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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비 빨강 바지

--Episode #09

by 오렌




싸이에게 나팔바지가 있다면, 2025년 여름, 나에게는 빨강바지가 있다.



(이건 단순한 바지 이야기가 아니야, 나의 성장기야.)



그것도 그냥 빨강이 아니다. 태양보다 쨍하고, 방울토마토보다 탱탱한, 뙤약볕에 나가면 자동차 경보음 울릴 것 같은 정열의 빨강. 그뿐인가. 길이는 또 얼마나 짧다고. 9부 당연히 아니고, 7부 아니고요, 5부 아니고 말입니다. 2부와 3부를 오가는 그 어드매 즈음, 이른바 숏팬츠인 것이다!



사실 이 바지, 나의 워너비였다. 언제부터였을까. TV에서 모델이 휘적휘적 걷던 그 바지를 보고 ‘와 나도 저런 거 입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게. 하지만 하체 자신감은 늘 바닥. 하체는 나의 무한 미지대. 그러니 빨강이라니, 숏팬츠라니. 그건 마치… 된장찌개에 민트초코 올리는 수준의 도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번 주도 하체 루틴 갑니다!" 헬스장에서 트레이너 선생님이 외쳤고, 나는 숨이 턱에 걸린 채 스미스 런지와 불가리안 스플릿 스쿼트를 견뎠다. 스티프 데드리프트와 핵스쿼트도 배웠다. 내 안에 있다지만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대퇴사두근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며 레그 익스텐션도, 라잉 레그컬도 꾸준히 했다.



때때로 다리 힘이 다 털려서 후들거리며 바닥에 고꾸라지기까지 하면서. 검은색 고무 재질의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이 검은 바닥을 더욱 선명한 검정으로 바꿔놓을 때, 나의 붉은 근육도 함께 더욱 선명해진다고 믿으며. 튼튼한 두 다리로 죽기 직전까지 놓지 않을 보행의 자유를 갈망하며.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그 땀방울이 나를 바꿨지. 엉덩이는 업! 허벅지는 단단! 거울 속 내 다리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그래서 나는 질렀다. 그토록 원했던 빨강 바지를! 딱 하나 남았다는 장바구니 속 그 바지. 내 허벅지에 딱 맞아떨어진 운명의 짐웨어를!



그리고 나는 그 바지를 입고 헬스장에 갔다. 무채색의 헬스장 안에서 너무 튈까 봐 조바심 났던 방울토마토색 빨강 바지를 입고 유유히 들어섰다. 다행히도 또는 실망스럽게도 아무도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어, 바지 사셨네요. 이거 복싱 바지지요?" 친절한 트레이너 선생님만이 유일하게 나의 새 빨강 바지를 알아봐 주셨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네, 예뻐서요..."라고 시크하게 대답했지만, 이 바지를 입기 위한 오랜 날의 마음고생과 분투를 생각하면 선생님 손을 붙들고 한줄기 눈물이라도 흘려야 마땅했다.



하하하. 그래서 뭐 어떤가. 쉰을 넘긴 지금, 나는 드디어 나를 입었다. 빨강이라는 꿈, 숏팬츠라는 자신감.

누가 뭐라 해도 좋다. 내 여름엔 빨강 바지가 있으니까!





이거다!




최유리 -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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