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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짱쓸 Apr 09. 2016

#44. 한 남자와 10년동안 연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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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9년차쯤 됐을 때, 주변에서 왜 결혼 안 하냐는 잔소리가 밀려올 때, 그리고 우리가 서로 가족이 되어가는 준비를 마쳐갈 때 쯤, 정말 현실적인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내게 됐다.


오래 연애한 만큼 양가 부모님은 우리의 연애가 결혼으로 이어질 것이라 예상하고 계셨고, 주변 친구들 역시 우리의 결혼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도 당연히 쉬울것이라 생각했다. 결혼 그쯤이야 뭐, 도장찍고 지금처럼 예쁘게 살면 그만 아닌가.


현실은 아니었다. 결혼이란 성대한 꿈을 꾸기도 전에 난 '아버지'라는 벽에 부딪혔다. 아버지는 딸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분이었다. 무엇보다 딸내미는 부족함없이 자라게 해주려고 모든 것을 쏟아부으셨다. 난 수 많은 기자들 중 평범한 한명에 불과했지만 아버지에게 난 세상 그 누구보다 정의롭고 똑똑한 기자였다.


아버지 역시 당연히 나의 연애를 알고 계셨고, 중간중간 그를 만나 이야기도 나누시곤 했다. 하지만 연애에서 결혼으로 이어지는 순간 아버지는 냉정해지셨다.


당장 우리가 살 집, 그리고 아이를 낳은 후의 생활, 그가 하는 일이 향후 비전이 있는 지 등등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막연한 일들까지 아버지는 꺼내놓으셨다.


아버지는 내가 그를 너무 사랑하는 걸 알면서도 좀 더 멋진 세상에서, 혹은 당신이 누려보지 못한 세상을 딸에게 살게끔 해주고 싶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반대셨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란걸 알고있었고, 아버지와의 싸움에서 그가 마음을 다치지는 않을까 조마조마 하셨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원망하시기도 했다.


30년 평생 아버지 속을 썩이지 않던 난 처음으로 아버지 속을 아프게 했다. 뜻을 꺾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3개월 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다.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난 그 만큼 그를 사랑하고 있으며, 누구보다 잘 살 자신이 있다는 의견피력을 침묵으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모두 지켜 본 그의 마음을 달래는데 시간을 보냈다. 3개월이란 시간이 나에겐 참 지옥같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그와 헤어질 자신도 없었다.


그는 그 3개월동안 아버지가 걱정하신 부분들을 한 두개씩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사업에 힘쓰며 월매출, 연매출까지 차근히 늘려나가도록 노력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을 얻기도 했다. 믿음직한 사위가 될 수 있는 준비를 그도 나름대로 했다. 나도 그가 지치지 않도록 변치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우리가 꼭 헤쳐나가야 하는, 중요한 과정이었다.


3개월 후 그와 함께 아버지를 다시 찾았다. 무작정 찾아가 현실적인 문제를 모두 말씀드렸다. 우리가 살 집에 필요한 대출, 향후 우려되는 금전적 문제들, 하지만 이쯤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신혼부부들의 공통 문제이며 우리는 이따위 문제들쯤이야 아무렇지 않게 이겨나갈 수 있다는 조금은 억지스러운 브리핑을 이어갔다.


아버지는 강하지만 약하셨다. 그저 3개월만에 본 딸내미가 반가우셨나보다. 상견례 자리를 만들어 보라는 짧은 대답에 눈물이 났다. 아마 우리가 어찌됐든 결혼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서운한 마음에 부리는 마지막 투정이셨나보다.


그 동안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린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날짜는 아직 잡지 않았지만, 다음 달에 비어질 예정인 아파트(허락을 받기도 전에 우린 미리 같이 살집을 알아봐뒀다)에 미리 들어가서 같이 식을 준비해도 되겠냐는 조금은 무모한 부탁을 그는 아버지께 드렸다. 그토록 철벽이셨던 아버지는 결혼허락과 함께 이른 동거까지 한 번에 오케이 하셨다. 철없던 나는 아이처럼 신나하며 그와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날 한없이 기뻐했던 나와 달리 아버지는 얼마나 허전하고 속상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어른들의 말을 처음으로 실감한 날이었다. 잘 살자. 누구보다 잘 사는게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와 나는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울었다. 그 동안 나름대로 쌓였던 속상함이 싹 씻겨내려갔다.  사이다를 한병 원샷한 것 같은 시원함과 청량감이 그와 나의 몸에서 동시에 느껴졌다.  


함께 해냈다는 성취감. 그것을 아버지는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으셨을까. 연애 9년차였던 우리는 그 때부터 다시 새롭게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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