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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짱쓸 Apr 10. 2016

#45. 한 남자와 10년동안 연애하기

여자가 하는 프로포즈


힘들었던 결혼 허락 이후 난 곧바로 식장을 알아봤다. 결혼 준비기간이 길면 길수록 서로에게 힘들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터라, 아버지의 허락과 함께 웬만하면 빨리 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언론인들이 결혼식장으로 자주 활용하는 프레스센터. 전화를 걸어 빈 날짜를 알아봤다. 올해는 이미 거의 다 차서 날짜가 거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기하게도 유일하게 남은 날짜는 12월 20일 딱 하루. 그와 내가 사귀기 시작했던 날이다.(이전 에피소드에서 다뤘던 낙산공원 이야기) 그날은 그와 내가 사랑을 시작한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자 우리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운명과도 같은 이 날짜로 당장 예약을 했고 우리는 결혼이라는 새 목표를 향해 한 걸음을 뗐다.


연애 10년차다 보니 그와 나는 그 누구에게보다 솔직하다. 결혼날짜까지 정해지자 갑자기 그가 어떤 프로포즈를 받고 싶은지 슬쩍 물어본다. 우리나라는 결혼 날짜를 다 잡아두고 프로포즈를 해야 하는 이상한 문화가 있다. 특히 연애를 10년이나 하고 있는 우리에겐 정말 쓰잘데기 없는 하나의 '지출요소'에 불과했지만, 프로포즈를 고민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왠지 짠했다.


순간 나와의 결혼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그에게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10년동안 날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자로 만들어준 그가 너무 고마웠다.


"프로포즈 할꺼야? 최대한 늦게해. 원래 보통은 결혼식 한 달 전에 다들 한데."


시간을 벌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프러포즈는 최대한 늦게 하는 거라고. 내가 그에게 해주고 싶었던 결혼 전 마지막 선물이었다.


이후 난 그의 친구들을 섭외했다. 8월인 내 생일에 파티를 빙자해 그에게 프로포즈를 할 계획이니 그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도록 잡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꼭 비밀로 해달라 당부했다.


영화관이나 호텔 등등은 현실적으로 내가 빌리기엔 비용부담이 컸다. 시내에 프로포즈를 할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리고 그와 나의 10년간의 추억이 담겨있는 사진들을 편집해 영상을 만들었다. 다행히 영상을 재생할 빔프로젝터와 넓은 공간이 있는 호프집을 하나 찾았다. 2층에 따로 큰 공간이 있어 프로포즈를 하기에 제격이었다.


사장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20명 자리를 하나 예약했다. 그의 친구들과 내 친구들까지 20여명을 초대할 계획이었다. 그날만큼은 그를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주고 싶었다.


디데이가 됐다. 그와 나의 사진을 넣어 특별제작했던 케익이 도착했고, 난 내 친구들을 미리 만나 예약한 곳을 방문했다. 아뿔싸. 뭐든것이 착착 진행된다 싶었는데 영상을 재생할 컴퓨터가 말을 듣지 않았다. 주변에 사는 모든 지인들에게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다. 다행히 친절했던 사장님께서 노트북을 빌려다주셨다. 그 노트북 덕분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를 위해 조금씩 준비했던 선물들, 결혼식장에서 신을 구두와 벨트, 그리고 그가 평소 갖고 싶어했던 시계를 선물 상자에 담아 몰래 숨겨뒀다. 내 친구들은 그에게 전해줄 축하의 장미꽃을 한 송이씩 자리 뒷편에 숨겨뒀다.


때마침 그가 도착할 시간이 되고, 난 다른 자리에 몰래 앉아, 케익을 들고 그를 기다렸다.


그가 친구들과 함께 도착했다. 그의 친구들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텅 비어있었던 넓은 자리가 꽉 채워졌다. 그가 난 어디에 있냐고 물을 때쯤, 직원분이 노트북 영상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가수 지아의 '물론' 이라는 음악이 재생되면서,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영상이 재생됐다. 그동안 사랑해준 그에게 주는 특별한 선물이자, 고마운 내 마음이었다. 난 그의 얼굴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눈가가 촉촉해졌다는 후문이다.


영상이 끝나고 친구들이 박수를 쳐주자, 케익을 들고 내가 등장했다. 너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내가 먼저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함께했던 긴 시간들과 힘겹게 결혼허락을 받았던 모든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는 연신 고맙다며 나를 꼬옥 안아줬다.


도와준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그의 친구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하며 즐거운 저녁자리를 가졌다. 무엇보다 어깨가 으쓱했을 그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저녁자리가 끝나고 그와 함께 집에 돌아왔다. 내가 준 선물과 케익과 장미꽃을 들고. 그와 집에서 함께 단둘이 영상을 다시 봤다. 꾹꾹 참았던 그도 눈물을 흘렸다.


물론 프로포즈를 준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나, 그 성과는 그 어떤 것보다 달콤했다. 특히 내가 전하려했던 모든 감정을 빠짐없이 받아준 그의 모습은 날 더욱 행복하게 만들었다.


여자가 하는 프로포즈. 조금은 생소하지만 나에겐 최고의 순간이었고, 10년 연애에 있어서 서로를 더 사랑하게 해준 일종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당시 선물했던 우리의 사진이 담긴 프로포즈 케익은 아직도 우리집 냉동실에 보관 중이다. 먹을 순 없지만 냉동실을 열 때마다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 때도, 지금도, 난 그에게 말한다.


"나의 소중한 20대를 함께 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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