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의리하네
장기연애를 하다보면 사랑이 아닌 의리로 만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실제 10년이란 긴 시간동안 쌓아온 정과 의리는 어마어마하다.
함께 해서 고마웠던 사람이 당연히 함께 해야 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1순위로 생각나는 사람이 가족에서 그로 바뀐다. 이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은 도덕적으로는 물론이고, 서로의 의리에 대한 엄청난 배신으로 다가온다.
사랑하는 감정을 떠나 엄청난 인간관계가 성립되는 것은 확실하다. 10년은 짧지 않다. 그와 나 역시 '전우애'와 같은 뜨거운 의리로 함께 한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했다.
사실 난 연애에 있어서 그리 의리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사춘기였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한 남자와 한 달 이상 사귀지 못 했다. 물론 사랑이라는 감정에 서툴렀던 어린 시절이기 때문도 있다.
내 친구들은 나의 새 연애가 시작될 때 마다 이번엔 일주일, 이번엔 한 달, 이번엔 백일 등등 내기를 하기도 했다. 그 만큼 연애에 있어서 금방 마음이 변하는, 의리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그저 감정에 충실한 여자였다.
고등학교 3학년때 처음으로 1년을 넘게 만난 남자가 있었다. 진중하게 연애를 하지 못 했던 나에게 깊은 감정을 느끼게 해준, 가장 오랜 추억을 남겨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난 그 친구에게도 결국 의리를 지키지 못 했다.
남녀간에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방법이 수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가 선물한 반지를 왼쪽 약지손가락에 끼고 다닌다거나, 핸드폰 배경화면을 그와 함께한 사진으로 해둔다거나, 제 3의 이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활용할 수 있다.
이 역시 물론 사랑이라는 더욱 무거운 감정이 베이스로 깔렸을 때 가능하다. 사랑이 식으면 그와 나의 의리의 무게도 매우 가벼워진다.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생각치 못한 여러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우리는 그 속에서 그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여러 노력들을 하게된다.
나 역시 연애 초기 그와 함께 한 수많은 사진을 핸드폰 배경화면에, 그리고 지갑에 지니고 다녔다. 아쉽게도 연애초기 큰맘먹고 그에게 선물했던 우리의 커플링은 세상 구경을 길게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가 실수로 내가 선물한 커플링을 잃어버렸던 것. 짝없는 반지는 소용없다 생각하고 내 반지도 바로 팔아버렸다.
10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커플링을 낀 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 후 결혼식장에서 결혼반지를 나누어 낀 것이 전부다.
하지만 우리는 그 외에도 의리를 지키기 위한 많은 노력을 했다. 그의 핸드폰 배경은 항상 나였고, 카카오톡과 페이스북 등 다양한 SNS가 등장했을 때에도 그는 온통 나와의 사진으로 도배했다.
기본적으로 '난 사랑하는 여자가 있으니 다른 여자의 접근을 사전 차단한다'는 암묵적인 효과가 발휘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방어책은 자연스레 줄게된다. 그보다는 내가 더 소홀해졌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직업을 핑계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내 독사진으로 바뀌었고, 배경화면 역시 잘생긴 연예인의 사진으로 바꾸기도 했다.
굉장히 사소한 것들이지만 연인사이에서 이것들이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그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들이 사랑의 척도로 작용하기도 한다.
의리를 지키려는 의지와 노력이 줄었을 때에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만남이 조금은 위험해질 수 있고, 배신에 대한 미안함도 줄어들 수 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최소한의 노력이 항상 필요한 이유다.
다행히 우린 의리를 져버리지 않았다. 그 뜨거움이 조금은 소홀해질 때도 있었지만 최소한의 끈을 놓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줘버리는 어리석은 실수를 끝내 하지 않았다.
친구들 사이에서만 의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더욱 어렵고, 더욱 중요하다.
의리로 똘똘 뭉친 커플만큼 단단한 커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단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