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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양정 Jan 12. 2019

봄   기차로 떠나, 봄

바닷마을을 여행하는 <에노덴 다이어리>


기차로 떠나 봄, 에노덴(江ノ電, えのでん)


마을 입구엔 기차가 댕댕댕, 지나던 건널목이 있었다. 그 마을 끝엔 금빛 모래강변이 반짝이며 흐르고, 그 길을 이어주던 양 갈래의 벚나무 길에는 새까만 버찌 열매가 툭툭, 떨어지며 회색 보도블록을 물들이던 어느 이른 계절이었다. 꺄르륵, 아빠 무등을 타고 손 끝이 까매지도록 열매를 따 먹던 소녀가 집으로 향하는 길 왼편으로는 곧잘 기차가 지나갔다. 작은 창문 속, 눈을 맞추고 손 인사를 하며 빠르게 지나가던 그 얼굴들이, 느리게 흘러가던 그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것은 댕댕댕, 기차가 오고 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기차여행은 여전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목적지를 향하는 창 밖은 낯선 간이역을 지나며 오래된 풍경을 정겹게 담아내고, 이따금 덜컹이는 기차와 함께 여행자의 마음마저 설렌다. 1902년 운행을 시작한 전차 에노덴은 매일 아침 후지사와 역을 출발하여 묵묵히 자신에게 놓인 철길 10km를 내달리며 모두 열다섯 개의 작은 역을 여행한다. 기찻길 양쪽으로 바짝 늘어선 집들 사이를 아슬하게 빠져나가기도, 쇼난 해안을 한편에 두고 수평으로 나란히 달리며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만끽하기도 한다. 이따금 작은 건널목에 정차해 댕.댕.댕, 소리를 들으며 그 오랜 여행을 한숨, 쉬어가기도 한다.



봄이 왔는가,


후지사와 역에서 출발하는 초록색 전차 에노덴을 타고 34분 남짓 걸리는 종점엔 오래된 도시, 가마쿠라를 만날 수 있다. 도쿄에서 불과 약 50Km 떨어져 있는 이곳엔 흔한 고층빌딩도, 밤새 도시를 밝히던 가라오케 네온사인의 흔적도 없다. 천년 전, 한 시절 일본 열도를 호령했던 무사의 도시는 간간히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그 오래된 영광을 기억하고 있을까. 고대도시를 담담히 지켜온 바다마을은 아주 보통의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첫 번째 정차할 역은,

(EN15) 가마쿠라 역

가마쿠라를 찾는 여행자들로 늘 북적이는 코마치도리 거리에는 봄꽃을 닮은 기모노를 입은 소녀들이 이른 봄 마중을 나섰다.

(사진) 카마쿠라의 대표적인 명소인 쓰루가오카하치만궁 신사는 1191년 가마쿠라 막부를 탄생시킨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세워졌다. 간토(関東) 지방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국가의 수호신이자 무예의 신인 하치만을 기리는 신사로, 본궁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깊은 장소이다. 신사를 찾는 사람들은 참배에 앞서 손을 씻음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하며 예를 다한다.

참배객들의 소원을 담은 패들을 신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각 신사마다 그 특징을 살려 만든 소원 패들은 그 모양도 다양하여 서로 비교해서 찾아보는 즐거움이 있다.

(사진) 신사 경내를 향하는 제단에서 치러지는 일본 전통 혼례식은 제사장의 주도하에 진행되며, 보통 가까운 가족들만이 참여하여 경건하게 진행된다. 이따금 신녀들이 춤을 추며 전통악기들이 함께 연주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역은,

(EN12) 하세 역

(사진) 하세데라 절은 가마쿠라 시대 이전인 736년에 세워진 오래된 절이다. 절은 잘 가꾸어진 정원을 연상시키는데, 연못을 중심으로 거닐 수 있도록 만들어져 호젓하게 둘러볼 수 있다. 계절별로 저마다 꽃을 피운다는 정원엔 홍매화가 흐드러지게 여행자를 반겨주었다. 연못에서 가만히 내려앉은 봄을 만날 수 있었다.

(사진) 가마쿠라 대불의 그 압도적인 불상의 규모를 보고 난 여행자에게 더욱 친근하게 느껴질 작은 부처상이 모여있는 하세데라 절. 특히 일본 전통 신앙에 등장하는 칠복신 중 유일한 여신인 ‘벤자이텐(弁才天, べんざいてん)’을 만날 수 있다. 비파를 안고 있는 것이 특징인 벤자이텐은 지혜, 예능, 음악, 학문의 신으로 여겨지며, 경내에 위치한 작은 동굴에서는 신에게 참배하는 현지인들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절에는 가마쿠라의 바다와 마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와, 인자한 미소로 나란히 합장을 하고 있는 작은 불상 또한 만날 수 있다. 세 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불상은 절 내 세 군데 있다고 하는데, 이를 모두 찾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깃든다고 한다.

(사진) 하세역에서 주요 명소로 향하는 하세도리 거리는 그 자체로 걷는 즐거움이 있다. 오래된 정취가 잘 보전되어 있는 거리에는 일본 고유의 섬세하게 잘 만들어진 기념품 가게와 다양한 주전부리가 여행자를 반기며, 그 고즈넉한 풍경으로 안내해준다.


 

봄 구석구석 찾아,


에노덴이 지나는 가마쿠라-에노시마 지역은 많은 사람들이 추억의 만화로 손꼽는 <슬램덩크>와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진 동명의 원작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배경지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만화 속 장면들은 대부분 실제 장소를 모델로 하고 있어,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선물한다. 에노덴에서 내려 어느 역에서든 마냥 걷기 시작하면 빛바랜 사진첩에 한 귀퉁이 속을 걷는 듯한 마을의 풍경을 만나고, 골목길 끝에서 느닷없이 노란 노을이 내려앉은 해변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 운치 있는 풍경을 직접 걷고 있노라면 이곳이 어떤 연유로 수많은 작품의 무대와 소재가 될 수 있었는지 납득이 된다. 그 자체의 풍경을 그대로 옮겼을 뿐인데, 그것이 그림이 되고. 잔잔하게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가 되었다. 백 년 가까운 시간을 쉬지 않고 달린 전차 에노덴과 그 모든 봄들과 계절들을 함께 지나온 간이역은 여전히 아주 보통의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평범해서 낯선, 그 오래된 봄들을 마을 구석구석에서 만날 수 있었다.



세 번째 역은,

EN11 코쿠라쿠지 역

사진 출처ㅣ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한 장면

(사진) 오래된 목조 역사가 운치 있는 코쿠라쿠지 역은 역에서 마을이 한눈에 잡힐 듯한  아주 작은 마을이다. 역 바로 앞에는 ‘고쿠라 쿠지’라는 작은 사찰이 있는데,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극 중 자매들의 할머니 제를 지냈던 곳으로 나온다. 고즈넉한 절에는 초여름이면 수국이 만발한다고 한다. 절로 가는 초입에는 극 중 막내 ‘스즈’가 비를 피하던 붉은색 지붕의 처마 집을 만날 수 있다.   


 

네 번째 역은,

EN08 가마쿠라코코마에 역

사진 출처ㅣ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의 한 장면

(사진)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철길 건널목으로도 유명한 곳으로 만화팬들에게는 성지순례 장소로 불리는 곳이다. 에노덴 구간 중 철길과 바다가 가장 가까이 닿은 역으로, 잠시 내려 펼쳐지는 수평선과 그 끝에 보이는 에노시마 섬을 볼 수 있다.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에 맞춰 간다면 더없이 예쁜 풍경을 담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정차할 역은,

EN10 이나무라가사키 역

(사진) 가마쿠라에 왔다면 꼭 먹어봐야 할 음식이 있다. ‘시라스동’ 이라고 불리는 멸치 덮밥이다. 이 지역에서 많이 잡히는 시라스는 잔멸치, 뱅어 등을 통틀어 부르는데, 특히 봄에는 제철을 맞은 살아있는 시라스를 올린 덮밥을 먹을 수 있다. 가마쿠라 어디서든 쉽게 시라스동을 발견할 수 있지만, 이나무라가사키역에 위치한 한 식당에서는 기찻길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있어 특별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시라스동은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 ‘스즈’처럼 그릇째 얼굴을 파묻고 마시듯이 후루룩 먹는 것이 비결이다. 가마쿠라 여행은 담백한 시라스동 같은 봄을 만날 수 있다.    








<에노덴 다이어리> tip _에노덴 즐기기


# 에노덴 역 스탬프 모으기

에노덴 주요 9군데 역에는 스탬프가 비치되어있다. 각 역에 특징을 잘 표현한 스탬프를 모으는 것은 에노덴 여행의 소소한 재미를 더해준다.

# 바다 뷰 포인트 찾기

골목길을 걷다 보면 그 길 끝에 푸른 바다가 반짝이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가마쿠라코코마에 역과 이나무라가사키 역은 특히 바다 뷰 포인트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 보물 같은 장소 찾기

(사진) 역과 역 사이 마을 길을 걷다 보면 서핑으로 유명한 바다 마을답게 서퍼들을 위한 카페와 이색적인 숙소들을 만날 수 있다. 교료 신사에서 바닷가 쪽으로 걸어 나오면 무려 300년이 넘은 노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곳은 ‘치카라모치야’라는 만주 집이다. 우스꽝스러운 모양의 만주로 유명한 곳으로 가마쿠라 가면축제의 날에는 가면 모양을 한 만주를 파는 숨은 지역 명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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