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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정 Mar 23. 2016

발에게 묻다
길에게 묻다

 (1) 내가 사랑한 도시, 내가 사랑한 순간


여행을 가면 나는 보통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걷고 걸으면서 목적지를 발견하기도. 걷는 이유를 찾기도 했다. 어느 순간, 이유도 모른 채 혹사를 당하고 있을 내 두 발이 보였다. 발에게, 네가 이끄는 대로. 너의 보폭에 맞춰 나도 걷고 있는 거라고 위로를 건넸지만, 내 변명이 신통치 않았는지 어떤 날에는 물집이 잡히고. 못난 흉이 오래 남기도 했다. 내 목적 없는 여정에, 정처 없는 순간을 함께 해준 발에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을 양보하기로 했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프레임 한 귀퉁이에 발을 함께 담았다. 덕분에 발은 책을 읽기도. 눈부신 지중해를 비행을 하기도. 멋진 순간들을 가장 먼저 발견하기도 했다. 


"이제 나는 발에게 물어본다. 발이 기억하는 순간들, 네가 사랑하는 길 위의 순간들이 언제였는지."


발에게 묻다 길에게 묻다 
1. 내가 사랑한 도시, 내가 사랑한 순간 
2. 그리운 도시, 다시 만나고 싶은 순간


독서하는 발  갠지스강 버닝(burning)가트인 마니카르니카(manikarnika ghat)로 이어지는 골목에 위치한 한 여행자의 카페. 바라나시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버닝가트를 찾았고. 이 곳을 함께 찾았다. 여행지에서 종종 한국어로 쓰인 책을 발견할 때가 있다. 여행자의 배낭에서 책은 절실하다가도 때로 가장 짐이 되기도 한다. 여정의 대부분 단 한 권의 책으로 버티는 경우가 많은데. 우연히 발견한 모국어의 책은 그야말로 희열, 그 자체가 된다. 페이지 마디마디마다 시간이 켜켜이 새겨져 있는 표지도 없는 책. 이 책은 애초에 어떻게 만들어져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골목에서는 하루에도 수 차례, 화장터로 향하는 시신을 보게 된다. 여행자는 그곳에서 그들의 마지막을, 뜨거운 순간을 묵독하게 된다. 나는 매일 이 곳을 찾아 책이 지나왔을 여정들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고, 희미하게나마 그들의 삶을 읽었다. varanasi, INDIA




발견하는 발  더운 나라의 낮은 멀고 고요하다. 해가 지고, 하나 둘 모인 사람들로 마을은 긴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기 시작한다. 태국 북부, 고불고불한 고개를 넘어 도착한 빠이는 '예술인들의 마을'이라 불리는 배낭여행자의 오래된 안식처이다. 낮 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아티스트들은 자신이 그린 그림과 손수 만든 작품들에 불을 밝히고, 밴드들의 흥겨운 연주로 길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여행자들은 분주하리만치 넘치는 낭만에 흠뻑 빠져, 노래를 쫓아 밤새 뮤직바를 투어 하기도.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물들과 친구가 되기도 한다. 강가 마을인 빠이에 새벽안개가 서서히 스며들 때쯤, 사람들은 낮에 '그곳'으로 다시 숨어들고 마을은 이내 잠들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 고요함을 벗 삼아 혼자 하는 산책은 지난밤만큼 낭만적이다. 이 거리를 가득 채웠을 사람들의 순간을 발견하고, 흔적들을 흥얼거리며 아침의 마을은 온통 내 차지가 된다. pai, THAILAND. 




때를 기다리는 발  '신은 모리셔스를 창조하고, 그것을 본떠 천국을 만들었다.' 백 년 전 이곳을 찾은 작가 마크 트웨인은 섬을 만난 경이로운 순간을 한 마디의 찬사로 남겼다. 섬의 80%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세계에서 가장 달콤한(?) 나라가 된 섬은 애초에 원주민이 살지 않던 무인도였다. 대항해 시대,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오가는 항로에서 우연히 발견된 섬에는 어떤 천적도 없어 날 필요조차 없었던 도도(dodo) 새가 살던 새들의 천국이었다. 이주를 시작한 사람들, 이들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던 섬의 원주민이었던(수백 년을 이곳을 살아왔을) 도도새는 백 년 만에 섬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멸종되었다. 이 섬이 그때 발견되지 않았다면 마크 트웨인도, 나 또한 지금 이 아름다운 인도양의 섬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여행은 때로 지독한 독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움은 발견되지만, 발견은 때로 아름다움을 위협한다. 여행자는 그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trou aux biches, MAURITIUS. 




살아있는 발  아메드의 모래는 검다. 아메드의 둥근 해안선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궁산(Gunung Agung, 3142m)은 발리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어머니와 같은 산이다. 여전히 활동 중인 화산 위로, 하루에도 수 차례 봉우리를 중심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구름의 모습이 다채롭고. 뜨거운 빛을 내뿜으며 산 너머로 사라지는 일몰은 매일 봐도 새로울 만큼 인상적이다. '아무것도 없는 바닷가'라고 적힌 가이드북의 소개 문구가 되려 호기심을 자극해 찾은 발리 동쪽 끝에 위치한 어촌마을. 해변은 검은 모래로 가득했고, 불과 50년 전에도 대형 폭발로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는 산은 여행자를 고요하게 맞아주었다. 자박자박 잠기는 발 끝에 희미하게 느껴지는 온기만이 아궁산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amed, B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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