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준
#9. 삼촌전성시대
삼촌을 설득한 건 구였다. 좋아진 건지 나빠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삼촌이 우리와 평등한 관계를 맺고 싶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사업은 함께하되, 공간이나 돈은 제공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게 대체 뭐가 평등해?
- 어쨌든 제 사업 구상이 좋았다는 거 아니에요?
- 아닌데? 난 공간 필요 없는 사업할 건데? CEO나 건물주처럼 돈 있는 사람만 상대할 거야. 푼돈 모아서 땅 사는 건 이제 힘들어서 못하겠고.
- 그래서 뭘 하실 건데요?
- 일단 얘기를 많이 해보자. 어느 순간 빵 터지는 순간이 있을 거야.
나이가 몇 갠데 말 좀… 이라고 스무 살이나 많은 삼촌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어린 목소리로 말하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철없는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지만 삼촌마저 술을 마시자고 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조카 친구들과. 아니 조카보다도 어린애들과….
좋은 건 밥값, 술값이 굳었다는 거였다. 멤버들도 별다른 불만은 없는 것 같았다. 삼촌은 의외로 인기가 좋았다. 밤비는 잽싸게 ‘아빠’라는 호칭을 입에 붙였다. 현지는 영 애매한 모양이었는데, ‘오빠’는 오버 같고, ‘~~씨’는 건방진 것 같고, ‘대표님’은 본인 스타일 아니라는 거겠지. 그렇다고 나나 밤비처럼 ‘삼촌’이나 ‘아빠’ 먹기도 싫어? 아저씨라서 불편하다는 거야, 아니면 아저씨지만 괜찮다는 거야?
어느 쪽이건 삼촌은 현지의 어설프지만 꽤 높은 기준을 통과한 거였다. 불편한 아저씨인데도 참는 거라면 괜찮다는 것이요, 괜찮은 아저씨인데도 까불지 않는 거라면 더 괜찮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깐, 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일러두자면, 어설프지만 꽤 높은 기준은 빈틈없이 높은 기준보다 훨씬 까다로운 거였다. 이를테면 데일리 카로도 쓸 수 있는 슈퍼카가 어렵겠는가, 난 남자들이 얘기하는 스펙 따위 좆도 모르겠고 그냥 크고 승차감 좋고 유지비 적게 들면 돼, 가 어렵겠는가.
차라리 돈 많은 남자 구하기가 쉽지.
남들만큼 벌고 시간 많은 남자거나, 살짝 지적이면서 잔근육 발달한 남자가 세상에 쉬워? 그래놓고서는, 내가 부자를 바란대, 그냥 평균치에 메리트 조금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건데, 따위의 말을 당연하다는 듯 내뱉는 아이였다.
그래, 그냥 평균치에 메리트 조금.
남들만큼 먹고 날씬한 여자거나, 머리도 꽤 좋으면서 가슴은 C컵인 여자라고 했어봐. 아마 너는 앞사람 기분이야 똥이 되든 거름이 되든 한 계절이 다가도록 배를 잡고 비웃거나, 아니면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같은 새끼 땜에 우리나라 남녀평등지수가 117위인 거야 정신 나간 새끼야… 다음다음 생에까지 들어야 할 것 같은 욕설 한마당을 시작했을 거였다.
내 콤플렉스 때문인지는 몰라도 현지와 밤비는 삼촌에게 관대했다. 내가 했다가는 다음다음 생까지 놀림 받을 것 같은 아저씨 개그가 삼촌이 하면 먹혔다.
설마 돈이 많은 남자여서 그런 건 아니겠지.
삼촌은 여성에 대해서는 빈부미추를 막론하고 친절했다. 이십 대를 사귀고도 남을 사람이었지만 여자를 건드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꼰대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삼촌은 여성에게만 꼰대가 아닌 사람이었다. 남성에게는 친절하지 않았으며, 가족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그래도 가족이니까 참지, 승헌이 삼촌을 힘들어하는 건 당연했다.
승헌이 제일 먼저 조직을 이탈했다.
- 나를 봐서라도 남아주면 안될까?
- 너네 삼촌이 싫은 게 아니고, 뭐랄까.
- 알고 보면 좋은 사람이야.
- 나쁜 사람이어도 상관없어. 그게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승헌이 빠지자마자 삼촌은 말했다.
- 직원을 뽑아야겠다.
- 이러다간 술만 마시다 끝날걸? 직원이 있어야 일이 진척되지.
- 일이 진척돼야 직원을 뽑죠.
삼촌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구에게 사무실로 쓸 오피스텔을 구하라고 말했다. 서교동 일대라면 월세 칠팔십은 할테고, 직원을 뽑으면 최소 백오십은 줘야 할 텐데, 줄잡아 한 달에 이백오십, 일 년이면 삼천만 원이었다. 뚜렷한 계획도 없이 삼천을 질러? 아니지. 삼촌이 얘기한 거니까 삼촌이 내겠지. 굳이 내가 반대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삼촌은,
- 직원을 뽑기 전에 합자회사를 만들자.
- 합자회사라뇨?
- 투자한 돈만큼 지분구조를 만들자는 거지.
- 지분구조라뇨?
- 모두 네 명이니까 오백만 원씩 이천만 원으로 시작하자. 천만 원 오피스텔 보증금으로 내고, 나머지 천만 원 25%씩 지분 가지는 걸로.
밤비와 현지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백오십이면 모르긴 몰라도 밤비의 세 달치 생활비쯤은 될 거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삼촌은 한마디 덧붙였다.
- 오백이 아까우면 뭐, 빠져야지. 데려올 사람 많아.
잘 나가다가 한마디에 인심을 잃는 건 결코 집안 내력이 아니었다. 어디서 유입되었는지 알 수 없는 삼촌의 돌연변이 유전자였다. 밤비와 현지는 그 말을 가난뱅이들은 꺼지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구가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나는 삼촌에게 일대일 면담을 신청했다.
- 쟤네들은 아티스트잖아요. 사업가가 아니라고요.
- 아티스트 할아버지여도 사업을 하려면 사업의 룰을 따라야지.
- 삼촌이 가르칠 거 아니잖아요. 삼촌은 돈을 대고 일은 우리가 하면 되죠.
- 그럼 잘 될 거 같니? 기껏 키워놓으면 다른 데로 가버릴 걸?
- 딴 데 가면 페이 받고, 여기 있음 오너인데 왜 딴 데를 가요?
- 잘 될 때는 붙어있겠지. 적자나기 시작하면 바로 도망갈걸? 적자를 감당할 수 없으면 오너가 될 수 없다. 너는 오너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냐?
- 그게 무슨 말이에요.
- 뭐긴 뭐야, 너도 이백오십만 원 낼 생각이 없냐는 거지.
- 아티스트한테 이백오십이 어딨어요? 더구나 천만 원 합자 가지고는 세달 도 못 버티죠.
- 그러니까 이윤을 창출해야지.
- 세 달만에 어떻게 이윤을 창출해요?
- 그 정도 자신도 없이 어떻게 사업을 해?
말이 빙빙 돌고 있었다.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었지만 겪을 때마다 새록새록 짜증이 났다. 도대체 이놈의 삼촌은 뭘 자꾸 이렇게 돌려? 아, 그럼, 맘대로 하세요. 다 쫓아내고 삼촌 혼자 하시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