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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몽 Nov 27. 2021

객진번뇌

손님같다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며 토씨 하나 점 하나로 의미가 다른게 현실의 무서움이다.

우선 나 역시 단처 투성이고 누군가에게 상처주고 있는 자로서 상처받기도 한다.

 어떤 말과 상황은 개의치 않고 마음을 넓게 쓰고 개념치 않은데 어떤 말과 상황은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려는 듯 괴롭기 한량 없다.

 그 차이는 뭘까.

 번뇌의 양과 질적 차이

손님 형태의 차이 번뇌를 손님이라고 표현한다면 존재하는 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는 모든 감각체로 부닥거림을 당하며 어쩔 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문들을 지키고 서서 손님을 받아야만 한다.

 살아있다는 건 영업상태이다. 열심히 사는 한 온갖 부닥거림은 더욱 많아진다.

 나홀로 국밥으로 있다면 그나마 타인으로  인한 번뇌는 줄어들지 모르나 역시 혼자 사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연에 의해 맺어지고 멀고 가까움에 따라 번뇌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마음에 그림을 그린다.

이것도 객진번뇌. 저것도 객진번뇌. 말하지 않아도 안들 나는 움직였고 또 흔들렸다.

 자동반사다.

코가 있으므로 냄새의 번뇌가 있고, 눈이 있어 보임의 번뇌가 있고, 귀가 있어 듣는 번뇌가 있다.

입이 있어 맛의 번뇌가 있다. 온갖 희노애락의 근원처가 있기에 나는 자동수동 상태다.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생존해가려면 이 기관처를 잘 사용해야한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사건 사고로 이 기관처가 망가질 수도 있다. 그러면 더  괴롭다. 육체의 고통은 신경세포의 통점에 의해 생존불가능을 선고 받을 수도 있다. 더 이상 인간 구실을 못함으로 인해 살아갈 명분을 잃고 더욱 큰 지옥을 맡볼 수도 있다.

 번뇌는 살아있는 존재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인형은 번뇌가 없다.

번뇌  즉 보리라는 부처의 말씀이 있다.

보리 즉 번뇌. 번뇌 즉 보리. 생즉 사 사즉 생.

그말이 그말이건 만 괴로움은 없이 태어난다.

끊어내도 또 생성된다. 명상은 정지상태로 가기위한 워밍업이다. 멈춤이 왜 필요한 걸까.

쉬고 싶은 것은 왜 일까.

아마도 계속되는 영업상태에 손님 뒤치락에 지친 것이여서 휴식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재충전 해야 다시 살아가니까.

진상손님을 만나면 대처법이 여러가지다.

이 여러가지를 잘 선택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이 지혜 반야라고 생각한다.

 친구의 말에 기분 나빴다. 너는 이렇게 말해서 상처받았다. 그 말투를 고쳐주길 바란다.


내가 나쁜점이 많구나. 내가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 가까워서 내마음을 안다고 생각해서 그냥 편하게 표현한건데 이제부터는 의식하고 말해야 한다는 거네


너는 가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게 그렇게 하는것은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그런 말투와 말을 너보다 어른이거나 다른 상대에게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의식한 행위로 예의와 조심성을 갖춘 것이다.

가까운  이들도 똑같다. 조심성을 갖추는 것을 불편해 해서는 안된다.

내멋대로 편하게 한다고 해서 가족과 친구에게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너를 모른다

너의 보여지는 것으로 상처받고 화를 내기도 한다.


친밀해질수록 예의를 갖추고 조심성있게 말하는 것은 관계가 오래 갈 수 있는 길이다.

작은 행동으로 다투고 헤어지는것은 마음이 상해서 틀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로 원수라는 선언까지 한다.

 마음을 세우고 지키고 깨어있기가 죽기보다 힘들다는 증산도  도전 말씀에 있다.

 수행을 할때는 그나마 큰 인격체가 된듯하다가

돌아서면 완전 또 다른 나 소인배로 전락한다.


예의와 다스림으로 나를 수행한다면 언젠가는 달라지리라 믿는다.

 

친구가 충언을 곱게 받아들여 나를 존중해주길 바란다. 변하지 않는다면 관계는 끊어질 것이다.


쌍욕을 서로 하는 자들끼리는 끼리 친구가 되겠지만 쌍욕을 싫어하는 자들과는 어울리기 힘들것이다. 담배친구, 술친구,색친구, 노는친구  등등 친구는 여러가지이나 그 어디에서나 친구가 될 수도 있지만 자기의 인격은 격을 높여야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볼 뿐임을 잊지 않는다. 결이 다 틀리므로 한결 같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 노는 물고기는 다르고 물의 수질도 다른 법이다.

물고기가 맑으면 자연 일급수 물을 찾을 것이며 그 물이 아니면 죽는 것이다.

 환경은 삶과 죽음 문화를 좌우한다. 이 역시 태어난 업연이 90퍼센트가 작용한다는 것이니 나는 새는 물속에 살 수 없고 물고기는 하늘에 살 수 없음이다.

자기가 이미 태어난 본성  태생으로 금생에 하늘의 신이 되겠는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객진번뇌를 겪고 이 부분을 명확히 관하여 몸과 마음을 닦아 비록 몸은 인간이나 도인의 길을 가는 것이 하늘에 대한 인간 의 도리다.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그 귀함을 알아야 하는데 인간멸시를 하니 스스로 개돼지보다 못한 인생이 된다.


물고기는 물에서 놀고 새는 하늘에서 놀건만

인간으로 태어난 나는 마땅히 놀곳이 없다.

그리하여 하늘도 올라 하늘에서 놀고 물속에 이르러 물에서 놀건만 내가 머문 곳은 땅이다.


하늘에 매인바도 아니고 물에 매인바도 아니고 오로지 땅에  매인바이니 이 땅에서 잘 살 생각을 해야겠다.

 땅투기를 하는 것이 그래서인가 웃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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