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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정 Mar 08. 2016

문득 일상의 빛이 사라진 순간

잊혔던 나의 우주를 꺼내보다 

문득, 일상의 빛이 사라진 순간

나의 '기억의 창고'를 열어보다

차곡차곡 모아 온 '기억의 창고'를 모두 열었다(1991~현재)


나만의 '기억의 창고'를 만들어보자. 공간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 내 두 손으로 들 수 있을 만할 크지 않으면서도, 튼튼해서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상자 하나면 충분하다. 그 속엔 여행에서 만났던 특별한 순간을 기억할 수 있는 소지품과 기록,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보물 같던 수집품. 특별하고 예쁘진 않아도 내겐 그 추억만으로 충분히 빛날 물건들로 차곡차곡 그곳에 모으는 것이다. 문득, 일상의 빛이 사라진 순간. 늦은 밤 나만을 위한 핀 조명을 켜고 창고를 홀로 열어본다. 나는 일상 속에 잊혔던 나의 우주를 만나는 기쁨과 만날 수 있다.



삶을 산책하듯 시작된 '잘란잘란

jalan buntu [잘란 분뚜] 는  '막다른 길'이라는 인니어.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길은 어느 순간 멈춰, 나를 돌아보게 한다(2015, UBUD)


'잘란'은 길(street), '잘란잘란'은 슬렁슬렁, 걸어 다니다, 산책하다, 여행하다는 의미로 두루두루 사용되는 인도네시아어이다. '잘란잘란'은 지난여름 우붓에서 한 달간 거주하며 내가 발리에서 가장 애정 하던 것 중에 하나이다. 아침 길을 나서는 내게 '오늘은 계획이 어떻게 되니?, 어디에 갈 예정이니?'를 친근하게 물어봐주던 발리니스(Balinese)들에게 그저 '잘란잘란'이라고 대답하면 모든 뜻이 통했던 한 마디. 발리에 거리는 온통 '잘란'으로 채워져 있다. 그곳에서의 나의 일상은 그저, 그 길과 길을 거닐면  '어떤' 목적을 위해서가 아닌 단지 그 시간만으로도 오롯이 충만했던 순간이었다.



일상 속에 잊혔던 나의 우주를 만나는 곳

익숙한 풍경 속에 느닷없는 우연이 찾아오기도 한다.


유난히 아빠를 잘 따르던 둘째는 여름방학이면, 아빠가 구축해놓은 그의 '작은 세계'로 입성하여 짧게는 열흘에서, 한 달 간을 함께 캠핑을 했다. 이전에는 낙동강 상류에 강변 마을이었던 그곳은 어느 날 인근 댐의 건설로 수몰이 되어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강 한가운데, 오롯한 '섬'이 되었다. 차를 타고, 다시 배를 갈아타고야 입도할 수 있었던 그곳에 아빠는 텐트로 자신의 최소한의 공간을 만들고, 시를 읆었고 노래를 부르며, 때로는 강 위에 낚싯대를 드리우던 그 작은 세계로 그의 둘째를 기꺼이 초대했다.


섬이 된 강변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낚고자 했던 그에게 둘째는 미끼로 쓰일 지렁이를 기꺼이 맨 손으로 생포하며 그와 공생하는 법을 배웠다. 그 여름, 아홉 살이었던 둘째는 채 10대가 되기도 전 여행지에서의 최소한의 생존법을, 어쩌면 삶의 아주 단순한 '비밀'을 알아챘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캠핑족'이 출연하기 전, 이른 캠핑족 세대로 외롭게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갔던 아빠와 공생했던 둘째는 길 위에서 자신의 '작은 세계'를 만들어가는 '잘란잘란'이 되었다.



여행이 집이 되었다


여정 중 '자기만의 방'을 만들고, 차곡차곡 그 기억을 엮어 '자신만의 집'을 짓고 있다. 20대 중반부터 홀로 시작된 여정은 20여 개국을 경유하며 세계 70여 개의 도시를 여행, 아주 천천히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게 기억의 창고 속에 그 기록을 담아가고 있다. 나의 첫 여정에 동행해 준 나의 아빠는 그 시절에 강의 상류,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래강이 보이는 언덕에서 여전히 무엇인가를 낚으며 그의 딸인, 둘째의 여정을 응원해주고 있다.

 


삶을 산책하듯, 오롯이 지금을 위해, '내가' 되어가는 즐거움



“그대의 눈을 안으로 돌려 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속에 여태껏 발견 못하던 천 (千) 개의 지역을 찾아내리라. 그곳을 답사하라, 그리고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학의 전문가가 돼라” _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산문집 『윌든』 맺은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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