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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자 공부

알파벳의 발명

조해나 드러커

by 조영필 Zho YP

조해나 드러커 Johanna Drucker, <알파벳의 발명 - 문자의 기원을 향한 탐구의 역사>, 2004, (주)북이십일 아르테.


15/ ... 알파벳을 처음 언급한 예는... 기원전 440년경 그리스인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쓴 글에서 찾을 수 있다... 헤로도토스는 알파벳이 그리스인의 발명품이 아니라 카드모스와 페니키아인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16/ ... <역사> 제5권의 핵심 구절은...


카드모스와 함께 온 페니키아인은 ...... 다른 여러 학식과 더불어 알파벳을 헬라스에 가져왔다. 그전까지 그리스인은 알파벳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던 것 같다... 이때 그들 주변에 살았던 그리스인은 대부분 이오니아인이었는데, 페니키아인에게 글을 배운 그들은 페니키아 문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 그는 페니키아와 이오니아의 교류를 기술했고, 이어 "보이오티아의 테베"에 있는 어느 신전에서 "카드모스 문자"를 직접 관찰한 증언을 내놓았다. 그리스어 원문에서 헤로도토스가 문자를 가리키며 쓴 단어는 '그라마타'였다. 라틴어 알파베툼alphabetum이 처음 쓰인 기록은 몇 세기 후 서기 2~3세기에 카르타고 출신 로마 기독교인 저술가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글에 남아 있다. 그리스 문법학자들은 음성언어와 문자를 서로 다른 용어로 - 각각 '스토이케이아stoicheia'와 '그라마타grammata'로 - 불렀는데, 이로써 그들이 말소리와 표기를 구별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17/ 헤로도토스의 <역사> 5권 57~59절 전문은...


57. 히파르코스를 살해한 이들이 속하는 게피라이오 씨족은 본래 에레트리아 출신이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내가 알아본 바 그들은 카드모스와 함께 오늘날 보이오티아라 불리는 나라로 이주해온 페니키아인 무리에 속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타나그라 땅을 할당 받아 정착하였다. 그후 카드모스족은 먼저 아르고스 인에게 밀려 추방되었고, 이어서 케피라이오족도 보이오티아인에게 추방당하여 아테네로 피신하였다...


18/ 58. ...... 이오니아인은 또한 예로부터 파피루스를 가죽이라고 불렀다. 파피루스를 구할 수 없던 시절, 그곳에서는 양이나 염소의 가죽을 대신 썼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가죽에 글을 쓰는 외국인은 많다.


... 에레트리아는 보이오티아 근처 에비아만 건녀편에 있었다. 이곳이 기원전 8세기에 주로 그리스인 사이에서 교역이 이루어진 곳이라는 점, 그러나 융성한 시기는 기원전 6세기라는 점은 고고학적 발견으로 뒷받침된다...


19/ 페니키아 알파벳은 기원전 1050년경에 안정되었지만 그리스에서 발견된 최초의 알파벳 명문은 그보다 몇 세기 후로 측정되므로, 그간에는 그저 문자없이 교역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의문이 인다...


35/ (아이작) 테일러 등 이전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릴리언) 제프리(<고대 그리스의 지역문자>, 1961)에게도 중대했던 질문은 문자가 쓰이지 않던 그리스 문화에서 일정한 사전 이해 없이 어떻게 신기술이 활용될 수 있었느냐 였다. 미케네 문명이 몰락한 기원전 12세기와 페니키아 문자가 도입된 기원전 7세기 사이에 높인 - 적어도 3세기라는 - 시대 차는 늘 골칫거리였ㄷ...


37/ 기원전 5세기에 쓰인 <파이드로스Phaedrus>에서 플라톤은 이집트신 토트(테우트)가 문자를 발명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 문화 형성에 이집트가 이바지한 바를 인정했다... 샹폴리옹의 형 샹폴리옹피자크의 긴 문장에도 제시되어 있다.


이집트를 방문한 적이 있는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집트 도시 나우크라티스 지역에는 고대 신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따오기라 불리는 새가 봉헌되었다고 들었다. 그의 이름은 테우트였다. 그는 숫자와 산술, 기하학, 천문학 등 과학을 발명한 존재이고, 체스 놀이와 문자 또한 그가 발명하였다. 당시 이집트 왕은 타무스Thamus였는데, 그는 그리스어로 이집트 테베라 불리며 아몬이라는 신을 숭배하는 상이집트의 대도시에 살았다. 테우트는 왕을 찾아가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설명하고, 이 지식을 이집트에 퍼뜨려야 한다고 말하였다." 테우트는 이들 발명 가운데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왕에게 설명해야만 하였다. 문자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대한 왕이시여, 이 과학은 이집트인의 지혜를 더욱 깊게 만들 것이며 그들에게 더욱 충실한 기억을 선사할 것입니다. 지식을 얻고 유지하는 어려움을 해소하여 줄 것입니다." 이에 왕은 답한다. "지혜로운 테우트여, 어떤 이는 기술을 발견하는 데에 능하고 또 어떤 이는 기술이 얼마나 유익하거나 해로운지 판단하는 데 능하지요. 문자의 아버지인 그대는 선입견에 이끌려 눈이 먼 나머지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있소이다. 문자를 배운 이는 기억에 맡겨두어야 마땅한 것을 떠올리는 수고를 모조리 이 기묘한 형상들에 떠맡길 터이고, 정작 자신은 실제로 기억에 아무것도 담아 두지 않을 터이오. 그러므로 그대는 기억의 수단이 아니라 회고의 수단만을 발견한 셈이오. 그대는 제자들에게 실제로 지혜롭지 아니하면서도 지혜로운 척할 수 있는 수단을 선물하였소. 그들은 스승의 지도 없이 읽을 것이고, 실제로는 무지하면서도 스스로 만사에 지혜롭다고 자신할 것이며, 그들의 대화는 견디기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오." 플라톤은 테우트 또는 어떤 신적 존재가 음성을 모음, 혼음, 약음으로 분리하였다고 말한다.


52/ 신이 모세에게 석판을 선물하는 이야기는 출애굽기 19장과 24장의 몇 구절에 나타난다...


24장 4절: 모세는 야훼의 말씀을 다 기록한 다음...

24장 7절: 그러고 나서 계약서를 집어 들고 읽어 백성에게 들려주었다.

24장 12절: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있는 이 산으로 올라와 머물러 있어라. 내가 훈계와 계명을 기록한 돌판을 너에게 주리니 너는 이를 그들에게 가르칠 것이다."


53/ ... 1세기 유대계 로마인 학자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서 유래한 역사 전통에서는 원대의 문자 사용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즉, 아담이 장남 셋에게 "글이 새겨진 기둥"을 두 개 세워 지혜를 보존하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이다...


223/ 페니키아 문자가 전파된 후 고대 유럽 상황에 관해서는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 등의 기념물과 주화에 새겨진 명문에서 얼마간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21세기에도 기원전 2000년대라는 결정적 시기와 연관된 유물은 수백 점에 불과하다. 이처럼 적은 수량은 같은 시대에 나온 설형문자 판과 신성문자 조각이 수십만 점에 이르는 점과 대조된다. 검증 가능한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굴된 예는 그보다도 적다...


224/ 이제 우리는 알파벳의 기원을 연대기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얼마간 신빙성 있게 기술할 수 있다. 기본 개요는 이렇다. 알파벳은 기원전 1800년경 또는 이후 레반트에서 셈어 사용 민족과 이집트 지역 주민이 문화적으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가장 오래된 증거는 이집트 나일강 서안 룩소르 북쪽의 와디 엘홀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다. 시나이 반도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발견된 후대 명문은 알파벳 서자가 점차 확산하고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대다수 증거는 기원전 14세기 이후 유물로 측정된다. 기원전 2000년대 후반에는 비교적 표준화된 알파벳 문자 - 이른바 선형 페니키아 문자 - 가 티레, 비블로스, 시돈 같은 해안 도시 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이 초기 알파벳의 변종인 원시 가나안 문자는 라키시, 게제르, 텔 엘헤시 등 서쪽 지중해와 동쪽 유대의 산악지대 사이 해안 평원에 형성된 내륙 정착지에서 쓰였다. 이 활동은 기원전 10세기 내지 9세기, 즉 고고학에서 철기시대 I기와 II기로 분류되는 기술적·사회적 발전기에 일어났다. 기원전 1000년 이후 이런 해안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해상무역을 통해 선형 페니키아 문자가 퍼져나가며 알파벳 문자는 더 널리 확산했다. 그러는 동안 본고장에서는 고대 히브리 문자 같은 변종이 나타나기도 했다. 육상 통상로와 항만을 통해,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튀르키예, 기타 여러 섬에 알파벳 글자가 전래된 과정은 명문과 유물을 비교해 추적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기원전 수백 년간 이들 문자가 변형을 거쳐 그리스, 에트루리아, 이탈리아, 이베리아 등의 변종이 되었다. 같은 근원에서 에티오피아, 아랍, 현대 히브리, 이어 인도 문자도 등장했고, 그 중 다수는 기원전 수백 년 사이에 동양과 아시아에 정착했다. 최초 충격이 오늘날 세계의 모든 대륙에서 쓰이는 알파벳 문자의 토대로 발전하는 데는 2000년 가량이 걸렸다.


226/ 알파벳과 연관된 고고학적 발견은 서로 다른 문화 집단에 속한 고대 인구가 함께 살던 몇몇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페니키아라고 알려진 레반트 북부 연안, 오늘날 레바논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비블로스 왕실 명문을 위시해 고대 가나안 땅의 셈어 사용자 주민이 만든 여러 소품이 배출되었다. 연안 남쪽의 고대 필리스티아는 기원전 2000년대에 미케네가 무너지고 에게해에서 온 사람들이 점했다. 그들은 페니키아 또는 가나안 문자를 받아들여 필리스티아어를 적었다. 북쪽에는 고대 이스라엘이 요르단강을 가로질러 있었는데, 그곳 주민도 고대 유대, 모아브, 암몬, 에돔Edom 주민과 마찬가지로 셈어를 썼다. 이들 지역과 문화, 언어는 알파벳 문자의 변종 형태와 이름(모아브 문자, 암몬 문자 등)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모두 기원전 1000년경까지 곳곳에 산재한 필기 문화에서 원시 가나안 문자에 뿌리를 두는 공통 알파벳이 쓰였음을 입증한다.


239/ 1928년 시리아 북부 해안의 고대도시 우가리트 유적지에서 흥미로운 점토 명문, 이른바 라스 샴라 석판이 발견되었다... 탐사단은 기원전 14세기와 13세기 사이에 제작된 설형문자 석판을 다수 출토했다. 우가리트 명문은 설형문자가 셈어에 쓰였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 문자에는 서른 가지 기호가 있었는데, 이는 기원전 1000년경 굳어진 스물두 자 문자가 바로 이 선행체계가 축소된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단서였다. 기호들은 아카디아 설형문자와 구별되었고, 아베케다리움(대개 교육 목적에서 범례나 정렬한 단어 목록으로 만든 알파벳 자모명문)에서 발견된 자모순서는 남북셈 알파벳에 모두 일치했다. 다시 말해, 이들 명문에는 셈어 음운을 표상하는 독특한 설형문자 집합이 쓰였다는 뜻이다...


240/ 하지만 셈어 사용자들이 언어의 구성 단위에서 라스 샴라 설형 기호가 표상하는 음운을 추출했다는 사실은 근본적인 알파벳 서자 원리가 여러 공동체에 존재했음을 입증한다... 우가리트는 항구였기에 이집트, 키프로스, 히타이트(소아시아 반도에서 북부까지) 사이에, 어쩌면 미케네 그리스와도 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 장소였다...


언어분석력은 말소리를 표상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이들 설형 기호는 다른 우가리트 서자에서 빌린 것이 아니라 음운 표상을 목적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309/ ... 저명 성서학자 겸 셈어학자 크리스토퍼 롤스턴은 "세라비트 엘카딤과 와디 엘홀에서 나온 원시 시나이 명문"이 히브리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와디 엘홀 명문은 기원전 18세기로 추정할 수 있지만 "독자적인 고대 히브리 문자로 쓰인" 최초 사례는 기원전 9세기 이전으로 측정되지 않으며, 두 문자는 형태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롤스턴은 시나이 문자를 이집트 탈출 이후 이스라엘 민족과 관련짓는 시각이 "더는 인정받지 못하는 낭만적 관점"이라고 주장한 요세프 나베를 인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롤스턴은 언어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명문에 쓰인 언어가 기원전 2000년대 서북셈어 방언이라고 주장했다... 시나이 명문에는 총 스물일곱 개 자모가 있지만, 후자인 고대 히브리 문자는 스물두 자로 정제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롤스턴이 지적한 대로 시나이 명문에 쓰인 문자는 "하나로 독립된 문자"가 아니라 "이 모든 문자의 초기 조상"이었다...


316/

음소문자가 등장하려면 두 가지 근본 조건이 갖춰져야 했다. ① 언어 사용자들에게 구어의 어음을 본질적이고 유의미한 음운으로 분절할 만한 지식이 충분히 있어야 했고, ② 일정하게 표준화된 기호집합이 공용되려면 이를 뒷받침할 만한 문화조건이 갖춰져야 했다. 기원전 2000년대 고대 세계에는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장소가 곳곳에 있었다. 미케네 문명에서는 선문자 B와 키프로스 음절문자가 이런 조건을 만족시킨 듯하고, 오늘날 시리아 서부에서는 우가리트 설형 음절문자가, 이집트에서는 음절 단위 서자에 쓰이던 신관문자가 같은 조건에 부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청동기시대 후기의 문자발전은 기원전 1500년 내지 1300년에 일어났다.


알파벳으로 발전한 기호는 이르면 기원전 1800년에 나타났는지도 모르지만, 일부 학자는 그보다 후대인 기원전 1400~1350년을 유력 연대로 믿는다... 와디 엘홀 인근 지역에는 셈족이 장기간 거주한 정착지가 없었다... 기원전 1400~1200년에 나온 아베케다리움에서 증명되듯, 알파벳이 확산될 즈음에는 자모 이름과 순서가 확정된 상태였다.


328/ "고대 그리스의 여러 위대한 성취 중에서도 알파벳이야말로 아마도 가장 경이롭고 필시 가장 영향력있는 업적일 것이다." 1997년 로저 우더드가 쓴 이 말은 '그리스' 알파벳에 관한 전형적인 단정이다...


이렇게 그리스 알파벳과 셈 알파벳을 분리하는 관점에 따라, '알파벳 효과'라는 치명적 개념이 정립되었다. 마셜 매클루언, 해럴드 이니스, 월터 옹 등을 위시한 캐나다 미디어이론가 집단, 이른바 '토론토 학파'와 밀접히 연관된 '알파벳 효과'는 로버트 로건이 창안해 1987년 저서 제목에 쓴 말이다. 이 개념을 먼저 주창했던 사람 중 일부, 특히 잭 구디는 로건의 책이 나올 때쯤 이미 자신의 과거 명제를 수정하고 있었지만, 로건은 오히려 선행 연구자들의 작업을 바탕으로 개념을 한층 심화한 상태였다.


그의 논지에서 문제가 된 부분은 그리스 문화가 예술, 철학, 정치학, 과학 업적 면에서 고대 중동의 셈 문화뿐 아니라 중국과 인도 문화보다도 우월했다는 단정이었다. 이성적 사고와 민주주의, 개인 개념, 실증 과학이 그리스 문명의 고유한 성취이고, 음성 표기가 가능했던 이른바 그리스 알파벳이 이런 발전을 촉진하는 데 주요 역할을 맡았다는 주장이었다. 다시 말해, 그리스 알파벳은 우월한 발전의 일부인 동시에 원인으로도 지목되었다.


331/ ... 알파벳이 개발된 셈어권에서는 삼자음 어근만으로도 충분히 명료하게 언어를 쓸 수 있었다... 앨런 가디너의 분석을 통해 음운분석과 추상화는 기원전 17~15세기 이집트 문자에도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해블록이 주장한 차이는 언어학적 검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 1883년에 아이작 테일러가 고안한 구분법, 즉 셈 알파벳은 "미개"하고 그리스와 로마 알파벳은 "고상"하다는 구별은 고전학의 유산으로 남았다. 1986년에 나온 <뮤즈, 글쓰기를 배우다 The Muse Learns to Write>에서 해블록은 자신의 주장을 한층 넓혔다. 그리스 철학은 알파벳 덕분에 등장했고 자아는 소크라테스가 발견하고 플라톤이 텍스트화했으며 그리스 철학 전통에서는 아는 자로부터 앎이 분리되었다는 주장이었다...


332/ 해블록은 그리스 이전 문명에서 "그리스 문자혁명" 같은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고 잘못 결론지으며, 그가 오래 견지했던 문자성과 문명의 연관성을 되풀이했다...


... 1950년 캐나다인 역사가 해럴드 이니스는 <제국과 커뮤니케이션 Empire and Communication>을 발표했다. 이 획기적인 책에 연이어 <커뮤니케이션 편향 The Bias of Communication>(1951)이 나왔다...


이니스는 문자에 공간 확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덕분에 제국은 대면 행정의 한계 너머로 영토를 늘릴 수 있다. (바로 이 사실이 로마가 쇠퇴한 이유이기도 했다. 세금 부담에 허덕이는 원거리 인구를 통제할 능력 이상으로 제국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알파벳은 이니스가 명확히 밝히기로 고대 중동에서 발전했으며 상업에 밀접히 결부되었고, 이니스가 지적하기로 지식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페니키아인의 기업활동을 보조하는 데 쓰였다. 대조적으로 히브리인 사이에서 알파벳은, 이니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와 말에 - 이미지에 앞서는 - 특권을 부여했고 경전 숭배를 조장했다. 그는 히브리 문학의 풍성함과 일신교의 창조, 신생국가에서 정치조직을 창출하는 데 알파벳이 맡은 역할을 인정했다.


334/ 구디와 와트는 그리스의 문자성(LIteracy)을 대 이집트 교역이 융성해 파피루스 유통이 시작된 경제호황기와 관련지었다. 그들은 그리스 알파벳을 "변형된 셈문자"로 묘사하고 수용연대는 정설과 같은 기원전 8세기말로 측정했으며, 도자기 조각에 사람 이름을 적어 내도록 한 도편추방제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솔론 시대(기원전 539~534)에는 문자성(Literacy)이 광범위하게 존재한 듯하다고 추정했다... 그들은 알파벳의 발전이 그리스 문화에서 "불변의 비인격적 논리" 등 분석적 경향을 창출하는 데 일익을 맡았다는 믿음은 고수했다...


335/ 마셜 매클루언은 알파벳과 성문법, 일신교, 과학, 논리학, 개인주의 간에 어떤 직접적 인과관계가 있다고도 단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론토학파 학자 데릭 드 커코브는 알파벳에 신경학적이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었다고 믿는다. 1980년(매클루언이 사망한 해)에 발표한 <그리스 비극론 A Theory of Greek Tragedy>에서 그는 연극이 발전하면서 글을 쓰지 않는 인구에게도 알파벳 효과가 미쳤다고 제안했다... "기억의 속성이 분명히 바뀌었을 것이다. 소리와 이미지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코드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스 연극은 공간화와 조직화를 통해 "문자성을 실습"하고 "새로운 교육 방식에 적응"할 기회를 제공했다고, 그는 시사했다...


337/ ... 로건은... "부산물"은 추상, 분석, 합리성, 분류 기능 등이었다... 그는 서양과 동양의 사고 패턴이 각자 쓰는 문자만큼이나 양극화되어 있다고 시사하는 놀라운 말도 했다... 중국 과학에서 일어난 혁신은 "추상 과학"이 아니라 단순한 "기술적 진보"라고 묘사했다... 그는... 조지프 니덤을 인용하면서, 그의 문화 조건 분석에는 핵심 요소, 즉 문자에 차이가 있다는 점과 중국 문자가 유연하고 효율적인 분류법을 뒷받침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이 누락되었다고 시사했다.


로건의 연구는 도미닉 유의 체계적인 비판 대상이 되었다. 2003년에 써낸 <로건의 알파벳 효과에 대한 생각들 Thoughts on Logan's The Alphabet Effect>에서... 나아가 로건은 "중국문자에는 추상적 또는 과학적인 사고에 적대적인 무의식적 효과 또는 숨은 효과가 있다"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근대과학은, 유가 지적하기로 분류가 아니라 방법, 관찰, 가설, 검증과 관련된다...


338/ 로건의 주장을 가정 체계적으로 반박한 글은 2004년 폴 그로스윌러가 <알파벳 효과 떨쳐 내기 Dispelling the Alphabet Effect>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이다...


339/ ... 그로스 윌러는 대안으로 "문자 효과"를 제안하면 사회문화 모체 안에서 문자성의 조건을 더 신중히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니스가 종이와 알파벳의 조합이 구술 전통을 "견제"하고 세속적 노동과 행정에 일조했다고 믿었던 점을 지적했다...


340/ 마틴 버널은 당연시되던 그리스 알파벳의 우월성에 대해 가장 강한 비판을 내놓았다. 버널은 그리스 알파벳과 셈 문자의 근본 차이를 주장한 고전학자들의 연구에서 인종적 편견을 감지하고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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