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결정이라고 하기보다는 중국 정부가 채택한 새로운 역법을 받아들이는가 않는가 하는 결정의 성격이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시헌력 채택은 중국이 채택한 공식 역법을 채택해온 조선 정부의 오랜 관행의 지속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주변부의 중심 의존 정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일본과 한국의 경우에 나타나는 차이가 이를 보여준다.
111/ 서로 다른 과학 분야들 간의 과학 지식의 전래도 흔히 일어난다. 특히 동아시의 경우 여러 서로 다른 과학 분야들이 서로 분리된 채 존재했고 이것들 모두를 아우르는 하나의 과학이라는 관념이 없었기에,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의 과학 지식의 전래는 더욱 중요했고, 그 결과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3부 한국의 과학
9장 한국 과학사 연구의 문제와 전망
196/
성리학 한국 과학의 지적 맥락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당연히 성리학이다. 조선 시대 학자들은 그들 나름의 신유학 학풍을 지칭하는 용어로, 본성(性)과 리理에 대한 이해를 뜻하는 이 말을 널리 사용했다... 성리학의 많은 요소들이 조선 신유학자들이 자연 현상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첫째, 성리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리理'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리에 도달하기 위한 도덕적, 학문적 노력을 '격물格物'이라 했다. 자연 현상이나 기술적 기물의 리는 결코 격물의 대상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격물의 학설은 단일한 보편적 리에 이르는 수단으로서 그런 대상의 탐구를 용인했다...
197/ 또 다른 중요한 개념으로 '하늘天'이 있는데, 이는 물리적인 하늘에 한정되지 않는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녀서, 리, 명命, 주재자主宰者, 자연세계 등을 뜻할 수 있었다... '천지天地'는 물리적 우주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는데... 이 둘에 또 하나, '사람人'이 결합하여 '천지인' 삼재三才를 이루는데, 이 셋 사이에는 소위 '기氣'의 매개를 통해 대응, 조화, 상호 보완, 병행, 심지어 동일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점성술과 풍수설의 다양한 신앙과 풍습을 정당화한 것도 이 개념들이며, 이런 신앙과 풍습은 한국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더 정통적인 천문 및 지리활동과도 분리되지 않았다...
성리학자들에게 중요한 개념으로서 자연 세계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도 유의미했던 것들은 이외에도 더 있다. '상象'과 '수數'가 그렇다. <주역>의 도상 및 문헌과 밀접하게 연관된 이 두 개념이 세계 운행의 - 혹은 질서나 비밀, 심지어 불가사의의 - 기저를 이룬다고 여겨졌다... 상수학 혹은 역학易學에 대한 이런 관심은 조선 후기에 서양 과학 지식과 자신들의 전통적인 세계관 사이에 모종의 종합이 가능하리라 믿은 학자들 사이에 특히 강하게 나타난 듯하다..
198/ 그렇다면 성리학자들의 학문적 지형도에서 과학은 어디에 위치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통상적으로 제기되는 단순한 대답은 성리학이 과학을 무시했으며 따라서 과학은 보잘것없는 위치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분명 훨씬 더 복잡했을 것이다...
우선 분야별로 상황이 제각각 달랐을 것이다. 천문학, 화성학, 지리학, 농학 등은 비교적 존중되었을 것이라 쉽게 추측이 되지만, 분야별로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성리학 내에서 과학의 위치는 또한 성리학 자체의 변화를 반영하여 시간이 흐르면서 바뀌었다. 고려시대 처음 한국에 수용된 것은 이론적 사색보다 도덕적 실천을 강조하는 원대의 신유교 철학이었다. 조선왕조가 들어서며 이론적 측면이 더 주목을 끌기 시작했을 때도 처음에는 마음心과 도道가 강조되었다. 조선 성리학자들이 '성', '리', '기' 같은 개념과 관련된 이론적 논의를 전개할 수 있게 된 것은 조선중기부터였다. 조선 후기에는 또 한 번 전환이 일어나 이번에는 '예禮'가 강조되었다... 이른바 '주리파'와 '주기파' 간의 논쟁이 한 예이다. 또 다른 예로 신간과 동물의 본성性이 같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 벌어진 이른바 호락湖洛 논쟁이다. 자연현상 및 과학적 주제에 관한 관심을 기를 강조한 무리나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동일'하다고 주장한 이들과 단순화시켜 연관시킨 몇몇 사례를 제외하고는, 지금껏 누구도 이러한 논쟁을 조선시기 과학발전을 둘러싼 '맥락'의 중요한 요소로 고찰하려 시도하지 않았다.
대신 자주 주목을 받는 것이 있으니,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실학자들의 과학적 관심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 우리는 실학운동 내에서 과학의 실제 위상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실학운동 초기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의 과학지식과 기술적 기물은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실학 내부의 학자들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과학 기술에 대한 입장이 제각기 달랐다.
201/ 중인은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고 한국에 특유한 계층으로, 기본적으로 세습되는 폐쇄적인 전문가 계층을 형성했다. 양반의 멸시를 받고 사회의 요직에도 진출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상당한 사회적 안정 및 각자의 전문화된 활동으로 인한 유리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연구들은 조선중기 주로 양반층의 분할 및 분화로 중인 계층이 형성되고 그것이 이후 공고화되는 과정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지배층의 일부로서 자신들의 지위를 회복하고 더 신분이 낮은 장인과 스스로를 구별하려 했던 중인들의 집단적 움직임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그러나 중인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이와 같은 사태의 전개가 그들이 수행하던 과학기술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없다...
... 양반층이 중인 및 중인의 전문지식과 활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특히 유효한 주제이다...
203/ ... 일본과 만주족의 침략으로 파괴된 국가를 복구하고 막대한 사회경제적 과제들을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긴박했다는 것은 실학 관련 연구들을 통해 알게되었다. 정옥자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시작된 일련의 정치적, 사회적 발전이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중세 농업 사회'의 해체와 '근대 상업 및 산업 사회'로 이어진 데 주목했다...
10장 한국 과학사 연구에서 나타나는 '중국의 문제'
214/ ... 조선학자들의 정서는 그들 자신을 중국의 문화와 동일시하고 또한 서구적 지식의 근원을 조선이 아닌 중국에 두려고 할 정도로... 어떤 경우 조선인들은 중국인들보다도 훨씬 더 중국의 전통을 강하게 고수하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중국에서는 송명 신유학의 정주학파를 점차 거부했지만, 조선에서는 적어도 한동안은 정통적인 주자 성리학의 발전이 지속·심화되었다... 청대의 중국인들은 역학에서 소옹과 채원정의 상수학적 사색처럼 역학의 본질을 오염시킨 과도한 요소들을 제거하려 한 반면, 김석문이나 서명응 같은 조선의 학자들은 이러한 요소들을 더욱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215/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조선인들은 그들 자신이 중국학계의 정식 일원이라고 느꼈던 것 같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 중국인들은 조선인들의 저술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심지어 조선의 저자들조차도 항상 조선인 독자들만을 염두에 두고 집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간혹 조선인들의 저술에 관심을 갖고 인정을 해주면 조선인들은 자신의 성취를 자랑스럽게 생각했겠지만, 그러한 사례는 드물었다.*...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중국인 학자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면서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대화 주제들을 선별했다. 박지원이 숙고 끝에 고른 것은 지구의 회전, 즉 지전地轉에 대한 관념, 그리고 "달에 사는 사람이 지구를 본다면 어떻게 보일 것인가?"라는 물음이었다.**...
*홍대용과 김정희가 그러한 예외적 사례에 속할 것이다. 김태준, <홍대용평전>... 155~156을 볼 것.
** 김태준, <홍대용평전>, 252~259.
216/ ... 조선의 학자들은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천문학 서적과 그 저자들의 중국식 이름을 언급할 때 '역서曆書'와 '역가曆家(역법의 전문가)'라는 똑같은 표현을 사용했다...
217/... 세종대의 천문학자들은 한국사 최초로 한양의 위도를 기준으로 하는 역산曆算 체계를 마련하는 데 성공하여, 중국 수도의 위도를 기준으로 한 기존의 역법을 대체했다. '칠정산七政算'이라는 이름의 이 새로운 체계를 사용하여 그들은 1447년의 일식과 월식을 예측할 수 있었다...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 <농사직설>... 이와 비슷한 정도의 발전을 보인 다른 분야로는 음악, 지리학, 지도학 등이 있다. 인쇄, 제지, 화기 제조, 심지어 법의학과 같은 분야의 각종 기법들도 이 시기에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 자주적 정신의 발로라기보다는 중국에 필적하는 역산 능력을 갖추겠다는 시도의 반영이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의 역산 체계를 '역曆'이라고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산算'으로 명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는 명나라 조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218/ 정조의 노력은 마침내 몇 가지 결실을 맺었다. 18세기 말, 그의 천문학자들은 시헌력의 계산법을 터득하고, 특히 서호수徐浩修(1736~1799)가 관상감 제조提調의 임무를 맡아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를 편찬한 이후... 조선의 역서를 선택했을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