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 폭싹 속았수다

[#28] 철물점TV X 공구로운생활의 월간 콘텐츠

Mar 19. 2025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는 중이다.

아이유, 박보검이 있는 포스터만 봐서는 50년 전 배경의 뻔한 로맨스 드라마?라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다. 오애순(배우 아이유 -> 문소리) 이라는 한 제주도 여자에서 시작된 가족들의 이야기인데 역시나 때가 되면 성공 하나씩 터뜨린다는 넷플릭스답다 생각했다. 점심과 함께 '뭐 볼 거 없으려나? '그 드라마 요새 인기라던데? '라고 켰던 이 시리즈가 많은 사람의 눈물을 훔칠 줄 누가 알았을까? 몰입하다가 슬쩍 옆을 보니 와이프도 눈물을 조금씩 흘리고 있더라.

(극중 애순과 관식은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다. 출처: 헤럴드 미디어)

이 드라마의 제목(?)처럼 이 안의 인물들을 끊임없이 살기 위해 움직인다.

우리가 놀러가는 관광지의 제주도 모습보다는 제주도 현지만의 독특한 애환이 묻어난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시작한 해녀 활동 그러면서 부처, 예수보다 더욱 믿게 된 용왕님 그리고 육지로 진출하고 싶은 꿈 등 다른 세대의, 지역의 우리가 다르게 느낄 배경이 많다.

이 드라마를 연출한 감독의 대표작이 <미생>, <나의 아저씨>인데 전작의 특징들이 살짝 묻어나 있는 것도 재미 포인트다. 특정 지역, 조직 내의 치열함(미생)과 인물들의 처절하고도 민감한 사정(나의 아저씨)들을 시간의 흐름대로 자연스럽게 어루만져 주는데 그야말로 눈물 도둑이 따로 없다.

(감독의 전작에 나오는 배우드리 많이 나온다.)

나를 더불어 한국 남성들은 아마 양관식(배우 박보검 -> 박해준)에 감정 이입이 많이 되었을 것 같다.

'무쇠'라는 별명으로 어릴 적부터 애순이 옆에 붙어있었고,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나쁜 선장에게 호되게 해코지 당해도, 그물을 잡다 손을 다쳐도 괜찮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다음 날 또 일을 나간다.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업이 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자식을 위한 그 마음은 100% 이상 와 닿는게 참으로 신기했다.

(극중 양관식은 가족만을 생각하는 아빠이다.)

아버지의 마음이란 원래 이런 걸까?

결혼하기 전에는 누구보다도 큰 꿈을 가지고 있다가, 결혼을 하고는 배우자와 평생의 행복을 위해 30% 정도 꿈을 놓고, 자식들이 하나 둘 태어나면 80..90% 꿈을 놓게 된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면 현실과 꿈을 타협, 뭐든지 잘할 수 있다는 열정은 닥친 현실 앞에서는 매섭게 얼어 붙는다. 누군가는 이해못할 수도 있다. 모험보다는 안정을 택하고, 작은 돈에도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소극적이라며 비웃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도 단단하다.

움직이지 않는데 쉽사리 꺾이지도 않는다. 격변하는 사회에서도 굳건하게 일상을 지키며 지금까지 버텨왔다. 우리 아버지가 그랬었고, 나도 지금 그러는 것 같다. 예전처럼 맞서 싸우고 그만두고 싶지만 자식을 보면 부은 편도선으로 침을 삼키듯이 힘든 하루를 넘긴다.

(물론 어머니의 사랑도 못지 않게 나온다.)

지금 다른 의미로 더 살기 힘들지 모르겠다.

예전처럼 극심한 가난도, 차별도, 전쟁도 없어졌다. 굶어 죽는 게 진짜로 굶주리는 게 아니다. 모두가 기본적인 의식주를 보장받는 디폴트에서, 누구나 들여다보는 정보의 흐름 속에서 미세한 차이로 삶의 질이 판가름 난다. 나라는 혼란스럽고, 아무도 쉽사리 미래를 예견하지 못한다. 우리의 지갑은 얇아지고, 나이는 빠르게 들어간다. 이 혼란 속에서 우리가 하는 방법은 요리조리 돌고 돌아 결국에는 양관식의 태도이다. 무쇠처럼 뚝심 있게, 자식을 위해 일상을 단단히 살아가는 아버지들의 인생처럼 말이다.

우리 사무실에 택배를 가져다 주시는 나이 드신 기사님이 있다.

항상 담배 냄새, 땀 냄새와 함께 '택배~'하고 외치는데 가끔은 신경을 건드는 투박함이 있어 평소 좋게 보이진 않았다. 어느 날, 택배 반송장을 뽑아달라며 수신인 주소를 보여주려고 그가 스마트폰을 켰는데 배경화면에 20대의 풋풋한 남매가 브이하고 웃고 있었다. 갑자기 뭔가 죄송스러움이 몰려오며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도 역시나 자식을 위해 몸을 바치는 아버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