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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정 Mar 30. 2016

여행노트로 떠나는 <여행>

목적지_ 인도 여행노트 (2008)

여행노트의 조건 


노트를 펼쳐 양쪽 어느 면에 써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내구성과 종이는 어떤 볼펜도 곧잘 소화해서 잘 묻어나지도 않는 질감이라면 일단 만족. 포켓 사이즈로 한 손에 쉬이 잡히고, 겉면은 때가 잘 묻지 않는 어두운 색. 매끄러운 하드커버의 노트를 든든하게 여밀 수 있는 고무줄이나 끈이 있다면 좋겠다. 마지막 페이지엔 약간의 시크릿 한 무엇인가를 넣을 수 있는 페이퍼 주머니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기록하는 여행

여행자는 길을 따라 기록하는 일을 좋아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 만물이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은 아름다운 경험이다. 아름다운 경험들은 대부분 생명의 가장 깊고 신비로운 감동과 연관되어 있다. 비록 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섬광처럼 단 한 순간의 접촉이지만, 섬광은 환하게 빛나고 여행자의 눈 앞에 펼쳐진 세계는 일순간 또렷해진다. 여행자의 시선은 뚜렷하기 때문에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먼 곳을 볼 수 있을 것이다. _후칭팡, 이점숙 역 『여행자』 북노마드, 5장 <알려줄 수 없는 여행> 중



여행노트로 떠나는 여행

장소를 떠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여행이 있다(2018, 인도 여행노트). 


자신이 기록한 여행노트로 떠나는 여행, 자기로부터의 여행이다. 무임승차로 떠나는 여행인 것 같아 어쩐지 조금 머쓱하지만. 노트 속 기록으로 남아 있는 순간을 통해, 나는 그 익숙하면서 낯선 곳으로. 나를 통한 여행을 떠난다. 가볍게는 그 날의 사소한 관찰부터. 무엇을 먹고, 얼마나 나는 비루한 예산을 맞추고자 이 무거운 배낭을 들쳐 매고 악착같이 움직였는지. 젊은 배낭여행자들에겐 그런 것들이 자부심과 같은 것이었지. 우아한 여행 따윈 애초에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하루에도 수차례 현지인들과 흥정하고 얼큰하게 싸우고. no, problem! 또 금세 같이 웃고 말곤 했던 일상 같던 시간들. 나의 첫 배낭 여행지는 인도이다. 그때의 20대 배낭여행자들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유럽파와, 인도로 왔다 다시 인도로 가는 여행자. 첫 행선지에 따라 어렴풋이 우리는 그 여행자를 추측하곤 했던 시기였다. 쪽지 같은 작은 수첩부터, 아직도 여전한 다이어리까지 온갖 기록들이 당시의 순간으로 멈춰있다. 남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보는 듯 사늘한 어색함이 등 뒤를 잠시 훑기도. 여행 노트 속에 순간들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그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다만 호기심 많고 변덕스러운. 겁 많고 겁이 없는, 어쭙잖기까지 한 낯선 여행자가 그 속을 마구 헤집고 다닌다. '내가' 낯설다.



자기로부터의 여행_ 인도 여행노트(2008)

*당시 여행 노트를 가감 없이 옮긴다. 


1. 자이살메르(Jaisalmer) 2008. 2.20~2.23 

(사진) 리틀 티베트의 루프탑처음 맛본 티베트 음식인 뚝바는 한국의 칼국수처럼 친근 하니, 그 맛도 칼칼해 입맛에 꼭 맞는다아마이때 결심 했는지도 모른다인도 속의 티베트맥그로드 간즈로 가자그래 뚝바 먹으러 가자(2008, Jaisalmer)


이 곳은 내가 상상한 것보다 덜 황량하고, 메마르기만 하진 않았다. 마른 모래바람이 불어오고, 따가운 햇살이 눈부셨지만. 한국에서의 지난 팔월 여름과 비슷한 정도라 다행이다. 선풍기 없이도 곧잘 자는 걸 보면 이곳에 되려 적응이 되었나 보다. 혼자 여행을 연습하기 위해, 이튿날은 일행 없이 홀로 길을 나서 보았고 조그마한 이 도시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어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기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다. 이제 내가 가야 할 곳들은 이곳보다 훨씬 큰 도시들인데. 순간 자신이 없어지기도 했다(아직 갈길이 너무 멀다). 하지만 우연히 찾은 'Little Tibet', 이름처럼 아담한 식당이었던 루프탑에서, 시원한 세븐업과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로 모든 걱정을 잠시나마 날릴 만큼 개운해졌다. 이 시간을 좀 더 호사를 누려볼까 해서, 김광석의 노래를 들었고 친구 둘에게 엽서를 썼다. 간간이 불어오는 마른 바람은 이제 설렘이 되었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이런 작은 기쁨들이 앞으로의 내 여행도 채워주겠지, 생각을 하며 기분이 좋아지기도. 그래서 더더욱 한국으로 돌아가서의 삶들이 고민이 되기도 했다. 마지막 날 떠난 사막에서의 하룻밤은 일몰도, 쏟아지는 별도 볼 수 없었지만. 그 모든 것을 가린 구름이 너무 밉지 않다 다행이다. 다음 여행지로 떠나는, 부디 오늘 밤도 무사하길 바란다.

(사진) 사막에서의 식사는 모래로 시작해서 모래로 마무리된다. 모래의 지지로 세워진 간이 화덕에서 막 구워낸 짜빠띠를 손대중으로 자박하게 끓어낸 커리에 듬뿍 찍어 먹으면 그 순간은 어떤 만찬도 부럽지 않다. 함께 씹히는 모래바람은 덤이요, 물이 귀한 사막에서 다 먹은 그릇은 다시 고운 모래를 이용해 몇 차례 털어내면 그런대로 설거지도 마무리된다. (2008, Jaisalmer)    

(사진) 사막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마을엔 고된 이동으로 지쳤을 낙타가 목을 축이는 웅덩이가 반겨주고, 가축들에게 귀한 물을 먹이는 여인네들 사이에서 언제 다가왔는지. 사막의 태양같은 말간 미소를 지닌 아이들이 이방인에게 호기심 어린 인사를 건넨다. (2008, Jaisalmer)        



2.  우다이푸르(Udaipur) 2008. 2.24~2.26

(사진) 오래된 저택 안뜰에서 매일 밤 열리는 공연은 인도 특유의 화려한 색감과 전통 물항아리를 머리에 올린 무용수가 점차 그 수를 늘려 감에 따라 절정에 이른다. 마지막엔 모두 열 개의 항아리를 올린 무용수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가득 채워진 발판 위를 즈려밟으며 공연은 마무리된다. 살을 벨 듯 뜨거운 사막의 모래를 맨발로 수도 없이 오고 가며, 물을 길러 왔을 여인들의 행렬이 그 긴 밤을 지나가는 듯 했다.  (2008, Udaipur)


깜깜한 새벽에야 도착한 세 번째 도시. 숙소가 밀집해 있는 강가우르 가트로 이동했으나 풀북의 숙소들. 끊어질 듯 버거운 배낭을 주워 메고 방황 끝에 결국 릭샤왈라가 데려다준 호텔 강가우르팰리스로 입성(물론 이름만 호텔). 303호 체크인. 나름 화려한 문양의 room. 화장실과 샤워실이 나눠져 있는 구조. 만족한다. 우다이푸르의 상징인 '레이크팰리스', 바짝 말라버린 호수 가운데 간신히 그 위엄을 지탱하고 있는 어느 왕국의 여름 궁전. 낯선 여행지에서의 첫 번째 미션인 우체국 찾기로 시작된 하루는 뜨거운 오후를 보냈다. 현지인들의 추천(길을 묻는 이방인을 선뚯 자신의 오토바이로 데려다준 붉은색 사리를 입은 아줌마의 뒷좌석은 너무 시원했다)으로 우연히 도착한 어느 박물관에서 얼결에 인형극을 관람했고. 다소 볼품없는 소박한 전시회 풍경에 친근한 웃음이 나기도 했다. 우다이푸르에서 마지막 오후를 보냈던 루프탑에서는 하루를 모조리 얻은 것처럼 평온했고, 시원한 옥상에서 먹었던 킹피셔 맥주와 야경도 좋았다. 저물어가는 일몰을 보면서 '조금은 더 잘 살아보고 싶다'라는 희망 같은 다짐을 했고, 이곳으로 이동을 함께했던 여행자들과 아쉬운 작별도 나눴다. 어디를 가든 그 속에서 즐거움이 있었고, 현재를 만끽할 수 있는 여유를 선택할 수 있었다. 말라버린 호수와 같이 언제고 오늘의 내 감정도 메마르지 않기를. 저 호수도 다시 예전의 영광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사진) '킹피셔 스트롱'  종교적인 영향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인도에선 맥주의 가격이 상당히 스트롱하다  가격이 가난한 배낭여행자의 하루 세끼 식사보다 비싸다식사 한끼를 줄이고 저녁에는 밥을 대신해 1일 1맥주를 선택하는 합리적인 소비를 했다. (2008, Udaipur)



3. 아그라(Agra) 2008. 3.1~3.2

(사진) 아그라를 찾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목적지인 타지마할, 그 아름다운 자태에 자신의 얼굴을 함께 담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그 모든 사람들이라. 타지마할이 정면으로 보이는 분수대 앞 벤치에서는 아! 13억 인구의 나라였지, 느닷없는 깨닫음을 얻을지도 모른다. 이때 좌측으로 약간의 시선을 돌리며 그곳 못지않는 배경에 기념사진을 줄을 서지 않고도 얻을 수도 있다. (2008, Tajmahal-Agra)



아그라의 공포. '아그라에선 하루도 길어. 타지마할만 보고 빠져야 해. 아무것도 먹어선 안돼. 얼마 전에도 그거 먹고 병원에 실려가 엄청난 치료비를 낸 여행자도 있대. 심지어 식당과 병원, 경찰이 한 편 이래'  도시를 방문하기 전 이미 너무 많은 경고들로, 도착도 하기 전에 불쾌한 장소가 되어버린 곳.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건축물로 꼽히는 타지마할, 순백의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악명 높은, 가장 끔찍한 도시로 말해지는 그곳에. 결코 친절하지 않았던 조드푸르 게스트하우스 사장이 겨우 구했다는 기차를 타고 이튿날 아침, 아그라에 도착했다. 가이드북에 마저 반복되어지는 경고들을 모두 믿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백만 분의 일에 해당하는 확률에도 본인의 일인 것처럼 쉽게 공감하는 분위기이다. 나 또한 학습된 공포에 따라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최대한 방어적이었고, 잔뜩 인상을 구기고 호객하는 사람들의 농담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 덕인지 말을 거는 사람들도 차츰 줄었고. 다른 곳에서처럼 귀찮은 일도 없었다. 화난 사람처럼 가격을 물었고,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흥정을 했다. 이것이 나의 최소한의 방어법이라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내가 비겁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이 '아그라의 공포' 또한 비겁한 나와 같은 사람의 허술한 방어법으로 지금처럼 더 견고해진 건 아닐까,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값비싼 값을 치르고 드디어 만난 타지마할은 상상 이상으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엽서를 보내고, 또 그 덕에 잠시 사람들을 그리워도 했다. 예정대로 나는 그렇게 스치 듯 타지마할을 떠났고, 아그라에서는어쩐지 아직 떠나지 못한 것만 같다.  

여행에서도 일상에서도 결국 발견이 필요한 것은 나, 라는 자신이었다. 자기로부터의 여행, 나는 그 익숙하면서 그 낯선 곳으로, 나를 통한 여정을 계속한다. (2008-2018)



목적지_ 인도 여행노트(2008) 


20대 중반, 나의 첫 배낭여행지였던 인도. 지금도 나는 여행에서 기준이 '그때의' 인도이다. 인도로 시작한 배낭여행은 지금도 참 잘한 선택이라 생각이 든다. 이후 모든 여행지에서 나는 인도에서의 그때를 기억하며, 필요 이상으로 깨끗한 숙소와 저렴하면서도 맛까지 있는 음식에 감사, 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 깜깜한 새벽에서야 도착한 델리의 빠하르간지. 아침에서야 길과 사람이 뒤엉킨, 사정없이 행인을 가르고 지나가는 오토릭샤와 맨발의 릭샤왈라들. 그리고 소.소.소.소, 또 소들. 그때서야 이곳에 진면목을 목격하고서 숙소 밖으로 한 걸음도 내 딛지 못했던 카오스의 순간. 침대가 탄생한 이래, 단 한번도 세탁은 커녕 먼지도 털어내지 않았을 그곳에 간신히 누울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던 숙소와 그리고 커리. 커리.커리. 또 커리들. 인도는 단 한 순간도 나를 멈출수 없게 만들었고, 나는 계속 걷거나 또 끝없는 흥정을 하면서 순간 순간을 끓임없이 여행했다. 인생에 가장 치열했던 순간으로 기억될 그때, 가끔은 그래서 지금 하는 여행들이 과분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때의 인도'로 나는 다시 여행할 수 있을까. 인도가 문득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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